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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 부도의 날'(2018.12.5)

박연서원 2018. 12. 18. 09:09

영화 '국가 부도의 날'


관람일시 : 2018년 12월5일(수) 오후2시30분

관람장소 : 롯데시네마 브로드웨이(신사)점

감독 : 최국희

출연 : 김혜수,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관람평 : 97년 외환위기를 실제로 겪은 바 있는 나로선

            영화의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가고 기억을 새롭게 한다.

            유아인과 허준호 역과 같은 실제인물도 상당히 많았음을 안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통화정책팀장이 IMF행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재정국 차관과 경제수석 등이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설정은

            아무리 영화의 재미를 위한 허구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동아일보 12월8일자


재정국 관료가 IMF 상황 몰고 갔다는 설정은 사실과 달라… ‘국가부도의 날’ 영화 속 사실과 허구

이새샘 기자 입력 2018-12-08 03:00수정 2018-12-08 03:32
    
‘국가부도의 날’은 세 인물을 중심으로 1997년 외환위기의 막전막후를 다룬 영화다. 한시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종금사 직원 윤정학, 공장을 운영하는 가장 갑수(왼쪽 사진부터)는 각자의 자리에서 초유의 ‘국가 부도 위기’ 상황을 맞는다. 실제 인물을 연상시키는 배역들이지만 인물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상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6일 기준으로 관객 2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는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에 이르게 된 과정을 긴박하게 묘사해 당시 어두운 터널을 직접 경험한 30, 40대 관객들의 기억을 끌어내며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는 극적 재미를 위해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장면도 많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지만 아직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비교적 최근의 사건인 만큼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도 있다. 국회 국정조사 회의록, 관계자들이 남긴 저서와 언론 보도 등을 참고하고 당시 의사결정에 관여했던 인물들을 인터뷰해 6가지 의문점을 정리했다. 

[의문 1] 한시현 팀장, 윤정학, 갑수는 실존 인물일까?

영화는 주인공 3명의 동선을 대비하며 극적 효과를 높인다. 한국은행의 한시현 통화정책팀장(김혜수)은 경제위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종합금융회사에 다니던 윤정학(유아인)은 위기를 기회로 보고 투자자를 모아 ‘한판’을 벌인다. 공장을 운영하는 갑수(허준호)는 납품 대금으로 백화점 어음을 받지만 백화점이 부도가 나면서 절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3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특히 한은 통화정책팀장은 존재하지도 않는 직책이다. 윤정학도 실존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금융계에도 남다른 통찰력으로 경기 흐름을 읽어낸 사람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로 성공 신화를 쓴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투기적 성향을 보인 윤정학과는 다르지만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투자의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갑수는 실존이기도 하고 가상이기도 한 인물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이듬해인 1998년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8569명으로 1997년(6022명)보다 30% 이상 급증했다. 평범한 가장이자 중산층이었던 갑수의 절망은 당시 우리 사회가 겪었던 고통을 대변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과 일대일로 연결되지만 인물에 대한 묘사는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재벌과 결탁한 부패 관료로 그려지는 재정국 차관(조우진)은 재정경제원 차관을 염두에 둔 설정이지만 강만수 당시 차관의 실제 행적과는 관계가 없다. 
과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김인호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도 이름 없이 직함만으로 영화 속에 등장한다. 

[의문 2] 재정국(재정경제원) 관료가 IMF 구제금융으로 상황을 몰고 간 것일까?

영화에서 재정국은 대기업에 유리하게 한국 경제를 개편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을 받도록 상황을 몰고 간다. 반면 한시현을 비롯한 한은 직원들은 이를 막으려 애쓴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국회 국정감사 회의록을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경제가 어찌 되어 가는 거요?”라고 묻자 이 총재가 “‘김인호 경제수석에게 IMF로 가는 것 외에 국가 부도를 막을 방법이 있느냐’고 강하게 하문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은이 IMF 구제금융을 불가피하게 봤고, 강경식 당시 부총리는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되도록 IMF행을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영화는 한은 직원들이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거나 일본 정부에서 달러를 빌려오는 등 대안을 냈는데도 재정국이 이를 가로막은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재경원 공무원들의 아이디어였다. 이런 대안을 검토했지만 당시 한국 상황으로선 성사시키기 힘든 카드였다. 

당시에는 오히려 ‘왜 IMF에 좀 더 빨리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았나’가 쟁점이었다. 정부가 의사결정에 속도를 내지 못했고, 시간에 쫓긴 IMF와의 협상 결과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의문 3] 정책 결정권자들은 정말 ‘국가 부도’ 직전까지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을까?

영화에서는 한시현이 한은 총재에게 수차례 보고서를 올리지만 무시당한다. 재정국 차관도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한시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국은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부도를 낸 뒤 3월 진로그룹 부도 위기, 9월 말 기아그룹 화의 신청이 이어지며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었다. 여기에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이 차례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현실화하고 있었다. 

1997년 7월에는 재경원에서 통화 위기를 우려하는 ‘밧화와 기아―상이한 문제인가’라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태국 통화인 밧화 폭락과 부도 위기에 몰렸던 기아자동차가 서로 연결된 문제임을 부각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앞으로 통화 위기가 어느 정도 심각하게 나타날 것인가는 우리 정부와 기업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불안감이 높아지자 강 전 부총리는 당시 미국과 유럽을 돌면서 ‘한국 경제 설명회’를 열 정도였다.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기초)’이 튼튼하니 안심하고 투자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부총리가 직접 홍보에 나서야 할 정도로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이 컸다. 

그때 정부는 국회에서 금융개혁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금융개혁으로 경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다만 정권 말 레임덕과 야당의 반대로 개혁은 지연됐고 정부는 단기 대응에도 실패했다. 

[의문 4] 정부는 IMF 구제금융 신청 사실을 숨겨 국민들이 피해를 보도록 방치했을까? 

영화는 재정국 관료들이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겨 국민들의 피해를 키우고, 재벌들에게는 뒤로 이 사실을 알려 이득을 챙기도록 했다는 음모론을 내세운다. 특히 교체된 신임 대통령경제수석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결정해 두고도 기자들 앞에서 당당히 “IMF로 가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정부가 구제금융 신청 여부를 놓고 오락가락한 것은 사실이다. 구제금융 신청을 사실상 확정하고 발표를 하기 직전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경제수석과 부총리를 전격 교체하면서 혼선은 더욱 커졌다. 새로 임명된 임창열 당시 부총리가 강 전 부총리가 발표할 예정이었던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임명 당일인 11월 19일 발표하면서도 ‘IMF로 간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이다. 

이 대목은 이후 국회 국정감사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며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김 전 대통령과 강 전 부총리는 임 전 부총리에게 IMF 관련 결정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임 전 부총리는 국감에서 “IMF와 협의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구제금융 신청이 결정됐다는 점은 인수인계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누구의 말이 옳든, 당시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리더십 공백기’였던 점만은 분명하다.

[의문 5] 미국은 정말 IMF를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었을까?

영화에서는 IMF와의 협상 도중 같은 호텔에 미국 재무부 차관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시현이 IMF 측에 “왜 미국 재무부 차관이 이 호텔에 와 있느냐”고 호통 친다. 미국의 지시대로 협상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지 따져 묻는 장면이다. 외환위기의 배경에 한국 경제를 집어삼키기 위한 미국과 거대 투기 자본이 있었다는 음모가 드러나며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대목이다. 

실제 영화가 참고했을 만한 순간이 있었다. 당시 재경원 제2차관으로 협상팀 수석을 맡았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IMF로 가게 된 과정과 협상 막전막후를 상세히 기록한 ‘외환위기 징비록’에서 “당시 미국 재무부의 데이비드 립턴 차관이 IMF 협상팀과 같은 힐튼호텔에 묵으며 협상팀을 만나는 장면이 한국 협상단에 목격됐다”고 썼다. 그는 “이후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본시장 개방 등 IMF의 조건이 실은 미국의 주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IMF의 가혹한 요구 조건에는 경제 개방은 늦추면서 공격적인 수출 정책을 펼치는 한국을 탐탁지 않아 하던 미국의 입김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미국의 음모로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IMF는 각 국가가 출자한 지분에 따라 의사결정권을 갖는 국제 금융기구다. 미국의 지분이 17% 안팎으로 가장 높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인 미국이 협상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면이 있다. 미국이 일부러 배후에 숨은 것도 아니었다. 주요 협상 파트너였던 스탠리 피셔 당시 IMF 부총재부터 미국 측 인사였고, 티머시 가이트너 당시 미국 재무부 차관보 등 미국 측 인사는 구제금융 신청 전부터 한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IMF의 무리한 요구로 한국 경제가 과도한 부담을 진 측면이 있지만 모든 것을 음모로만 볼 수는 없다. 

[의문 6] 현재 경제 상황은 1997년 외환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일까?

영화는 21년 뒤인 현재 한국을 조명한다. 1500조 원 규모로 불어난 가계대출이 위기의 도화선이 될 거라는 경고를 담았다. 실제 가계부채는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험 요인 중 하나다. 금리가 오르면 가계의 이자 부담이 늘어나 도산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 

정책 결정권자의 무능, 정치적 리더십의 실종,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 등 영화에 담긴 위기의 원인은 충분히 반면교사로 삼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다만 현재의 가계부채가 1997년과 같은 위기로 직접 이어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면서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 등 서민들의 가계 소득이 악화하는 것이 문제”라며 외환위기와 지금 경제 상황은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위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금융사 직원 윤정학(유아인)은 국가 부도 상황을 이용해 일확천금을 거두려 한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갑수(허준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위기에 휩쓸린다. 이 영화에는 당시 구제금융 협상에 참여한 당국자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나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기까지의 막전막후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세종=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IMF 탓 망했다?···'국가 부도의 날'은 팩트 파산의 날
기사입력2018.12.04 오전 12:05 최종수정2018.12.04 오후 5:32     
 
IMF 다룬 ‘국가부도 …’ 흥행 가도
“미공개 진실” 내세워 벌써 157만
사실 왜곡 불구 관객은 다큐로 인식
“과거 교훈 못 얻고 적폐몰이” 지적
경제위기 무시한 YS의 오만과 무지
닮아가는 문 정부 향한 불안감 커져
[안혜리의 논설위원이 간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왜 사실을 왜곡했나
지금으로부터 21년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첫 주말에 157만명을 넘어서는 등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IMF행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팀장으로 나오는 김혜수. [사진 CJ]

IMF행을 막기 위해 무능한 경제수석과 사악한 차관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팀장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는 개봉 전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를 다 포기한 굴욕적 협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며 "반드시 재미있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보고)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관객들은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며 세계화에 시동을 걸었던 과거 보수정권에 돌을 던지며 분노한다. 문제는 극적 재미를 위한 각색 수준을 넘어 명백한 사실조차 비틀어 의도적으로 반기업·반미 정서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또 한편의 혹세무민형 정치영화의 탄생을 뒤쫓아 봤다.
  
 
영화 속 한국은행 총장과 청와대 경제 수석은 무능하고 재정국 차관은 사악하다. [사진 CJ]
  
'국가부도의 날' 개봉 첫날인 지난달 28일 저녁 상영관을 꽉 채운 관객들 틈에서 영화를 봤다. 배우들의 안정적 연기에다 영화적 재미도 적지 않았으나 몰입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사실 왜곡 때문이었다. '검은 사제들''마스터'같은 흥행작을 냈던 중견 제작사인 '영화사 집'은 영화 도입부에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제작되었지만 모든 인물과 사건은 허구로 재구성되었다'는 자막을 띄워 왜곡 시비를 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관객들은 등장하는 사건을 '팩트'로 인식한다. 미도파·한보·기아 등 부도로 쓰러진 기업이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데다 중간중간 실제 TV뉴스 화면이 계속 반복되고 후반부엔 당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자막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재경원을 재정국으로, 한국은행 총재를 총장으로 슬쩍 바꿨지만 관객은 당시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강만수 재경원 차관,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이경식 한은 총재 등 실존인물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1997년 12월 8일 휴버트 나이스 기금 협의단장(왼쪽)이 한국을 찾아 한국측 협의단장인 강만수 재경원 차관과 만나 협의일정 등을 논의했다. [중앙포토]
  
실제로 관람 후기엔 '어려서 몰랐는데 영화 덕분에 그때를 알게 됐다'거나 '교육용으로 손색없는 영화''웰메이드 팩폭(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한다는 '팩트 폭행'의 준말)''과장 하나 없이 현실을 잘 녹여낸 영화'라는 식으로 다큐로 받아들인 평이 대다수를 이룬다.

러닝타임 2시간짜리 영화가 새롭게 알려줬다는 그때의 진실이란 이런 거다.

'고용 불안과 빈부 격차 같은 작금의 모든 경제 문제는 IMF구제금융 탓이고, 재벌과 결탁한 경제 관료(재정국 차관)가 노동자를 정리해 기업을 살리겠다는 의도로 일부러 IMF를 끌어 들여 서민의 고통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이 됐다. '

훗날 '위장된 축복'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IMF 손을 빌려 우리 손으로 못한 경제 수술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고의 IMF행'은 너무 나갔다.
후반부엔 아예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나라 경제를 살리고자 했으나 국민들의 금은 기업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는 자막으로 선한 서민과 악한 기업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분노를 자극한다. IMF 사태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음모론까지도 재소환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짧은 영화에 담느라 아무리 선악구도를 극대화했다해도 지나치게 악의적인 역사 왜곡이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일부 사실을 바꿨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객관적 사실을 끼워넣어 교묘하게 다른 거짓까지 전부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다. 책상 위 서류나 컴퓨터 화면 속 자료 문구 하나까지 세심하게 팩트 체크를 했다는 제작진이 불과 20년 전 사실을 왜 이렇게 엉터리로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관점으로 과거를 취사선택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색 논란을 일으켜온 CJ엔터테인먼트가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라는 게 혹시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우연이겠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국회에서 "1997년 11월 21일 IMF구제금융 신청으로 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 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고 연설한 직후 촬영이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1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뒤 김무성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IMF 이후 망가진 국민의 삶과 적폐 청산을 얘기했다. [중앙포토]
  
2017년 초 신예 엄성민 작가의 시나리오를 접하자마자 제작을 결정했다는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서울 논현동에 있는 영화사로 찾아갔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마주 앉은 이 대표는 "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고 이 영화도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며 "그렇게 보였다면 영화를 못 만든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CJ와는 과거 여러 작품을 같이 해봤지만 정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겁이 많은 조직"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존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인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묘사하고 IMF행을 지나치게 선동적으로 해석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재정국 차관은 재벌과 결탁해 막을 수 있었던 IMF를 끌어들이는 사악한 인물이다. [사진 CJ]
  
CJ측의 공식 입장도 이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CJ 관계자는 "영화사 집은 정치적 색채가 없을 뿐더러 대표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걸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는 "통상 처음 아이디어 구상에서 개봉까지 길게는 4~5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개봉할 때의 정치적 함의까지 예측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며 "과거 논란이 된 작품 한두 편 때문에 매번 정치적이라는 착시효과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돈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다시 말해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해도 여전히 찜찜하다.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 정치적으로 편향된 작품을 만들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문 대통령의 관점대로 모든 악의 근원을 IMF로 규정하다보니 기본 전제부터 틀린 채 출발한다. 사실 당시 재경원 관료들은 어떻게든 IMF로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관료의 사익을 추구하려고 어느날 갑자기 IMF행을 결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수석은 IMF행을 지연시킨 데 따른 책임을 추궁받았고, '환란 주범'으로 감옥에 가기까지 했다.

 
'환란 주범'으로 감옥에 갔던 강경식 전 부총리(오른쪽)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1998년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구치소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굳은표정을 짓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삼(YS) 대통령으로부터 IMF체제를 물려받은 김대중(DJ) 정권에서 '위기 해결사'로 불리며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이렇게 썼다.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기업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빌려 과잉 투자를 했고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가 별안간 못 믿을 나라라는 인식이 퍼지며 썰물처럼 돈을 뺀 게 위기의 본질이다."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특별대책반이었던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문제를 몰랐던 게 아니라 대선을 앞두고 여야간 대립이 극심해 정치 리더십이 실종하면서 우리 거버넌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또 "불난 집에 달려온 소방차한테 '소방차'위기라고 하지 않는다"며 "IMF때문에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비켜가는 일"이라고 했다. 불 끄러 온 소방관이 귀중품을 물에 적셨다 해도 소방관 도움으로 불을 끈 것은 여전한 사실이라는 얘기다.

 
1998년 1월 청와대에서 미셸 캉드쉬 IMF총재를 접견하는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영화엔 마치 경제관료에게 속은 것처럼 스치듯 묘사되지만 사실 IMF위기엔 YS의 오만과 무능도 크게 한몫했다. 경제팀에게 IMF행을 처음 보고받은 1997년 11월 8일에도 YS는 경제가 아닌 자신의 정치적 안위와 관련된 사안으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경제 말고 딴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말이다.

영화와 별개로 걱정스러운 건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또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경제상황이 어렵고 일자리가 줄어들어 아우성인데, 문 대통령의 마음은 경제 쪽에 있지 않은 것같다"고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위기를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도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최범수 전문위원은 은행 대출의 15%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를 내고 사전에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자료가 언론에 흘러나가자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문 정부는 원하는 경제 통계가 나오지않자 아예 통계청장을 갈아버렸다.

DJ 비서를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국가부도의 날'을 관람한 뒤 페이스북에 "위정자들의 오도된 경제현장 읽기는 잘못된 경제정책의 시작이자 국가부도의 날 예비 초청장"이라며 "문 대통령에게 잘못된 경제정책이 얼마나 국가와 국민에게 큰 재앙인가를 직접 목격해 보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고 썼다.

혹자는 영화는 영화일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치 선동가 괴벨스가 러시아의 1차 혁명을 그린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을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볼셰비키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만 봐도 영화의 정치적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영화의 정치성을 다뤘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도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우리 시대의 유력한 정치적 매체는 영화"라고 하지 않았나.

제대로 된 사실 기반 위에서 역사적 교훈을 주는 대신 얄팍한 이념적 편향성으로 관객을 선동하는 영화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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