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먹거리 자료

대폿집연가

박연서원 2016. 3. 4. 15:15

대폿집기행] 혜화동 할머니집

                막걸리잔에 넘치는 할머니의 정에 취했구나

매캐한 연탄불과 자욱한 담배 연기, 귀청 때리는 고성방가에도 막걸리 한 잔 있으면 즐거웠다. 서로가 인간임을 알았기에 낯선 사람과도 함께 어울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대폿집―. 서민들이 살면서 견뎌야 하는 애환을 풀어놓는 곳, 때론 삶의 흥분으로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던 곳이었다.

이제 우리 삶에서 끈끈함, 훈훈함이 또 하나 스러지려 한다. 남과의 괜한 접촉을 꺼리는 이 시대에 대폿집의 퇴장은 필연적일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 전국에는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대폿집 명소들이 지방마다 몇 개는 남아있다. 더 늦기 전에, 바람 스산한 계절이면 더욱 그리워지는 전국의 명대폿집으로 화가 사석원씨가 안내한다. /편집자

 

이미 난 취했다. 낯선 곳에 와서 낯선 사람들과 이렇듯 정답게 술을 마셔 본 기억이 아득하다. 담벼락 화장실에서 몸 안의 막걸리와 근심들을 미련없이 버린다. 가을 밤바람에 흔들리는 담장 너머의 가로수 이파리처럼 내 몸도 흔들거린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인정 가득한 따뜻한 대포로 훈훈히 내 몸을 녹인다.

초저녁, 어둠이 어슴푸레 거리로 몰려들 무렵, 혜화동 길 모퉁이의 선술집 앞에서 난 망설였다. ‘할머니집’이라는 이름의 대폿집은 너무도 초라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문을 여니 서너 평쯤 될까. 그 곳에 외할머니처럼 푸근한 ‘보령댁’이 있었다. 올해 일흔넷. 수줍은 미소로 옛 얘기를 들려주는 모습이나, 대폿잔 가득 막걸리 부어주는 거친 손이 어릴 적 탈이 난 배를 쓸어주던 외할머니의 손과 너무나 닮았다.

차림표 하나 없이 연극 포스터 몇 장만 붙어 있는 가게 한 켠엔 1970~80년대 제 몫을 단단히 한 서 말짜리 술 항아리가 아랫도리만 땅에 박은 채 무심히 손님들을 바라본다.

대폿집 문을 연지 33년. ‘보령댁’은 오늘도 어김없이 함께 늙어가는 아들을 어루만지듯 편안하게 손님들과 마주한다. 그래서인지 이집엔 혼자 오는 손님이 많다. 오늘만 해도 연극 배우, 영화 제작자, 출판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들이 차례로 들어선 뒤 한 편의 연극처럼 서로 아는 체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할머니에게 안겨서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정치판 이야기는 잠깐이다. 누군가 ‘고구려사를 영화로 옮기는데 한·중 합작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야기를 꺼내자 화제는 광개토대왕으로, 역사인식 논쟁으로 옮겨간다. 불길이 달아오르면 할머니는 중간중간 ‘똑똑한 체들 말라’며 슬며시 진화에 나선다.

 

오후 4시면 인근 신학대 학생들이 모여들고 5~6시에는 힘겨운 육체 노동을 마친 ‘노가다’ 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극인들이 리허설이나 공연 직후의 흥분을 안고 찾아온다. ‘할머니집’은 황금찬, 조병화 시인, 원로배우 황정순, 연출가 기국서씨뿐 아니라 결국 이름을 날리지 못한 채 사라져간 숱한 예술인들의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체5000’,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외상 액수가 기록돼 있다. 단골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할머니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적었다.

“동숭동에 서울대가 있던 시절에는 막걸리 독이 서너 번 동이 날 정도로 인기였지. 냉장고 귀하던 시절인데, 우리 집 바로 옆에는 개천이 흘러 막걸리가 유난히 시원했거든….”

한때는 박정희 대통령도 찾아와 한 대접 막걸리를 다 마시고 손수 항아리에서 두어 잔을 더 퍼서 들었다고 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직접 술 독에서 막걸리를 퍼 드시고 있대.” 안주도 당시는 달랑 깍두기가 전부였다. “막걸리 한 잔에 10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대통령은 석 잔을 맛있게 들이켜고는 탁자에 300원 놓고 일어섰지….”

 

추억과 그리움에 끌려 몰려든 술꾼들은 오늘도 거나하게 취한다. 자연스레 젓가락 장단을 타고 노래가 시작된다. 모두의 간곡한 청이 있자 못 이기는 척 보령댁 할머니가 노래를 시작한다.

“님이라 부르리까/당신이라 부르리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찾고 사는/ 마음이 그리워해 애달픈 마음/ 그 모든 잘못이라도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어야만 됩니까 웃어야만 됩니까”(이미자의 노래라고 하신다)

좌중이 경탄한다. 할머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숨이 차다고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조용필의 ‘허공’을 앙코르로 청하자 반쯤은 창피한 듯 반쯤은 흡족한 듯 먼저 막걸리 부터 주욱 들이켠다. 그런데 잠시 후 이어진 노래는 다시 “임이라 부르니까 당신이라 부르니까….” 아까 부른 노래다.

보령의 갑부집 막내딸로 태어나 어찌어찌 해서 이런 저런 풍상을 겪고 6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워온 고단한 삶도 계절 중의 끝으로 가는 언저리에 있는 이 가을날처럼 소멸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막걸리 여섯 병이 척척 넘어간다. 보령댁이 만들어준 안주는 삶은 돼지고기, 계란말이, 두부, 오징어 데침, 라면 등. 육젓과 생마늘에 찍어먹는 삶은 돼지고기에는 껍데기가 붙어 있고 라면은 찌그러진 냄비에 담겨나온다. 이 모든 안주와 막걸리를 합해 2만7000원.

할머니에게, 그리고 같이 마신 이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바람이 차다. 몽양 여운형이 피살된 곳이라는 로터리의 우체국 쪽으로 털털 걸어간다. 보령댁 대신 내가 입안에서 ‘허공’을 읊조린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스쳐버린 그날들 잊어버려야 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힌 그날들”

(화가 사석원)

 

◇대폿집 소사

큰 잔, 또는 큰 잔으로 마시는 술을 가리켜 대포(大匏·큰 바가지라는 뜻)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릇이 귀했던 시절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왕’자를 하나 더 갖다 붙여 ‘왕대포’라고도 했다. 과거에는 시골의 주막 외에 일반 대중이 주로 이용하는 술집을 목로집, 혹은 선술집이라 했다. 이때 ‘목로’란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말한다.

광복 후 포장마차가 등장했고 비슷한 시기에 대폿집이란 말도 생겨났다. 주로 미닫이 문에다가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라 큼직하게 써놓았고 안에서는 커다란 드럼통에 연탄불을 피워 소금구이도 하고 안줏거리를 끓이기도 했다. 술은 단연 막걸리였다. 잔술에다 주로 김치 쪼가리를 곁들이는 식이었다.

1960~7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난과 고달픈 일상에 시달렸을 대중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던 대폿집은 보다 세련된 형태의 학사주점과 카페, 호프집에 밀려 이제 몇 군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입력 : 2003.10.30 17:19 27'

 

전국의 대폿집을 책으로 엮은 사석원씨의 ‘대포 사랑’

[주간조선 2005-06-01 09:05]

“추억과 情, 어울림을 위해 건배!”
사라져가는 전통 대폿집 15곳 담아…"사라져가는 낭만과 추억, 문학과 정 되살리고 싶어"

 

광화문 바닥은 대충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귀한 것은 가까이 있어도 못보는 법이라더니…. 서울, 그것도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피맛골 골목을 꺾고 돌아 찾은 곳은 사라져가는 낭만, 대폿집이었다. ‘소문난 집’이란 상호보다 ‘삼경원(三驚苑)’이란 목간판이 더 눈에 띈다. 삐걱이는 문을 밀자 3평도 안될 것 같은 실내가 나타났다. 더께더께 쌓여있는 시집이며 동인지, 벽에 쓰인 한시(漢詩)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희끄무레한 형광등 불빛 틈으로 퀴퀴한 먼지 냄새가 쌔큰하다. 이 집이 겪은 풍상이었다.

“좁은 공간에 놀라고, 손님 면면에 놀라고, 1939년생 집주인의 미모에 놀란다, 해서 삼경원이랍니다.” 자칭 ‘한량’ 사석원(46)씨가 설명을 붙였다. 한국화가인 사씨는 아직 남아있는 몇 안되는 대폿집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각지의 대폿집 15곳을 돌며 느낀 취정을 ‘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란 책으로 펴냈다. 2003년 12월 조선일보에 ‘대폿집 기행’이란 시리즈를 연재해 필명을 날린 바 있는 그는, 이번에도 시리즈 집필 때처럼 직접 그린 구수한 그림을 얼기설기 곁들여 추억을 되살렸다.

막걸리 한 사발을 수북이 따르며 그가 말했다. “이 집은 문인과 언론인, 예술인의 아지트입니다. 100세 가까운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오인문, 안장환, 홍성유, 김병총, 정공채, 허유, 정두수, 구인환, 이상준, 이영걸, 봉두완, 그리고 얼마 전 돌아가신 천상병 선생까지, 종로바닥의 인물은 죄다 이곳에서 막걸리잔을 들었어요. 그분들은 이곳을 ‘그랜드 플라자’라고 부릅니다.”

3평도 안되는 곳인데 ‘그랜드 플라자’라니…. 문인들의 배포가 담긴 표현이리라. 하기야 술자리의 매력은 과장과 역설일는지 모른다. 그런 맛이 없다면 무슨 맛에 잔을 잡고 새벽까지 늘어붙어 있으랴. “대폿집의 매력은 뭐랄까…, 어울림? 뭐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대폿집에선 서로 경계하질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어우러지고, 누가 ‘소리’라도 한번 하면 절로 어깨동무가 이어지고 그러는 거죠. 좋았던 것에 대한 기억, 아련한 추억,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 때문에 대폿집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씨의 얘기가 계속됐다. “혜화동 ‘할머니집’이 기억에 남습니다. 황금찬, 조병화, 기국서, 황정순씨 등이 자주 찾았다는 집입니다. 그 때 저는 혼자 있었는데, 낯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막걸리잔을 건네는 거예요. 이미 여러 명의 입술을 거친 잔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 냄새가 그득하더라고요. 사실은 침 냄새였겠지만요. 잔을 권한 사람은 ‘비파(非派)’라는 극단의 연출가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각각 따로 왔다가 합석을 한 것이었어요. 그곳 손님들, 그렇게 술 마시다가 다른 손님 집에 가서 자기도 하고, 서로 계를 만들어 여행도 떠나고 그러는 거 있죠? 다 단골들이라 그렇긴 하겠지만 그런 게 대폿집의 매력 같아요.”

 

대폿집=목로주점=선술집

 

“자, 또 한번 반갑습니다.” 처음 만나 서로를 소개하며 나눈 “반갑습니다”란 인사가 “또 한번 반갑습니다”로 발전했다. 탁주 잔이 다시 부딪쳤다.

“대포는 큰 잔을 뜻하는 말입니다. 6·25 직후 유행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무로 된 좌판 비슷한 것 위에 잔을 주욱 늘어놓고 팔아 ‘목로주점’, 간단히 한 잔 한다 해서 ‘선술집’이라고도 불렀답니다. 다 같은 말이었죠.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대폿집은 경제가 발전하고 학사주점이 들어서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한량이라 부릅니까?” 사씨에게 물었다. “그거요? 순천에서 배운 겁니다. 남원골이란 대폿집엘 갔는데. 싱건지(물김치) 무청을 손으로 쩍쩍 찢어 안주로 내는 맛깔진 집이었어요. 남도 사람을 꾹 눌러짜면 타령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국악을 했다는 주인의 ‘사랑가’가 일품인 집이었어요. 이곳 손님들은 서로를 ‘김 한량, 이 한량’ 이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량이란 ‘멋을 알고 풍류를 아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라나요? 그때부터 저도 ‘자칭 한량’이 되기로 했습니다. 허허.”

“크~.” 막걸리가 넘어간 목구멍으로 감탄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몰랐네, 오늘 하나 배웠네. 자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한 잔.” 웃음 섞인 소리로 잔을 권했다. 사씨의 책을 낸 출판사(푸른숲) 편집진이 함께 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둔탁한 플라스틱 뚝배기잔이 허공에서 다시 부딪쳤다. ‘어울림’이었다.

“대폿집은 서울과 영·호남에 집중돼 있습니다. 충청·강원도엔 이상하리 만큼 남아있질 않아요. 책을 쓰면서 될 수 있으면 어느 한 지역에 편중되지 않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서울·호남의 대폿집이 압도적으로 많이 실렸을 겁니다. 그런데 대폿집을 다녀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저기 벽을 한번 보세요.”

사씨가 가리키는 대로 한쪽 벽을 쳐다봤다. 갱지를 바른 듯한 낡은 벽엔 차림판이 붙어있었다. 안주는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5000원이었다. “이 집이 유일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 차림판이 없어요. 무슨 안주가 되냐 안되냐, 값은 얼마냐 이런 얘기가 아예 나오질 않아요. 아는 사람은 알아서 먹고, 모르는 사람은 주는 대로 먹고 그러는 거예요. 허허.”

대포 얘기를 안주삼아 마신 대포에 얼굴이 벌개졌다. 개인사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술 심부름을 많이 다녔어요. 그러다가 술맛을 보게 됐어요. 초음(初飮)의 추억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선 그냥 그 길을 걸은 거죠. 허허. 제대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예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농촌 봉사활동도 하고 했던 서클에 가입했는데, 그때 선배들이 참 많이도 권했어요. 대학입시 체력장에서 오래달리기 할 때도 ‘힘내라’면서 고량주를 줄 정도였으니까요. 당연히 마셨죠. 맥주잔으로 한 컵이요. 그 덕에 꼴찌로 들어오긴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씨는 동국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어렸을 적 소망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아버님이 저를 술집으로 데려가셨어요. ‘이젠 너도 술을 알아야 한다’ 하시면서 소위 ‘주도수련(酒道修鍊)’을 시키셨죠. 그런데 저는 그 전부터 술을 했잖아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날 아버님이 더 빨리 더 많이 취하셨어요.”

누구나 그렇듯 사씨에게도 어렸을 적 추억은 소중하다. 그에게 추억의 장소는 서울 광장시장이었다.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셨어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게 제겐 큰 즐거움이었거든요. 광장시장은 원래 일본의 경제침탈을 막기 위해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시장’이랍니다. 을사조약 이후 생겼다니 역사가 100년쯤 된 셈이죠. 전차가 다니면서 활황을 누렸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 대포촌이에요.폭 10미터 골목에 600개 가량의 좌판이 가득한 곳입니다. 옷감을 사고서 엄마와 함께 순대를 먹던 곳이 바로 거기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대포촌에 갈 때는 늘 가슴이 두근거려요. 쉰셋의 나이로 갑자기 떠나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거죠. ‘엄마, 시장가는 내가 보여요? 아마 보고 있겠지.’ 속으로 ‘엄마’를 부르며 가는 거죠. 우리 엄마 좋아하시던 죽집도 그대로 있고, 인심처럼 푸짐한 안주도 그대로예요. 얼마 있다가 청계천이 복원되면 광장시장 대포촌에도 변화가 있을 겁니다. 열차처럼 하얀 김을 내뿜는 수백 개의 좌판 역시 또다른 추억이 되겠지요. 그렇게 아스라한 기억들, 그 끄트머리라도 붙잡아 보고 싶은 마음에 대폿집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한잔.” 또 다시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어울림이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소문난 집                      

                                                  유 회 숙

  무성한 소문 보글보글 익어가는 소리 풍문으로 자란다고 한다. 가지치고 잎 달고 농익은 소리 소문 왁자한 골목 어둠이 질펀하다고도 했다. 허름한 탁자 사이에 두고 엉덩일 비집고 앉아 마시는 술맛, 한눈에 반기는 시선들, 자리 내어주는 청진동 그 집엔 유난히 모서리가 많다고도 했다. 구석구석 자리한 인정 생생한 은유가 되어 순식간에 기둥을 타고 천장에 매달려 떨어지는 법 없다 한다. 흥에 겨워 정에 겨워 술마저 돌면 덩달아 함께 도는 바람벽엔 어리하게 취한 바퀴벌레 눈치 없이 커진 귀를 더듬이로 감싸 안고, 소문난 집 사람들 술기운에 혀가 말려도 정신만은 점점 또렷해지는 고질병 자리 뜰 줄 모른다는데, 가본 사람 아니면 아는 체 말라니 내 기어이 못 들은 척 가보리라. 하나 둘 떠도는 구구한 소문 이냥저냥 퍼지는 웃음 조금이라도 거드는 게 소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