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림스키코르사코프 / 술탄 황제의 이야기 모음곡

박연서원 2014. 7. 4. 23:38

The Tale of Tsar Saltan, Suite for Orchestra, Op.57

림스키코르사코프 / 술탄 황제의 이야기 모음곡

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

 


1: The Tsar's departure and farewell
L'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 Ernest Ansermet, Cond

 


2: The Tsarina and her son afloat in the cask
L'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 Ernest Ansermet, Cond

 


3: The three wonders
L'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 Ernest Ansermet, Cond

 


March from 'Tsar Saltan' Suite, Op.57
London Symphony Orchestra / Andre Previn, Cond

 


The Flight of Bumble Bee from 'The Tale of Tsar Saltan' Suite, Op.57

Maksim Mrvica, Piano

 

술탄 황제 이야기의 줄거리

 

옛날 어느 나라에 술탄이란 황제가 살았다. 이 나라의 제일 가는 부자 상인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술탄 황제는 세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막내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두 언니들은 동생이 왕비가 된 것을 몹시 질투했다. 어느 날 술탄 황제가 전쟁 때문에 궁궐을 비우게 되었다. 그 사이에 두 언니들은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렸다. 전쟁에서 돌아온 황제는 소문만 믿고 화가 나서 왕비와 어린 왕자를 나무통 속에 넣고 바다에 던져버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왕비와 왕자가 들어있던 나무통은 마법에 쌓인 어느 섬에 닿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왕비는 왕자를 건강하게 잘 키웠다. 세월이 흘러 왕비와 왕자는 지난 날의 슬픔을 다 잊고 마법의 섬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와 왕자는 해변을 거닐다가 백조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백조는 땅벌 떼들에게 마구 쏘여 다 죽어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백조를 구해 주었다. 백조는 자신을 구해 준 왕비와 왕자에게 감사하며 그 보답으로 세 가지 선물을 했다. 첫 번째 선물은 다람쥐였다. 이 다람쥐는 금과 초록색 보석으로 만든 열매를 따다 주었다. 두 번째는 서른 세 명의 무사들을 신하로 주었다. 마지막으로 백조는 아름다운 공주로 변해서 왕자의 신부가 된 것이다.

 

'왕벌의 비행'은 오페라 '술탄 황제 이야기' (1899년에 시작되어 1900년에 완성) 중 제2막 1장에서 연주되는 곡이다. 곡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벌이 나는 장면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잘 묘사해 놓았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는 곡이다. 바이올린, 첼로 등의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많이 연주된다.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y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44.3.18~1908.6.21]

 

 

1844년 3월 18일 노브고로트 근처 티흐빈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고 1856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사관이 되었다. 이 무렵 발라키레프와 사귐으로써 ‘5인조(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한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작곡지도도 받았다. 187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초빙되고 또 해군군악대의 지휘자로서 내외의 명곡을 편곡하는 한편 궁정성가대지휘자도 지냈다.

 

1881년 무소르크스키가 사망하여 ‘5인조’가 해산되자, 악보 출판업자인 벨라예프의 도움으로 ‘벨라예프그룹’을 결성, 후진인 글라즈노프, 랴도프 등을 지도하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된 혁명소동 때는,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측에 서서 학원에의 권력개입을 거절한 탓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교수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작품은 연주 금지처분을 당했다. 그후 복직이 되었으나 퇴직하고, 심장병으로 급서할 때까지 자택에서 작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색채적이고 묘사적이며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화성적인 표현에 차 있다. 관현악의 묘사성 등은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교향시, 가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라벨, 레스피기 등 근대 작곡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기상곡》(1887) 《세헤라자데》(1888)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1898) 《설희(雪姬)》(1882) 《금계(金鷄)》(1909) 등의 오페라가 많으며,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합창곡 ·가곡 ·피아노곡 ·관현악곡 등도 많다. 저서에는 《러시아민요 100곡》(1877) 《화성학 실습》(1884), 《관현악법 원리》(1913) 자서전인 《나의 음악 연지(年誌)》(1909) 등이 있다.

대표작으로 오페라 〈눈 아가씨 Snow Maiden〉(1882)·〈사드코 Sadko〉(1898)·〈보이지 않는 거리 키테슈와 성녀 페브로니아의 이야기 The Legend of the Invisible City of Kitezh and the Maiden Fevronia〉(1907)·〈금계(金鷄) Le Coq d'or〉(1909),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 Scheherazade〉(1888), 〈스페인 카프리치오 Capriccio espagnol〉(1887), 〈러시아 부활제 The Russian Easter Festival〉 서곡(1888) 등이 있다.

 

초년과 해군시절

아버지는 자유사상을 가진 정부 관리였고 어머니는 학력이 높았으며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았다. 삼촌이 러시아 해군 장교였고 큰형도 해군 관리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들의 영향이 컸다. 12세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고 그는 이곳에서 해군학교에 들어갔다. 15세 때 테오도레 카닐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카닐레는 직업적인 피아니스트로 그에게 작곡 기초도 가르쳐주었다. 1861년에 밀리 발라키레프를 만났고, 그의 지도 아래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62년 해군학교를 졸업한 뒤 대형 쾌속선 알마즈호를 타고 원양 항해를 하여,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뉴욕 시와 볼티모어, 워싱턴 D. C. 등으로 갔다. 이곳에서 러시아 선원들은 러시아가 당시 북군에 대해 정치적으로 동조했던 덕분으로 환영을 받았다. 계속하여 브라질(이때쯤 그는 중간서열로 승진하게 되었음)·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영국·노르웨이에 정박했고, 1865년 5월 러시아의 크론스타트 항구에 다시 돌아왔다. 젊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항해경험은 바다에 대한 매력을 확신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오페라와 관현악곡들에는 바다나 호수의 풍경이 묘사되었는데, 〈세헤라자데〉·〈사드코〉·〈술탄황제의 이야기 The Tale of Tsar Saltan〉 등은 바다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거리 키테슈와 성녀 페브로니아의 이야기〉는 호수를 표현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항해 전에 작곡을 시작했던 교향곡을 완성했고, 21세 때인 1865년 12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했다. 이 연주는 작곡가로서 그가 앞으로 걷게 될 순조로운 길을 암시하는 듯했으며, 러시아인이 작곡한 본격적인 교향곡으로서는 첫 연주라는 점에서도 기록적이었다. 다음에 작곡한 중요한 작품은 관현악을 위한 〈세르비아 주제에 의한 환상곡 Fantasy on Serbian Themes〉으로, 1867년 5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슬라브 음악 연주회장에서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연주회 후에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이제 러시아도 러시아 태생의 '강력한 소수'(moguchaya kuchka)를 갖게 되었다는 평론을 썼고, 이로써 이 연주회는 역사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강력한 소수'라는 표제는 순식간에 유행어가 되었고, 이후 음악사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로딘, 세자르 큐이,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5인조'라고도 불렸는데 이들의 목적은 서구음악으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러시아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중 가장 학식이 있었고, 또한 가장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은 모든 장르를 포괄했고, 특히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교사·지휘자·편집인 생활

1871년에 이르러 그의 명성은 대단해져서 그는 젊은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게 되었다. 후일 그는 자서전 〈나의 음악생활의 연대기 Chronicle of My Musical Life〉에서 이 중요한 자리를 맡기에는 그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체계적인 음악이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발라키레프로부터 산발적인 교습을 받거나 차이코프스키에게 조언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1873년 그는 음악교육을 완성시키기 위해 대위법과 푸가 작법을 중심으로 야심찬 학습계획을 세워 착수했다. 결국 1875년에 이르러 차이코프스키에게 10곡의 푸가를 보내는 것으로 공부를 일단락했고 그에게서 흠잡을 데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1873년 해군 복역을 마치고 군악대에서 감독 겸 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관현악단 지도자로서는 천재성이 다소 부족했지만, 악기연주 경험이 없는 연주자를 교육시키는 데는 뛰어났다. 1874년 3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3번 교향곡을 초연하면서 처음으로 지휘대에 섰다. 같은 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유음악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1881년까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1883~94년 궁정예배당의 연주지휘자로 일했고, 1886~1900년에는 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교향곡 작품들을 지휘했다.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러시아 작품연주회를 주도했고, 1907년 봄 파리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곡들을 포함한 2개의 역사적 연주회를 지휘했다.

그는 러시아 사업가 벨라예프가 후원한 음악출판사에서 편집인 겸 사장 일을 거의 도맡아 했고,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만을 출판하는 등 러시아 음악을 위해 실로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무소르크스키가 죽은 뒤 무소르크스키의 악보들을 출판하기 위해 편집했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던 무소르크스키 음악의 부자유스러운 선율 및 화성 진행을 대폭 수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호반시치나 Khovanshchina〉는 거의 다시 썼다. 또한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를 편집·개정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개작은 무소르크스키의 위대한 혁신적 작품을 현학적으로 개작했다는 통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원곡에 대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명인다운 솜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개정 전의 무소르크스키의 원 작품은 이후 1928년에 악보로 출판되었고 러시아와 외국에서 여러 차례 공연되었지만, 결국 보다 효과적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곡이 오페라 극장에서 널리 공연되었다. 그는 또한 보로딘의 사후(死後) 작품들을(작곡가 글라주노프와 함께) 편집하기도 했다.

 

업적

음악에 있어서 연습과 규율을 강조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가였다. 일찍이 앞서서 작곡한 자신의 작품들에서 기술적인 결함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개정작업을 했다. 그결과 그의 작품목록에는 초판과 개정판이 함께 표기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장소나 분위기를 관현악으로 묘사하는 기술에 뛰어났다. 〈세르빌리야 Serviliya〉·〈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zart and Salieri〉를 제외한 그의 모든 오페라들은 러시아나 그밖의 슬라브 민담이나 문학·역사에서 소재를 취해왔으며, 그 예로 〈눈 아가씨〉·〈사드코〉·〈황제의 신부 The Tsar's Bride〉·〈술탄 황제의 이야기〉·〈보이지 않는 거리 키테슈와 성녀 페브로니아의 이야기〉·〈금계〉 등을 들 수 있다. 이 오페라들은 러시아에서는 정규적으로 공연되었지만 외국에서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으며, 〈금계〉 정도만 서유럽·미국에서 간혹 공연될 뿐이다.

그의 관현악 작품으로는 〈스페인 카프리치오〉, 교향 모음곡 〈세헤라자데〉, 〈러시아 부활제〉 서곡(1888) 등이 있다. 〈술탄 황제의 이야기〉 중에 포함된 〈땅벌의 비행〉과 〈사드코〉에 포함된 〈인도의 노래〉는 다양하게 편곡되어 사랑받고 있다. 그의 가곡은 단순함과 우아함, 세련된 러시아 가사 등이 뛰어나며, 실내악은 이에 비해 덜 중요하다. 피아노 협주곡 1곡을 쓰기도 했다. 1905년 학생 봉기를 지지한 이유로 잠시 해고된 것을 제외하면 그는 1871년부터 죽을 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과 관현악법 교수로 일하면서 두 세대에 걸친 러시아 작곡가들을 가르쳤고, 따라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도 수년 동안 그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의 저서 〈화성법 실제 Practical Manual of Harmony〉(1884)·〈관현악법의 기초 Fundamentals of Orchestration〉(1913, 사후 출판)는 오늘날까지도 음악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