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h Liebe Dich, Op.5-3
그리그 / 나 그대를 사랑해
Edvard Hagerup Grieg 1843∼1907
Du mein Ge-dan-ke, du mein Sein und Wer-den!
Du Mei-nes Her-zens er-ste Se-lig-keit!
Ich liebe dich sei nichts auf die-ser Er-den,
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in Zeit und E-wig-keit!
Ich lie-be dich in Zeit und E-wig-keit!
Ich den-ke dein, kann stets nur dei-ner den-ken,
nur dei-nem Gluck ist die-ses Herz ge-weiht;
wie Gott auch mag des Le-bens Schicj-sal len-ken,
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ich lie-be dich in Zeit und E-wig-keit!
Ich lie-be dich in Zeit und E-wig-keit!
그대는 나의 생각 나의 생명
내 마음 속의 영원한 기쁨
나오직 그대만을 사랑하리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대를 영원히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네
그대의 행복은 또 나의 것
또나의 운명이 변할지라도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오
사랑하오 그대를 영원히
Richard Tauber, tenor
Ich liebe dich'는 독일어로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뜻으로 본래 안데르센의 동시에 그리그가 곡을 붙여 유명해진 곡이다. 국내에서의 동명의 곡은 그리그의 곡보다 베에토벤의 작품이 더 알려져 있고 그리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국내에서는 주로 합창곡으로 공연되었다. 그리그가 Ich Liebe dich를 작곡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후일 자신의 반려자가된 니나 하그루프를 사랑하게된 그리그는 당시 여류 성악가로 인기를 끌던 니나를 위해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는데 이곡이 바로 'Ich liebe dich'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방법으로 자신의마음을 표현했고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명을 받은 니나 하그루프는 그리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곡은 불행히도 처음엔 국내의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대중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임에도 페르귄트라는 그의 불세출의 명곡의 그늘에 가려져 오히려 빛을 보지 못한 곡이다. 이 곡은 해외에서 공부를 하게된 국내 음악가들이 늘어나며 뒤늦게 공연 음악으로 서서히 알려진다. 서양, 특히 미국과 노르웨이 등지에서는 대표적인 웨딩송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솔베이지의 노래와 함께 그리그의 곡중 가장 인기있는 곡이 되었다.
독창 또는 중창이나 합창으로도 많이 불리는 곡으로 결혼식 음악 전문 사이트에 가보면 축가 목록에 이 곡이 들어있다.
Nina und Edvard Grieg (1888)
그리그와 니나 하게루프
Elisabeth Schwarzkopf, soprano
Geoffrey Parsons, piano
Javier Albarés Alberca, cello
Javier Estebarán Crespo, piano
El Jardín de Belagua
Sumi Jo, soprano
Vincenzo Scalera, piano
In the ceremony of awarding Nobel Peace Prize
to the previous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Daejung Kim, December, 2000.
Nicolai Gedda, tenor
Jan Eyron, piano
The Roger Wagner Chorale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또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 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찌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Richard Tauber (1891~1948)
리처드 타우버는 오스트리아 테너로서 오페라, 오페레타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독일에서 성악을 배웠으며, 1913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로 오페라 무대에 성공적인 데뷔했다. 이후 수년 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오페라 무대에 출연했으며, 갈채를 받았다. 1943년 그는 자신의 작품 '늙은 첼시 Old Chelsea'에 직접 출연했다. 1938년 영국으로 이주후 영국의 명사가 되었으며, 무대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1947년 런던에서 돈 오타비오 역을 끝으로 무대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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