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ster Teil I. Trauermarsch. In gemessenem Schritt. Streng. Wie ein Kondukt (00:00) II. Strürmisch bewegt. Mit größter Vehemenz (14:14) Zweiter Teil III. Scherzo. Kräftig, nicht zu schnell (29:44) Driter Teil IV. Adagietto. Sehr langsam (49:06) V. Rondo-Finale. Allegro - Allegro giocoso. Frisch (1:00:21)
Leonard Bernstein, cond.
Wiener Philharmoniker
Royal Albert Hall, London
September 10, 1987
0:00 - Opening 1부 I. 0:55 - Traeurmarsch. In gemessenem Schritt. Streng. Wie ein Kondukt II. 13:36 - Stürmisch bewegt. Mit grösster Vehemenz 2부 III. 28:20 - Scherzo. Kräftig, Nicht zu schnell. 3부 IV. 45:17 - Adagietto. Sehr langsam. V. 53:49 - Rondo-Finale. Allegro-Allegro giocoso. Frisch. 1:10:10 - Credits
Claudio Abbado, cond.
Lucerne Festival Orchestra, 2004
Paavo Järvi, cond.
Frankfurt Radio SO(Symphony Orchestra)
Korean Art Centre, Seoul
2012.01.11
Myung-Whun Chung, cond.
London Symphony Orchestra
Muza Kawasaki Symphony Hall
Mar 7, 2006
교향곡 5번은 1901년에서 1902년에 대부분 말러의 Maiernigg 여름 별장에서 작곡 되었다. 5악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으로는 서막의 장례식 트럼펫 솔로와 가장 널리 알려진 아다지오토이다. 장장 1시간 이상에 걸쳐서 연주되는 감성적인 작품이다.
1. 작곡 과정
말러의 교향곡 5번에 이르게 돼서는 이전의 4개의 교향곡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교향곡 1번 "거인"과 "뿔피리 3부작"에 해당하는 2,3,4번 교향곡들은 물론 말러 자신이 표제들을 개작이나 출판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삭제하긴 했지만, 당초에는 표제가 있었다는 점에서 교향시적인 면모가 존재했다. 또한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서 많은 소재들을 가져왔고, "뿔피리 3부작"은 모두 성악이 가세했다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20세기로 넘어온 1901년에 이르러서 말러는 이제 더이상 가곡에서 소재를 가져오지도 않았고 교향곡에 성악을 쓰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하는 표제성이 없는 순수기악곡으로서의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말러음악의 발전 단계로 볼 때, 1901년은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말러의 개인적으로도 터닝 포인트였는데, 바로 부인이 되는 알마 쉰들러를 만난 때가 이때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1901년은 꽤나 성과도 있던 때였다. 말러는 1901년 여름 휴가철에 5번 교향곡의 세 악장과 8곡의 가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러 자신도 이 해의 성과에 흡족했던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처음 구상 단계에서는, 5번 교향곡은 비슷한 분위기의 4악장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마 쉰들러를 만나면서 (이것은 멩겔베르크의 주장) 연애 편지의 구조를 가진 그 유명한 아다지에토 악장이 만들어졌다. 마지막 악장인 론도-피날레 악장이 아다지에토와 주제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것을 고려하면 마지막 악장은 이듬해인 1902년에 작곡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1902년 6월, 말러는 크레펠트에서 교향곡 3번을 연주한 후 마이에르니히의 별장으로 돌아와 교향곡 5번의 나머지를 작곡하는데 열중했다. 이때는 결혼한 아내 알마 말러도 같이 있었는데 말러가 작곡한 악보를 옮겨 적는 일을 도왔다. 결국 1902년 가을에 전곡을 완성해 알마 앞에서 피아노로 연주하게 된다.
사실 이전 교향곡에 비해 작곡 과정은 순탄한 편이었지만, 엉뚱하게도 말러의 전통은 5번 교향곡에서는 개정과 출판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1903년에 5번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완료가 되었지만 말러는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이듬해인 1904년 봄에 가진 빈 필하모닉의 시범연주에서 같이 감상한 알마는 '타악기를 위한 교향곡'같다고 평했고 말러 자신도 그렇게 느꼈던지 타악기 파트를 대폭 축소했다.
사실 말러 자신부터 이 곡에 쉽게 만족을 할 수가 없었던 것 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4개의 교향곡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곡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현악법을 적용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상 말러는 죽을 때까지 5번 교향곡의 개정에 매달렸다. 크게 개정한 것만으로 따지면 세 가지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지만, 자잘한 수정은 무수히 많다. 말러는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잔뜩 악보를 수정해서 단원들에게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럴 지경이니 말러 자신도 이 곡을 몇 번이나 수정했는지, 몇 가지의 버전이 존재하는지 모를 것이다. 마지막 수정은 1910년, 말러가 병으로 쓰러지기 전에 행해졌고 이게 말러 생전의 마지막 음악작업이었다.
2. 출판
말러로선 수도 없는 개정을 거치며 나아지는 오케스트레이션에 매우 뿌듯했겠지만, 그걸 출판해야 하는 출판업자의 입장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이야 컴퓨터 입력으로 인쇄가 쉽게 가능하다지만 그 당시는 금속판형을 만들어 찍어내는 방식이었으니 계속 바뀌는 악보대로 금속판형을 만들어내는 것도 고역이었을게 분명하다. 그만큼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은 말 안해도 뻔한 일이었을 것이고. 결국 계속되는 수정에 짜증날대로 짜증이 났던 이 문제의 주인공, C.F. 페터스 출판사의 소유자였던 헨리 힌리센은 계속 수정되는대로 금속판형을 만드는데 너무 많은 돈을 썼다고 생각해 1913년에 게오르크 괼러가 연주를 희망했을 때도 최종판을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짜증나게 만든 말러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쇄판까지 없애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이 폭탄선언에 충격을 받은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던 당시 젊은 작곡가였던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를 막기 위해 서둘러 말러 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강연을 준비했다. 이런 쉔베르크의 열성 덕에 말러의 자필 교정본을 넘겨받아 수작업으로 교정한 후 최종본을 완성했고, 1914년 1월 9일에 괼러의 지휘로 이 최종본이 연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종판 악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 버전의 포켓 스코어를 인쇄했던 힌리센에게, 말러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멩겔베르크가 최종판 악보의 포켓 스코어를 인쇄해야 한다고 힌리센을 들볶았기 때문이다. 멩겔베르트가 들볶았던 사연인즉,1920년에 자신이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러 페스티벌을 기획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멩겔베르크의 독촉에 못이긴 힌리센은 새 포켓 스코어를 인쇄했지만 실은 이것도 말러가 1904년의 오리지널 포켓 스코어에 자필로 교정한걸 인쇄한 것이었다.
결국 말러의 최종판은 어윈 라츠에 의해 1964년 IGMG-패터스 에디션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으나, 이 에디션도 결정적으로 말러의 최종 교정을 모두 다루지는 못했다. 이 긴 역사를 지나 최종 교정원고는 이미 어딘가에서 분실되어진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대부분의 연주는 1964년 판이며, IGMG-패터스에서는 이 악보를 좀 더 다듬어서 1989년에 두 번째 판을 내놓았다.
3. 초연
이 곡의 초연은 1904년 10월 18일, 쾰른에서 말러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말러의 3번 교향곡의 연주회가 상당한 호평을 받은 후 귀르체니히 콘서트의 지휘자인 프리츠 슈타인바흐는 5월의 쾰른 축제 기간에 이 곡을 공연하고 싶어했지만 알마 말러가 참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말러는 연주회를 10월로 연기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0월 공연에도 알마 말러는 오지 못했다. 연주회의 객석으로부터 야유와 갈채가 함께 터져 나왔지만, 대체적으로 아다지에토와 론도-피날레는 호평을 받았다. 다음 날 신문들에서는 당연히 별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브루노 발터도 이 연주회에 참석했는데, 그는 생애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말러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제는 오케스트레이션 때문이었는데 그는 말러의 관현악이 다성음악을 표현하기에는 불투명하다고 생각했고, 말러 자신의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1년 후 빈 초연은 상당한 호평을 받았지만 안티-말러리안으로 유명한 로베르트 히르슈펠트는 빈 청중까지 싸잡아서 '자연의 기형(奇形)'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사고(思考)의 기형'을 듣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제 1 부
1악장: 장송 행진곡 <신중한 속도로, 엄격하게, 장례행렬처럼>
Trauermarsch. In Gemessenem Schritt. Streng. Wie ein Kondukt
1악장은 특이하게도 장송 행진곡(Trauermarsch, Funeral March)이 10분 넘게 펼쳐지는 ‘해괴한’ 악장이다. 게다가 군대의 행진 나팔처럼 들려오는 도입부의 트럼펫 팡파르. 그것은 오늘날 매우 감각적인 록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빈 사람들이 듣기엔 진부하다고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나팔 소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러는 별다른 음악적 가공 없이 ‘날것’ 그대로의 나팔소리를 교향곡의 입구에 깃발처럼 내걸었다. 게다가 이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가요 풍의 선율은 또 어떤가? 마치 ‘저잣거리의 엘레지’와도 같은 그 선율은 군대의 행진 나팔과 어울리면서 혼돈과 광란, 때로는 절규의 장면들을 펼쳐놓는다. 말러는 그렇게 통속을 끌어들이면서 당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익숙했던 ‘음악다움’과의 결별을 시도했거니와, 아울러 화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려가는 세상의 단면들을 복잡하게 뒤엉킨 리듬과 선율로 묘사했다. 그리하여 훗날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 첫 번째 악장에서 어떤 파탄을 예감하는 “불길한 꿈”을 읽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