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Piano Concerto No.1 Op.1 in F#Minor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1번 Op.1
Sergei Rachmaninov, 1873 - 1943
전 악장 연주
Krystian Zimerman, piano
Seiji Ozawa, cond.
Boston Symphony Orchestra
Rafael Orozco, piano
Edo de Waart, cond.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00:00 - Vivace
12:30 - Andante
18:52 - Allegro vivace
Sviatoslav Richter, piano
Kurt Sanderling, cond.
USSR RTV Large Symphony Orchestra
[작품해설]
피아노협주곡 1번이 처음 작곡된 것은, 1890년에서 1891년에 걸친, 즉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생시절이었다. 학생시절에는 이 곡 외에도 약간의 관현악곡과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고 있었지만, 이 협주곡으로 비로소 인정받게 되어 작품 1로 모스크바의 A. 구트헤일 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촌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이기도 한 알렉산드르 시로티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한 듯하며, 초연의 연대도 뚜렷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17년에 이르러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철저히 개작하여 오늘 날에 알려진 형태의 것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걸작 제 2, 제 3 협주곡을 발표한 후에, 현재 연주되고 있는 제 1협주곡을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1917년 가을, 즉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한창일 때, 이 개작이 이루어져, 소비에트 정권이 확립된 그 해 말에 라흐마니노프는 가족과 함께 핀란드로 망명하여 얼마 후 미국을 정착지로 하고, 다시는 러시아에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곡은 그가 모국에서 작곡한 최후의 작품인 셈이다.
제 1악장 Vivace F# 단조, 4/4 박자, 소나타형식
Vladimir Ashkenazy, piano
Andre Previn, cond.
London Symphony Orchestra
처음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의 유니즌이 취주하는 힘찬 팡파르가 있으며, 스포르잔도의 전 합주로 마무리된 곳에서 피아노가 격렬하게 셋잇단음을 중심으로 한 카덴짜를 타기 시작한다. 이 음형은 제 1악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그리이그의 협주곡의 처음 부분을 연상시킨다. 카덴자를 받고 이번에는 금관이 팡파르 음형을 연주하고, 이것과 피아노가 서로 경합하면서 진행한 후, 다시 다른 카덴자가 온다. 여기까지가 서주이며, 다음에 모데라토가 되어 바이올린이 약간 센티멘탈한 제 1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주제는 다음에 피아노로 옮겨져, 쇼팽적인 펼침화음의 처리에 의해서 아름답게 전개해 간다. 이윽고 곡은 비바체로 되돌아 와서 스케르잔도의 페이지가 되어 피아노가 장식적으로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템포는 느리게 되어 관악기가 부드러운 가락을 곁들이고, 피아노가 마무리 지은 곳에서, 포코 메노 모소가 되어 제 1바이올린에 환상적인 제 2주제가 나타난다. 이 주제는 피아노의 섬세한 꾸밈 가운데서 발전하고, 서서히 가라앉아 제시부를 끝낸다. 그 후에 피아노의 힘찬 카덴짜가 들어와서 그대로의 기세로 전 악기가 등장하여 악보 제 삼의 악상에 의한 비바체의 전개부가 시작한다. 이것은 서주의 악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격렬하게 돌진하나, 이윽고 조용히 가라앉고, 다음에는 무거운 발걸음처럼 변한다. 그 뒤, 자유스런 전개가 계속하고 강한 고조로서 클라이맥스에 으르렀을 때, 호른이 팡파르 풍으로 세게 연주되어, 다른 악기와의 경합을 연출하며, 그것을 받아서 목관과 피아노의 구밈 음형이 모데라토로 다정하게 대화한다. 이것이 가라앉고, 호른의 독주에 제 1주제의 동기가 칸타빌레로 나타나 이하 제 1주제부의 요소에 의한 전개로 나아가, 차차 격렬함을 더하여, 드디어 비바체로 서주의 피아노의 카덴짜가 나타나 재현부가 된다.
재현부에서는 거의 제시부의 순서로 각 주제가 다루어지나, 피아노는 한층 더 눈부시게 된다. 그리하여 제 2주제부 다음에 비바체의 장대한 관현악의 악상이 게속하고, 그것이 악보 제 3으로 발전하여 전 합주로서 힘찬 마침을 하면, 독주 피아노의 큰 카덴짜가 된다. 카덴짜는 라흐마니노프의 비르투오조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는 부분으로, 호탕하고 쾌활한 가운데서도 러시아적인 서정성을 충분히 감돌게 하고 있다. 그 뒤, 비바체의 코다로 빠르게 이 악장을 끝낸다.
제 2악장 Andante D 장조, 4/4 박자
일종의 환상곡이라 할 수 있는 형식의 악장으로 전체적으로 맑은 안정성이 있으며, 북유럽적 낭만에 넘치고 있다. 호른이 취주하는 광활한 느낌의 가락으로 시작되어, 다른 악기가 얽혀서 무드를 조성하고,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아 카덴짜를 형성한 후에, 새로 피아노가 정리된 주제를 정서로 가득차게 연주한다. 이것이 전개하여 파곳의 독주와 피아노의 왼손으로 러시아풍의 가락이 노래뇌다, 호른은 또 다시 첫머리의 음형을 불고, 피아노는 이를 장식한다. 이윽고 곡상은 슬픔을 지닌 듯한 느낌이 되어, 제 1바이올린과 첼로가 슬픈 주제를 연주하고, 피아노가 대비적인 꾸밈음형을 계속 연주한다. 끝으로 짧은 코다가 있은 후, 사라지듯 조용히 곡을 맺는다.
제 3악장 Allegro vivace, F# 단조
크게 세도막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처음에 9/8 박자와 12/8박자가 교차하는 격렬한 악상이 있고, 이어서 피아노가 힘차게 주제를 연주한다. 이 주제는 반주 관현악과의 경합 가운데서, 자유로운 발전을 이룩하고, 피아니스틱한 효과의 악상이 진행한다. 갑자기 전 합주로 유쾌한 가락이 연주되며, 그 보다 중간부로 옮겨서 현이 라흐마니노프 일류의 특색을 지닌 센티멘탈한 주제를 완만한 템포로 차분히 노래해간다.
이것을 피아노가 여러가지로 장식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피아노의 카덴짜가 있은 후, 중간부가 끝난다. 주부의 재현은 첫머리의 악상이 갑작스럽게 되돌아오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그 주부의 요소를 되풀이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 1악장의 수주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 화려한 코다가 되며, 이 끝에 가서는 유쾌한 주제가 F# 장조로 쓰여져 힘차게 전 곡을 마친다.
라흐마니노프는 항상 과묵하여 자신의 작품 활동이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는지를 타인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나타리아 스카론이 그에게 작품 활동이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야 비로서 그는 그녀에게 하나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1년 전에 그 협주곡의 제1악장을 작곡했고 제2악장도 완성한 후였다.
1891년 4월 7일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지막 악장이 작곡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쓰지는 않았소. 여름이 다가올 때까지 그 협주곡을 마무리 짓고 여름동안에는 관현악으로 편곡할 것이요" 라고 쓰고 있다. 그 협주곡은 그해 7월 18일에 완성되었고, 2주일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적을 둔 그의 친구 미하일 슬로노프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 작업을 좀더 빨리 끝낼 수 있었네. 그러나 제1악장을 쓰고난 다음 오랫동안 나태하게 지내다가 7월 18일에 들어서야 비로서 나머지 악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네. 나는 이틀 반나절만에 마지막 2개의 악장을 복사, 편곡했지. 그 일이 어떠했는지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꺼야. 아침 5시부터 시작하여 저녘 8시까지 꼬박 써 나갔거든" 이라고 썼다. 라흐마니노프는 1892년 3월 29일, 모스크바 음악원장인 바실리 사포노프가 지휘하는 학생 연주회에서 제1악장만의 첫 연주를 가졌다. 그러나 곧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1908년 4월 12일 드레스덴에서 그의 음악원 동료 중의 한 사람인 니키타 모로조프에게 "나를 매혹시키는 3개의 작품이 있네. 제1번 협주곡, 집시 카프리치오, 제1번 교향곡이 바로 그것일세. 나는 이곡들 모두를 수정된 우아한 형태의 곡으로 무척이나 바꾸고 싶네" 라고 쓰고 있다.
이 세곡 중에서 제1번 협주곡만이 수정되었다. 실상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이 1917년 크리스마스 바로 직전, 러시아로부터 파리로 이주하기 전 그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그가 수정한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 제1번 협주곡이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미성숙한 실험을 정교하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이 수정된 작품들은 작곡가로서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에 그의 음악적 성숙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초기의 곡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답습하였지만, 제2번 협주곡의 구조는 보다 잘 정비되어 있으며, 작품을 산만하게 하는 소재들은 제외시켰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무디고 상상력이 빈약한 화성에 소곡과 서곡의 날카로움이 가미되고, 불투명한 구성이 이제는 투명하고 보다 복잡하다.
라흐마니노프가 근본덕으로 그 작품을 개조한 후에도 그 협주곡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이유를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제1번 협주곡의 두 개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제2번, 제3번을 작곡했다. 제1번은 아주 다른 작품이다. 아주 독특하며 폭넓은 멜로디가 있지만 파릇파릇한 신선함과 격렬함이 있다. 이 특성들은 제2번 협주곡의 음울한 느낌, 제3번 협주곡의 두드러진 엄격함과 예리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폭넓은 인기를 모아왔고 지금도 계속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그의 성숙된 스타일의 흔적인 것이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1873-1943)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유서있는 러시아 귀족이며, 아버지는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부계의 할아버지도 역시 군인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운 적도 있어, 아마튜어 피아니스트로서도 다소 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교양이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이후 사회적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점차로 농토를 잃게 됐고, 1882년 19세 때에 양친이 서로 별거하게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페테르부르크에 옮겨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의 유아과정에 입학, 피아노공부를 계속했다. 85년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A. Siloti)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 니콜라이 즈베레프(N.S. Zverev)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실로티 역시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는 리스트에게 사사하여 90년부터 모교의 교수가 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외에도 화성학과 작곡법을 아렌스키(Arensky)에게 ,대위법을 타니예프(Taneyev)에게 배웠고, 뒤에 실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다. 재학시절부터 그는 작곡을 시작하여, 9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작곡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실로티에게 바친 곡으로서, 모스크바의 구트헤일 출판사에서 op.1(작품번호 1번)으로써 출판되었다.
91년에는 피아노경연에서 제1위로 입상, 이듬해 졸업작품으로 단시일에 쓴 오페라<알레코>로써 금메달상을 획득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으로 93년에 볼쇼이극장에서 첫공연을 가졌다. 92년에는 피아노곡집 <홪상적 소품집>도 작곡되었다. 그 곡집의 제2곡인 전주곡(C#단조)은 그의 피아노곡으로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93년 존경하던 치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맞게되자, 그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피아노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d단조)을 작곡했다.
이해 모스크바의 마린스키여자전문학교의 피아노과 교사가 되는 한편, 러시아명지를 순회연주하여 명성을 떨쳤다. 95년에는 교향곡 제1번(d단조)을 작곡, 이곡은 97년에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첫공연을 가진 바 있으나 아주 평이 나빴다. 이에 의기소침한 나머지 그는 한동안 다른 길을 택하여 오페라의 지휘를 맡기도 했으나 , 이것 역시 오래 계속되지는않았다.
98년 런던 필하모니협회의 초빙을 받아 영국에 건너갔고, 피아니스트/지회자로서 자작을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귀국하게되자 제 1교향곡의 실패에서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않아서 새로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도록 청탁을 받으면서도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모스크바의 정신병과의 명의 사다르박사의 치료로써 신경쇠약은 완치되고, 1901년에 피아노협주곡 제2번(c단조)을 완성 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었고, 계속해서 첼로 소나타(1901), 13의 프렐류드(1903~4)등의 걸작을 낳게됐다. 05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의 지휘자를 맞게되고, 이무렵에 오페라 <인색한 기사>와 <프란체스카다 리미니>를 작곡, 동극장에서 초연되었다.
07년부터 09년까지는 드레스덴에 살면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 교향곡 제2번(e단조)과 피아노 소타타 제1번(d단조), 교향시 <죽음의 섬>을 썼다. 제2교향곡은 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같은해 초연된 스크랴빈의 교향곡 제4번<법열의 시>를 능가하여 클린카상 제1위에 입선된 걸작이다. 09년 미국을 순회연주하고, 보스턴교향악단을 지휘한 이외에도 여러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한편, 피아노협주곡 제3번(d단조)을 작곡했다. 10년에 귀국하여 17년까지는 주로 피아니스트,지휘자로 활약하고, 피아노곡및 가곡 작곡에 손을 대었다.
이무렵의 작품인<성 크리소느토무스의 전예악>은 옛러시아의 즈나메니 성가를 인용한 것인데, 20세기의 러시아정교의 전례음악으로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한 그에게 또다시 크나큰 시련이 들이닥쳤다. 러시아혁명은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위엎었다. 귀족출신인 그는 공산정권이 싫은 나머지 1917년 말에 파리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주하며, 해마나 여름에는 스위스에서 정양을, 가을에는 유럽의 곳곳을 순회연주하는 식의 생활을 되풀이했다.
26년부터는 오랫만에 작곡을 위한 붓을 들어 피아노협주곡 제4번(g단조)을 완성했고, 그뒤 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36년에는 <교향곡 제3번>(a단조), 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으나, 그 가운데서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에게 알려져있다. 이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크랴빈이나 바실렌코등이 인상주의 이후의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받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넌,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고, 특히 자기작품의 연주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출처 : 세광출판사 <음악대사전>
1899년의 라흐마니노프, 모스크바 글린카 박물관 소장.
벽에 차이코프스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때 받은 금메달 증명서,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푸가와 피아노 작곡과정의 수료증과 아울러 '금메달'상을 받았는데, 그에 앞선 수상자로는 타네예프와 코레첸코가 있었다. 스크랴빈은 아푸런 상도 받지못하고 음악원을 졸업했다.
유럽으로의 연주여행 길에 오른 라흐마니노프, 1931년
Krystian Zimerman
1956년 폴란드 차브르체(Zabrze) 출생.
1956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크리스티안 침머만은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 7살 때에는 야진스키(Andrzej Jasinski) 교수에게 정식으로 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카토비체 (Katowice) 음악원에서 공부하여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197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19살의 나이로 1위를 차지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침머만은 도이치크라모폰과 녹음 계약을 맺고 서유럽과 미국, 일본 란틴아메리카를 무대로 활약하면서 그의 피아노를 직접 동반하며 전세계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가 그의 피아노를 동반하게 된 것은 그가 음악을 배웠던 카토비체에서 얻은 피아노 건축 기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과 함부르크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사와의 영구적인 협력관계에 의한 것 때문이다.
현재 그는 부인과 두자녀와 함께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연주와 실내악 활동, 그리고 학생 지도에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24년이 넘도록 계약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레이블을 통하여 그간 30여장의 음반을 출시하였고 세계적 권위의 음반상을 다수 수상하였다.
197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이후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20세기 피아노 연주의 진정한 귀족으로 자리잡 는다. 원래 쇼팽 음악을 중시하였지만, 그는 완벽한 기교로 전 영역의 피아노 레퍼토리를 섭렵할 수 있는 진정한 비르 투오조로서의 자신을 세워가고 있다.
크리스티안 짐머만 은 진정으로 오늘날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 이다. 197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의 우승으로 그는 국제 적인 화려한 경력을 쌓아간다.
"저는 아마도 경쟁하려고 하지 않은 유일한 경쟁자일 것입니다. 저는 조그마한 행 복을 나눠주길 원했고 사람들에게 기억될 무엇인가를 남기려 했습니다. 제 자신을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경 쟁으로부터 떼어 놓은 것이 아마도 우승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짐머만은 곧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1976년에는 파리에서 아르투르 루 빈스타인(Artur Rubinstein)을 만났다.
루빈스타인이 브 람스의 두 개의 초기 소나타에 대한 해석을 듣고 난 후, 짐머만이야말로 진정한 브람스 스페셜리스트라고 결론 지었다. 이러한 판에 박힌 스페셜리스트라는 말들은 짐 머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극장주가 뭐라 하건 혼자서 바흐에서 스지마노프스키(Szymanowski)에 이르는 그의 레퍼토리를 결정했다. "제가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 주곡 제1번'을 원하는 극장주를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극장주들과 접촉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짐머만은 피아노 해석과 계획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야말로 제 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입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자신의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행한다. 그는 레코딩에도 똑같이 신중 하다. 짐머만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리스트의 B 단조 소 나타를 녹음하기 위해서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짐머만 은 자신의 연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제가 연주할 때 저의 자아(ego)는 둘로 분열되는데, 하나는 항상 해 석의 관점에 있는 'thinker'이고, 다른 하나는 피아노의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worker'입니다." 짐머만은 한 해에 많아야 50회의 연주회를 가지며, 이 마저도 실내악단과 master classes를 합친 것이다.
비평가들은 1991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Salzburg Festival)에서의 24개 드뷔시 프렐류드와 같이 짐머만의 한 모습 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는 데 동의한다. "짐머만은 극적인 이야기 형식과 함께 순수한 아름다움을 결합시킨다. 그리고 드뷔시의 지적으로 세련된 음조를 마음의 언어를 감춤으로써 보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프렐류드를 단순히 설명적인 음악 으로 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크리스티안 짐머만만큼 정신, 감성, 청명, 섬세, 분노의 드뷔시의 세계를 시적으 로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짐머만의 다른 녹음들과 마찬 가지로 프렐류드 녹음은 많은 상들을 받았고 지금은 아 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의 전설적인 녹음과 비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