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 4. 10 평남 평원~ 1956. 9. 6 서울.
서양화가.
이중섭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대향(大鄕).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이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山本方子]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대한미협)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왜 담배갑 은박지에 그렸을까?
요절한 천재화가 이중섭.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그의 요절을 가슴 아파하고 그 미술에 대해 두터운 애착을 느끼며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예술과 사랑의 참뜻을 안 사람이자 그것을 실천하여 이루려 몸부림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성취한다는 의식 속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애처로운 사랑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투쟁을 작품으로 남겼다는 데에 이중섭 불굴의 명성과 인기의 비결이 있다.
그의 예술창작에 대한 정열적인 의욕은 그 무렵 사회적 혼란, 극한적인 삶의 어려움, 가족과의 생이별 등으로 끝내 좌절되고 충분히 꽃피우지 못했다.
이중섭은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할 가장 처절한 밑바닥 삶 속에서도 꿋꿋이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비좁은 골방에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 엎드려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마분지,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도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서울 등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래서 수채화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200여 점, 은종이그림 300여점이 이 한국 땅에 남아 현대 미술가, 아니 모든 예술가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중섭만의 그림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중섭’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이중섭의 생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고산 고정일은 이중섭을 ‘예수를 닮고 성자를 닮은 처절한 시대의 예술가’로 칭한다.
저자는 이중섭에 대해 “이중섭은 고독하고 우수에 찬 예술혼, 아내와의 농염한 애정, 아들들과의 행복한 놀이, 티 없이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낭만적인 무릉도원의 세계를 아로새긴 천재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중섭은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전쟁과 분단에 분노한 평화주의자요 사랑에 가득한 민족혼의 화가”라고 말한다.
이어 “악한 세력에 꿋꿋이 맞서는 절절한 민족혼과 애통해하는 시심이나 염원을 이중섭의 모티프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다. 이중섭은 정말 그런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그를 회상한다.
그리고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뒤 주위 사람들은 굳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굳이 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이제 이중섭의 삶을 되짚고 그의 사랑과 천재의 진실을 찾는 일은 그를 기리고 그의 그림을 아끼는 모든 이의 숙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며 이 책을 집필한 의도에 대해 말한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
예술과 인생을 못 다한 作家 李仲燮
출생년도 1916.04.10
출생지 평남 평원
Ⅰ
1980년에 한국문학사에서 출판한 이중섭 서한집(書翰集)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와 1986년 여름호 《계간미술(季刊美術)》의 특집 「이중섭」, 그리고 그의 작품을 통하여 작가 이중섭과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까 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중섭의 요절을 가슴 아프게 아쉬워하고 있음은 무엇보다도 우선 불우하고 짧은 생애 속에서 보여준 그의 예술성 때문이다. 인간 이중섭, 예술가 이중섭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그럴싸한 근거는 그의 서한집의 마지막 편지인 아들 태현(泰賢)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글에 나타나 있다. (삽도 1)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럼 몸성해라.
1956년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화가 이중섭이 먼 이국땅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애처롭게 그리워하며 회합의 실현을 꿈꾸었던 글이다. 작고 1년 전에 씌어진 이 편지의 구절은 비극적인 생애와 파란곡절로 장식된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는 동경 문화학원(文化學院)에 재학 중이던 1939년에 야마모토(山本 方子, 결혼 후 李南德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줌)라는 일본인 여자후배를 만나 열애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홀로 귀국한 후 1945년 그녀를 한국에서 재회하여 결혼하였으며, 남북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서 1952년에 비극적인 이별을 겪었고, 그후 고국으로 돌아간 부인과 두 아들 태현과 태성(泰咸)과의 생이별 속에서 끝내 이중섭은 1956년에 한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남달리 유별나게 정이 많았다는 이중섭이 삶의 시달림 속에서 흩어져 있는 가족의 단란한 모임과 안정된 생활을 얼마나 갈망하였는가를 위의 편지 구절에서 알아볼 수 있다.
안정된 삶의 길을 찾아 가족들이 탄 소달구지를 앞에서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함께 가겠다는 이중섭의 애타는 심정은 전쟁에서 겪었던 추위와 굶주림에서 따뜻한 생활의 보금자리를 가족들에게 찾아 주겠다는 한(恨)이 어린 갈망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중섭에 있어서 따뜻한 남쪽나라는 처음 그의 사랑이 싹튼 일본이었고, 또한 전쟁 중 생존의 안전을 기할 수 있었던 남쪽 지방이었으며, 사랑하는가족을 위한 복음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소달구지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며 느긋한 마음으로 타고 갈 수 있는 편안한 교통수단임을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어린 마음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황소가 여기서 뜻있게 연관되고 있다. 이중섭과 그의 가족과의 비극적인 이별을 이남덕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확실한 일자(日字)는 기억 못합니다만 52년 7월이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부두에 주인과 양명문(楊明文) 선생, 그리고 영진(英進) 도련님이 전송 나왔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이고 한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가엾은 주인을, 의지할 데 없는 그 사람을 혼자 남겨두고 떠난다는 게…….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전쟁터에 외톨이로 남겨둔다는게…….
한국의 그이는 그림을 곁들인 편지를 일주일에 몇 번씩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제게 큰 위안이었지만 또 그만큼 애절한 것이었어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했지요.
Ⅱ
평남(平南)의 부농(富農) 출신으로서, 일찍이 일제 치하에 대망의 꿈을 안고 동경 유학길에 올라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와 문화학원 미술과에서 수학을 마친 이중섭은 오늘의 우리 미술의 초석을 이루어준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미술계의 선구자로 꼽히고 있다.
37년 유학 시절,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태양상(太陽賞)을 수상하여 그때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의 문화면에 기사화되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는 이남덕 여사의 회고담이 이중섭의 뛰어난 예술적인 재능을 짐작하게 해준다.
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는 당시 전위적인 그룹이었고, 그 회원으 로는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이 있었으며, 이중섭은 41년에 회우(會友)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 이미 활발하고도 내용이 있는 예술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중섭이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다분히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며, 또한 형식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있었음은 그의 수학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명문학교로 알려진 제국미술학교에서 일년을 수학하고,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교육 방침으로 유명한 문화학원을 택하여 수학 과정을 마친 사실은 이중섭 자신이 걸어야 할 예술에 대한 과감한 선택과 결단력을 보여준 것으로 믿어진다. 이중섭의 예술가로서의 특이한 기질을 이남덕 여사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엔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 다녔어요. 여기서 1년 배운 다음, 문화학원으로 옮겨왔죠. 문화학원은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이 있었으니까요. 소와 아이들 같은 소재들을 늘 그렸고 재료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캔버스뿐 아니라 화선지도 썼지요. 두꺼운 화선지에 먹을 듬뿍 칠한 다음 그 표면을 끝이 뾰족한 금속성 도구로 긁어내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작가로서 이중섭은 재료에 대한 탐구와 재료를 통한 개방적인 자유스러운 표현을 자신의 예술영역으로 삼아야 했던 것 같다.
그가 생이별한 이국땅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보면,"(……)훌륭한 일(참으로 새로운 표현과 계속해서 대작을 제작하는 것)을 하는 것이 염원이오. (……) 올바르게 완성하지 않아서는 안 될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짊어지고 최장거리 마라톤(달리지 않고)을 끈기있게 충실히 걷고 또 걸어 기어코 완성시키고야 말 작정이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대작은 평소 그가 염원으로 삼고 있던 벽화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짊어지고 기어코 완성시켜야겠다는 그의 예술관 또한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이중섭의 예술적인 포부와 정열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언이 이남덕 여사의 회고담으로 제시된다.
제가 일본으로 돌아온 후 53년인가…… 그이가 일주일간 일본으로 왔을 때 처음 은지화(銀紙畵)들을 저에게 보여 주더군요. 그때 그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에스키스에 불과한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해서 형편이 되면 그때 대작으로 완성시키겠다고 했었죠.그러니까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면 안된다면서 저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중섭은 확실히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어디에 있고, 그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그의 예술 창작에 대한 정열적인 의욕은 그 당시의 사회적 혼란, 극한적인 삶의 어려움, 가족과의 생이별 속에서의 정신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불안 등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끝내 꽃피우지 못한 채 그 여운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쉬워하고, 그의 미술에 대해 상당한 애착과 평가를 주고 있는 것은 그가 올바르게, 충실히 자신의 길을 걷고,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성취한다는 의식 속에서 삶의 어려움과 처자(妻子)에의 애처로운 사랑을 통하여 그 투쟁의 흔적을 작품으로 남기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그의 미술은 모든 통상적인 격식을 멀리한 자유분방한 표현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 점이 바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창작의 자유 개방적인 이러한 성향은 이미 문화학원 시절의 이중섭이 재료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으며 캔버스뿐 아니라 화선지에 먹을 듬뿍 칠하고 그 표면을 끝이 뾰족한 금속성 도구로 긁어내는 작업을 시도했다는 이남덕여사의 회고담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그는 화선지·엽서, 양담뱃갑의 은지(銀紙), 캔버스·합판·종이에 크레파스, 종이에 펜·수채·연필·유채, 편지에 삽화, 합판에 유채, 벽화 등, 다양하고 개방적인 재료를 통하여 자신의 미술세계를 과감히 보여주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이라는 와중에서 피난생활의 어려움과 이산 가족의 상황 등이 정상적인 창작생활을 불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상황이 이중섭의 다양한 재료를 그의 예술에 등장케 한 이유가 됐을 법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현실적인 긴박한 사정에 의한 것이지만, 여기에 앞서 작가 이중섭의 창조적인 개발정신이 다양한 재료에 대한 탐구로 나타나게 한 것으로 믿어진다.
사실, 창조적인 재료탐구는 1900년대 초기에 서구 미술가들에 의하여 이미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오브제 개념(槪念)으로 현대미술을 특징지워 주고 있는 상황을 낳게 하였듯이, 이중섭이 누구보다도 일찍 이 방면에 관심과 실천을 보였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중섭의 예술적인 포부와 창조적 의욕은 그가 남긴 작품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선 1940년의 제 4회 자유미술가협회전 협회상 수상작인<소와 소녀>와 1943년 문화학원 시절의 유화작품인 태양상 수상작 <망월 (望月)>은 이중섭의 활력적인 생의 세계관이 사람과 동물의 원숙한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활기에 넘치는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생의 표상은 풍만한 형태, 생동감이 충만한 자태, 평화스러운 분위기 등을 형성하고 있으며, 완만한 선과 평탄한 면으로 치중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화가는 여기서 사람이나 동물을 직접적인 표현 대상으로 삼고 그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하여 생의 환희, 생의 샘, 생의 활력을 표현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형상적인 작품의 기본성은 선과 면의 활력성인 것이다. 그렇기에 화면의 구성적 성격은 대담하고 강력하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대작내지는 벽화제작에 적합하고 또한 효과있는 모뉴멘탈한 성격을 나타내준다. 후일 이중섭이 부인 이남덕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자신의 미술에 대한 소신이 이에 참고가 될 것이다.
생생하고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고, 행동하는 회화를 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참고 견뎌왔던 것이오.
이 글에서 이중섭이 강조하고 있는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표현은 "한국사람들이 최악의 조건에서 생활해 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중섭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치하에 시달리던 한국민족, 동족살상의 비극을 겪고 있는 민족의 혼을 예술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포부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폴레옹군의 침입 속에서 수난을 겪은 스페인 사람들의 시련을 예술로 승화시킨 고야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 비교는 적절한 것이 못되지만, 이중섭의 포부는 예술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드높은 기상을 가장 새롭고 현대적인 표현방법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예술은 이중섭의 휴머니즘을 표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품 <소와 소녀>·<망월>이 그렇듯이 사랑과 평화, 삶의 의의가 예술적표현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중섭의 세계관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나는 당신들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더없는 대표현(大表現)을 계속하고 있소. (……) 더욱더 시야를 넓혀 유유히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새로운 회화예술을 창작하고 완성해 가겠소. 이제부터는 가난쯤은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생의 한복판을 매진해 갑시다.
이 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이중심의 예술적인 신념은 모든 삶의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사랑의 화합으로 생의 보람과 의의를 찾고, 그 인간성을 예술로 고양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이 가장 적합한 표현 수단이었음이 윗글로써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와 희망을 담고 있는 이중섭의 예술은 그의 극도로 어려운 생활고와 가족과의 생이별로 원만하게 꽃피우지 못하였다. 현실적인 삶의 어려움과 정신적인 불안, 고통이 그 원인이었고, 여기서 그의 안타까운 사랑의 호소와, 가족과의 애처로운 사랑의 결합을 염원하고 상징하는 작품세계가 있게 되며, 또한 그것이 이중섭의 제 2단계의 미술로 남게 된다. 우선, 이 시기에 제작된 많은 작품들의 명제가 작가의 심리적 갈등을 간접적으로 엿보여 준다.
<가족>(도판 1)·<길 떠나는 가족>·<해변의 가족>(도판 6)·<가족과 비둘기>(도판 7)·<석류와 물고기와 가족>(도판 10)·<아버지와 두 아들>(도판 12)·<부부>(도판 13)·<두 어린이와 물고기>(도판 17)·<바닷가의 아이들>(도 판 18)·<파란 게와 어린이>(도판 20)·<큰 게와 아이들>(도판 21)·<봄의 어린이>·<소와 어린이>·<소와 새와 게>(도판 36)·<황소>(도판 25·26·27·29)· <닭과 어린이>(도판 3)·<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도판 38)·<달과 까마귀>(도 판 39)·<호박꽃>(도판 40)·<손과 새 가족>(도판 42)·<사계(四季)>(도판 43· 44)·<복사꽃이 핀 마을>(도판47)·<초가(草家) 있는 풍경>(도판 45) 등은 주로 작가의 가족을 소재로 삼은 것이고 또한 그 가족에 대한 작가의 애타는 그리움과 사랑의 심정을 표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들은 이중섭이 편지의 글로 표현 못한 그의 애정어린 호소이며 그의 인생관을 알려 주고 있다. 이들 작품과 이중섭이 그의 부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걷잡지 못할 작품 제작욕과 표현욕에 불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오. 지금 이웃 풍경과 호박꽃, 꽃봉오리, 큰 일을 제작중이지만,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그대들을 생각하고(……) 태현, 태성, 남덕, 대향(大鄕, 이중섭의 雅號) 네 가족의 생활(……) 융화된 기쁨의 장면을 그린다오. 이제부터는 반드시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림을 그려 함께 보내겠소. 이 편지와 함께 그림도 보낼 테니 셋이서 사이좋게 보아주오. 행복이 어떤 것인지 대향은 분명히 알았소. 그것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남덕이와 사랑의 결정인 태현이, 태성이 둘과 더없는 감격으로 호흡을 크게 높게 제작 표현하면서(……) 화공(畵工) 대향과 현처 남덕이가 하나로 융합된 생생한 생활 그것이오. (……) 남덕, 대향의 참된 결합은 우주의 의지, 사람들의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올바른 그것이요, 별과 같은 무한한 신비요, 태양과 같은 밝은 빛이 아니겠소? 더욱 사랑하고 굳게 하나가 됩시다.
이 가슴을 저이는 애절한 사랑의 아쉬움과 호소, 불안과 고독의 정신적인 압박의 괴로움이 넘쳐 흐르는 글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며, 또한 더욱 강조되고 있다. 부정(父情)과 부정(夫情), 이것은 가족에게 얽힌 부단의 혈육관계인 바 순수하고 순박한 동심과 같은 세계를 갖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중섭의 작품은 동화적인 명제가 특색이고, 내용 또한 우화적이고 맑은 동심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의 작품을 가까이 살펴보면, 어린이·물고기·새·게 등이 고정적인 화면 구성요소들이며, 이것들이 서로 얽혀 결합되고 있다.
따라서 화면은 항상 동적인 양상을 보여주며, 이에 그 구성요소들은 동작과 위치, 자세에서 우스꽝스러운 상태를 보인다. 크로키 형식을 연상케하는 그의 작품에서의 동적인 성격은 회전(回轉)의 생동감과 생의 자유스러운 즐거움과 충만된 환희의 맥박으로 전달된다. 이러한 표현형식은 가족을 재회하고 융합하여, 일체가 된 식구의 기쁨을 갈망하는 작가의 심중을 나타내고, 또한 엉키고 꼬이고 연결된 동세로써 가족의 이산(離散)에 대한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점을 좀 더 가까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찾게 된다.
즉, 풀기 어렵게 엉켜 있는 상태에서의 기묘한 동작이나 거북스런 자세가 화면에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상황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가지 심리 반응을 야기시켜 준다.
그 하나는 혼란과 불안감이라는 심적 동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에 부수적으로 드러나는 비정상적 상황의 희극성이다. 예로서, 물고기와 게는 항상 상대를 물고 있으며, 낚싯줄에 걸려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줄로 엉켜있는 상태이다. 사람도 역시 같은 상태에서 끈으로 엉켜 있거나 잡혀 있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작품이 작가의 잠재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예술심리학의 일반론 역시 이중섭의 작품에서 그 대응치(對應値)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인간적인 고독감이나 이에 연관되는 염세증 또는 피해망상증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요소로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중섭의 작품을 다시 살펴보면, 구성요소로서의 대상이 한결같이 정면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는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서로 연결지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쉬운 정이나 인간적인 유대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인 발로의 반응현상이라 할 수 있다. 부족감을 메우고자 하는 반사작용이 결합한 상태로서 나타나고 이것들이 풀어지기 힘든 상황으로까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주는 점이 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강(江)>·<아이들과 끈>이라는 명제의 작품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작가의 단념과 절박감이다. 작가는 자신의 심리적인 컴플렉스를 은폐하지 못한 채 이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작품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달과 까마귀>·<손과 새 가족>은 심리적인 불안감과 초조함을 더욱 심각하게 표상시킨다. 이 작품들은 이중섭의 정신적인 피로 및 심신의 고통이 그를 억압한 데서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 의식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운의 굴레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염원이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 불길하고도 어두운 신세, 음산한 심리적 불안 등이 <달과 까마귀>라는 작품으로 연결되고, 절망적인 안타까움이 잡혀지지 않는 사랑의 가족이라는 상황이 작품 <손과 새 가족>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잡힐 듯한 귀여운 새들, 그러나 잡히지 않는 새, 이것이 이중섭과 그의 가족과의 거리이며 관계이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손은 허공을 잡듯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절망적인 안타까움으로 인해 손의 동작이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작품 <달과 까마귀>·<손과 새 가족>·<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극도에 달한 작가의 정신적인 초조함과 불안감을 여실히 나타내 보여주며, 급기야 정신안정을 위해 병원에서 입원치료까지 받는 사태로까지 발전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부인 이남덕 여사의 편지가 그 심각함을 알려준다.
당신, 아고리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너무 너무 기다려서 어쩐지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도 있어요.
이남덕 여사와 대담을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유준상은 여기에 부언하여, 이중섭은 이중섭대로 부인과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곧 가겠다. 자전거도 사주겠다. (……) 아빠 있는 곳은 아주 춥다."고 숱한 답장을 보냈지만, 남덕의 예감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고 절절이 그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Ⅲ
이렇듯이 이중섭의 파란곡절이 많았던 생애를 대충 되새겨 볼 때, 그가 남긴 작품은 그의 삶의 행로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삶의 불안과 계속되는 심신의 피로 속에서 혼신이 투입된 작품이 제작되기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비정상적인 열기로 가득 차 있고, 불안하게 흐트러진 구성적인 선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달리하여 이중섭의 미술을 감상하면 현대 서구의 표현주의 미술에 접근시켜 볼 수도 있겠지만, 표현주의의 선은 재료와 정신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것이며, 소위 무가치의 세계관을 표상하는 미술이 되고 있는 바, 이중섭의 미술을 여기에 비교시키기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중섭이 일본 문화학원 재학시에 제작하고 수상한 작품은 그가 원대한 포부와 희망을 자신의 미술에 품을 수 있을 만한 현대적 성격을 보이는 예술성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의 이 창작성이 귀국 후의 암담한 생활 때문에 개발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점에 바로 아쉬움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화가로서의 이중섭의 운명은 예술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이 양자의 원만하고 적절한 융합이 그에게는 없었다.
林 英 芳 서울대학교 교수·미학
이중섭 예술의 구조와 종족적 미의식
화 가 이중섭(1916~1956)은 주로 신화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해돼왔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천재란 수식어가 붙어다녔고, 그의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논의됐다.
예를 들어, 김광균은 1955년 「미도파 전시회」팸플릿에서『중섭이 어디다 뿌리를 박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고, 고은은 『이중섭 평전』에서 『중섭의 예술은 이미 비평의 숙도(熟度)를 소유한다』하여, 비평의 대상에서 초월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다시 말해 중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비평의 포기 현상이 유포돼 있었다.
다른 한편, 소수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기행과 일화가 과장되었을 뿐 작품은 대단치 않다는 견해도 있다.
식민지 시대의 유미주의(원동석), 무분별한 예술지상주의(김윤수), 타락한 르네상스의 예술의식 (「계간미술」 79년 여름)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의 예술 자체에 대한 검토는 언제나 불충분했고, 지난 40년 동안 이중섭론의 필요성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중섭은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가장 잘못 알려진 화가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작가론의 공백을 의식하면서 중섭 예술의 기본구조와 특성을 논의하려고 한다.
특히 소그림 위주의 작가론에서 벗어나 그의 예술 전체를 문제삼으려 한다. 일부의 과장된 주장처럼 그는 결코 난해한 화가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하나 즉시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오리무중 상태에 있는 것은 중섭 예술의 전체 구조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1차적 목표는 중섭 예술의 전체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이 글의 또 다른 목표는 중섭 예술의 독특한 구조를 가능케 한 종족적 미의식(種族的 美意識)을 구명하는
것이다. 중섭 예술의 표현양식은 근대적이며 현대적이다. 소그림의 표현주의, 엽서 그림의 상징적 처리,
닭 그림의 낭만주의, 군동화의 선묘화법 등은 전적으로 현대회화의 표현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중섭 예술을 떠받치는 정신적 배경은 표현양식과 일정한 괴리를 보인다.
종족적 미의식은 매우 낯선 용어이긴 하지만, 중섭 예술의 원동력을 구명하는데 적절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종족미는 중섭의 예술과 인생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관철되는데, 중섭이 불과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또 종족적 미의식은 이른바 근대적 자아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요컨대, 이 글은 중섭 예술의 정신적 배경을 구명하는 가운데 근대화 여명기의 한국 미술이 서양 미술
을 수용하면서 부딪힌 문제와 이를 대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기술하려고 한다.
중섭 예술의 큰 대조와 작은 대조
① 소그림과 군동화의 큰 대조
중섭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감상하다 보면, 대조적인 세계를 만나게 된다. 소그림과 군동화(群童畵)가 그것이다. 중섭은 소의 화가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화가라해야 옳다. 사실 그는 소보다 더 많은 어린이를 그렸다. 그런데 소그림과 군동화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너무 대조적이어서 동일한 화가의 그림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두 유형의 그림군의 대조성에 관심을 집중할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소재의 숫자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섭의 소는 언제나 한 마리다. 한 마리의 소는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등장한다.
굵은 선이 나타나고 강렬한 색상과 터치가 강조된다. 또한 중섭은 한국소를 그리겠다는 자의식이 강했지만, 그의 소는 코뚜레, 쟁기, 마차와 같은 필수품을 벗어 던진다. 그의 소그림에는 어떤 잡물도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서 소의 얼굴만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들은 시인 고은이 「소의 종교」라고 일컬었던 소의 절대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반면, 군동화에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많은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봄의 어린이」에는 개미, 나비, 풀, 나무도 등장한다. 군동화로 분류할 수 있는 「제주도 풍경」에도 많은 게가 나타난다.
게들에 특유한 몸 동작은 게들이 수없이 많아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따라서 군(群)이란 표현을 어린이만 많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많음 속에서 중섭의 아이들은 절대성을 상실한다.
군동화는 박용숙의 표현처럼 『서로가 서로를 즐겁게 하는 공희(共戱)의 세계요, 친교의 동작이 강조되는
상대의 세계』다. 이와 같은 어울림의 세계는 한 마리의 소그림에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장면이다.
대조적 특성은 소재의 숫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섭의 소는 그림 밖의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애쓴다. 소그림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외침이나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또한 소는 고개를 70도쯤 휘저어 강렬한 시선을 던지며, 무언가를 의미있게 바라본다. 따라서 중섭의 소는 정물이나 동물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요동치는 정신의 치환물(置換物)이다. 소그림이 표현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중섭의 소가 인간을 대신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변용의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면, 군동화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빠져 있다. 중섭의 군동화에는 보통 4, 5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갓난아이처럼 머리털이 없으며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다.
군동화에서도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많은 경우 군동화의 소리는 갑자기 음악과 대화가 중단된 영화처럼 화면 속으로 흡수된다. 아무튼 아이들은 나비를 잡거나 물고기와 놀고, 게에게 잡히거나 끈을 잡는 등 놀이에 열중하며 어떤 행복을 즐기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아이들 나이가 10세 안팎으로 추측되지만, 그들의 자세와 태도는 젖먹이 시기로 돌아가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퇴행의 과정을 거쳐 군동화의 아이들은 고도로 양식화되며, 개성을 박탈당한다.
중섭의 소가 고개를 쳐든다면, 군동화의 아이들은 고개를 뒤로 젖힌다. 소가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데 반해, 아이들은 완전한 무위(無爲)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외에도 소그림과 군동화에서는 색채와 선의 대비 등 여러 가지 대조적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중섭 예술은 소그림만 강조되었고, 군동화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나 만약 군동화가 없었다면 소그림의 진정한 의미는 반밖에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요컨대, 소그림과 군동화는 대조적 세계인 동시에 서로 다른 측면을 조명해 준다. 따라서 두 유형의 그림군을 「중섭 예술의 큰 대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②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대조
중섭 예술에는 또 다른 대조적 세계가 있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대조적 세계가 그것이다. 그것은 큰 대조, 그러니까 소그림과 군동화의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중섭 예술의 작은 대조」라고 부를 수 있다.
중섭은 동경에 유학중이던 1940년경부터 1943년 사이에 200여점의 엽서그림을 남겼다. 후일 그의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게 편지 대신 보냈던 것들이다. 그리고 4점의 닭그림도 남기고 있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대조적 세계는 연애와 결혼, 즉 마사코란 여인이 일차적 모티브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엽서그림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새사냥」과 「두 사슴」이다. 두 그림에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들 그림은 중섭의 연애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은 닭그림도 마찬가지다.
닭그림은 결혼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모두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같은 구도에 놓인 셈이다.
그러나 두 유형의 그림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대조적 특성은 여러 측면에서 포착되지만,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각 그림에 나타나는 두 주인공의 시선 및 자세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새사냥」과 「두 사슴」을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사냥」의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활시위의 초점을 허공에 맞추고 있다.
그 남자의 외면 자세는 「두 사슴」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슴과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새사냥」의 여자는 상대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취한 표정과 자세는 정작 연모하는 남자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처럼 두 그림에는 시선의 외면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외에도 엽서그림 중에는 이와 유사한 구도를 갖는 그림이 여러 점 있다. 이들 엽서그림은 두 주인공이
서로 가까이 하려는 욕망이 넘쳐나지만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엇갈린 시선과 외면의 틈 사이로
진한 에로티시즘을 노출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반면, 닭그림의 큰 특징은 명백한 방향성이다. 두 마리 닭은 언제나 정면을 향한다.
「투계」의 싸움과 「부부」의 입맞춤은 닭그림의 고정된 주제인데, 이들 닭그림에서는 「새사냥」과
두 사슴」에서 나타났던 엇갈린 시선, 외면, 억제된 욕망이 완전하게 해소된다. 닭그림의 묘미는 부리가
맞닿은 지점에 형성된 강력한 집중력과 긴장감이다. 그것은 「부부」에서 더욱 강력한데, 그 집중력이 너무 강해서 두 마리 닭은 거의 한 일자(一)로 자지러질 듯하고, 그에 따라 화면은 금세라도 두 쪽으로 찢어질 것 같다. 그리하여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투계」조차 그들의 마주침은 비극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안타까운 연애와 행복한 결혼이란 계기적 발전을 담고 있다. 또한 닭그림은 「새사냥」과 「두 사슴」의 발전된 세계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대조적 세계임을 보여 준다.
중섭 예술의 구조와 원형적 미의식
① 중섭 예술의 구조
중섭 예술에는 거의 체계적이라고 할 정도로 일관된 전개과정이 있다. 소그림과 군동화의 큰 대조,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대조가 그 전개 과정에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거대한 실체인 소의 해체 과정이요, 하나에서 여럿의 세계로 나아가는 증식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만남은 필수적인데,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그러한 이행과정을 보여준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소그림이 군동화로 나아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중섭의 그림들은 서로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그 전체적 구조는 다음과 같이 도해할 수 있다.
이 도해에 따르면, 중섭 예술의 구조는 소 - 닭 - 어린이와 가족, 다시 말해 하나 - 둘 - 여럿의 계기적 발전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중섭의 그림이 하나(소)에서 둘(닭)로 확장되기 전, 그외 엽서그림에서는 "엇갈린 시선"이라는 단계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중섭 예술의 전개 과정은 중섭의 개인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중섭 예술은 자신의 자의식, 연애와 결혼, 자녀의 탄생과 죽음 같은 개인적 체험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그와 같은 상관관계는 그의 예술에 어떤 내면적 논리가 잠재함을 암시한다. 그 내면적 논리란 이른바
중섭 예술의 자기표현성이며, 이 글에서 말하는 종족적 미의식이다.
이러한 구조 파악의 일차적 의의는 이중섭 이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의
도해는 제작과정의 사적(私的) 성격때문에 본격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온 엽서그림을 중섭 예술의 본류에 합류시키고 있다. 사실 중섭 예술에는 사신(私信)과 본격적인 작품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위와 같은 구조파악은 소그림 위주의 감상에서 벗어나 중섭 예술 전반에 대한 유기적 이해를 촉진한다. 여기에서는 군동화도 소그림에 버금가는 의미를 획득한다.
「새사냥」과 「두 사슴」을 포함한 200여 점에 이르는 엽서그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다. 또한 중섭의 예술세계에는 청년시대의 연애감정을 표현한 엽서그림의 「억제된 에로티시즘」과 결혼 이후의 성적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음담패설류의 에로티시즘」이란 영역이 있다.
이들 두 유형의 에로티시즘은 「중섭 예술의 제3 대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위의 구조 파악이 중섭 예술 전반에 걸친 쟁점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② 원형의 미의식과 가족도
중섭 예술에는 「원형의 미의식」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중섭은 원형 그 자체를 선호하여 호박, 꽃, 천도복숭아 같은 둥근 물상을 화면 중심에 즐겨 배치하곤 했다. 또한 화면 전체가 원형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 같은 사례는 「아이들과 끈」「춤추는 가족」 「제주도 풍경」과 거의 모든 가족도에 나타난다. 이들 그림에서는 주인공들이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또는 서로의 만짐과 접촉을 통해 하나의 원형을 이룬다.
또한 중섭은 말년에 원형광태(圓形狂態)란 특이한 정신병 증세를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원형광태란 눈(眼), 접시, 도넛, 문의 손잡이와 같이 둥근 물체를 보면, 극도의 아름다움과 극도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ambivalance)이 그를 극단적 흥분상태로 몰아넣곤 했던 증세다. 실제로 원에 대한 미묘한 감정 상태가 그대로 노출된 그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베잠방이를 입은 아버지와 벌거벗은 두 아들이 동그란 원을 만들어 놓고, 그 원형이 금지구역이라도 되는 양, 그 안으로는 한 치도 더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판화 그림」이다.
원형에 대한 중섭의 특이한 태도는 지금까지 천재의 광기란 관점에서 다루어졌지만, 사실은 중섭 예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소그림(하나)-엽서그림과 닭그림(둘)-군동화와
가족도(여럿)란 중섭 예술의 전개 과정은 궁극적으로 원형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섭 예술은 정신적 실체인 소의 해체 과정이요, 해체의 궁극적 모양은 원형이란 구조를 띠게 된다. 이러한 이해방식 속에서는 그의 소도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원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중섭이 원형의 미에 천착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천재화가가 아니라, 한국미에 충실한 한국의 화가였음을 말해준다. 사실 원형의 미의식은 중섭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미의 궁극적 모양(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환기에서 원형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고려청자와 같은 고아함의 근원이다.
장욱진은 해와 달, 앞마당, 멍석, 나무 등 생활 주변의 모든 물상들을 원형으로 재처리한다.
김수근에 이르러 원형은 자궁 공간이란 모성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이만익은 신화가 탄생하는 원초적 상황에서 해와 달, 화합, 구도(救道)의 이미지를 원형과 연결시킨다. 그 외에도 한국미에 정통한 예술가들은 예외없이 원형의 미에 천착한다.
이들과 비교할 때, 중섭의 원형은 전통적 한국 가옥의 울타리에 가까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가 가족도를
많이 그렸다는 것과 가족도가 대부분 원형이란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결국 중섭의 원형은 가족적
(종족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며, 잃어버린 가족[우리(we)=울타리=우리(enclosure)]에 대한 처절한 추구
라고 말할 수 있다. 군동화의 어린이가 젖먹이로 퇴행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원형적 미의식이 모성의
품속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는 잃어버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형의 일반적 느낌은 원만함이지만, 중섭의 원형은 붙잡음과 만짐을 통한 유대감의 표현이요 강력한 추구의 대상이다.
그와 같은 유대감은 물고기가 게와 어울리고, 게는 아이의 고추를 물고, 아이는 새를 붙들고, 새는 나뭇잎을 무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접촉의 연속 속에서도 강조된다.
확대된 자아와 종족적 미의식
① 자기표현적 특성과 확대된 자아
앞에서 본 것처럼 중섭 예술은 어떤 내면적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원형의 미의식을 지향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물음은 한국 미술에서 근대적 자아 문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수용되며, 어떤 장애물에 봉착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라는 중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으며, 조심스러운 해석을 요구한다.
중섭 예술은 자기표현적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중섭 예술은 중섭의 개인사로 환원될 수 있다. 그의 예술이
식민지 시대의 유미주의, 무분별한 예술지상주의, 타락된 르네상스 예술의식이란 비판을 받는 것도 그런
특성 때문이다. 중섭 역시 『그림은 나를 말하는 수단』이라고 말하였다. 중섭 예술의 자기표현적 성격은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인 셈이다. 그런데 중섭의 자기표현적 성격은 해석상 몇 가지 주의를 요한다.
우선 중섭은 자신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자화상이나 인물화를 그리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자화상이 미술사에 등장한 것은 근대적 자의식이 형성되던 15~16세기의 일이다.
중섭의 그림에도 중섭을 상징하는 주인공이 많다. 그러나 중섭은 자기 자신을 어머니, 애인, 아내,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표현하였다. 닭그림의 부부가 그렇고 가족도가 그렇다. 중섭 자신은 언제나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는 자화상의 역사에서 참여 자화상의 단계를 연상케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중섭의 예술적 상상력은 결코 중섭 자신이 아니라 가족 또는 가족처럼 친밀한 것들을 통해서만 발휘되었다. 예컨대,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루 빨리 당신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표현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하오』라거나, 『하루 빨리 당신과 아이들 곁에서 단 일년 만이라도 제작할 수 있다면 …』 하고 간절하게 염원했다. 중섭의 서간집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에서는 창작에 대한 열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토로하는 무수한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아내에 대한 애정표현 이상의 의미, 즉 중섭의 자아관을 알려주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활동은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 구체적으로는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설정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추동력을 얻었다. 중섭의 창작활동 역시 정신적 차원에서는 아내와의 공동작업 성격을
띄고 있다. 중섭은 4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그런데 그가 요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겨우 4년간 지속된 아내 및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가족과의 이별, 아내의 부재는 그의 창작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연적 생명마저 앗아갔던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중섭이 『그림은 나를 말하는 수단』이라고 할 때의 나는 중섭 개인을 지칭하는 「근대적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1차적으로는 가족까지 확대되고 가족과 결합된 나이며, 2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확대된 자아(extended-self)」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소그림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중섭은 『저 소는 나』이며 『나는 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중섭의 자아는 소라는 친숙한 동물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따라서 중섭 예술은 표면적으로 자기표현적이나, 내용적으로는 공동체표현적일수밖에 없다. 중섭 예술의 전체 구조가 놀랄 만큼 단순한 체계를 지니는 것도 그의 예술이 공동체로 확대된 자아의 표현이란 형태를 띄기 때문이다.
② 종족적 미의식과 중섭 예술의 방법론
중섭 예술의 진정한 특성은 그의 예술이 종족적 미의식으로 충만한 세계라는 것을 파악할 때 그 전모가 명확히 드러난다. 중섭 예술의 표현양식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섭 예술의 정신적 특성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종족미(種族美)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성스러움과 의미심장함으로 가득한 종족의 세계다. 이와 같은 표현양식과 표현정신의 괴리가 중섭 예술에 미묘한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얼핏 보면 중섭 예술은 개인사 또는 가족사로 구성된다. 그러나 중섭 예술은 그 이상이다.
중섭은 소와 닭, 게와 어린이, 물고기와 나무들을 자신의 그림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 중섭의 독특한 방법론이 끼어든다. 중섭이 소재를 이해하는 방법은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인지하는 것과 다르다. 중섭은 일단 소에 사로잡히고 난 후, 해가 지도록 들판에 앉아 소를 관찰했다.
그냥 관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소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보고 또 보았다. 너무 그러다가 소도둑으로 몰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소에 대한 중섭의 태도는 중섭이 소와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여준다.
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닭이 중섭의 소재가 되기까지 중섭은 닭이(彛)가 오를 정도로 방 안에서 닭과 함께 뒹굴었다. 그리고 그 닭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닭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닭은 그제서야 중섭의 소재가 됐다. 중섭이 소재를 파악하는 방식은 소재와 친밀해지는 과정, 몸으로 관찰하는 몸찰이었다. 또중섭이 소재를 몸찰하는 방식은 종족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통과의례, 그것도 의미심장한 통과의례를 치르는 것에 비유할 수가 있다.
중섭이 창작행위에 많은 터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종족적 미의식을 엿보게 한다.
『한두 번 본 것은 그릴 수 없다』는 것도 그와 같은 터부의 일종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반복
관찰의 여부가 아니라, 종족 같은 친밀성이 확보되었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여자와 남자 어른을 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정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화상, 초상화,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근대적 자아의 표현양식으로 등장한 이들 장르의 그림이 중섭의 종족적 미의식을 반영할 수 있다.
전인권 (99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당선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41×71cm, 1951년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한 이중섭은 부산에서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주민의 호의로 살 곳을 얻어서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다. 사는 집 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닷가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 풍경화다. 뒷날 부산과 통영에서 그린 풍경화들에서 보이는 활달한 필치와는 사뭇 다르다.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귤이 자라는 따뜻한 날씨와 작으나마 깃들 수 있는 집에서 비로소 안도한 이중섭의 마음을 느낄수 있다. 아울러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북한에서 생활할 때 강요되다시피 했던 사실주의적인 태도가 남은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도원>과 함께 이중섭이 남긴 그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에 속한다.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도원
종이에 유채, 65×76cm, 1953년 무렵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하는데, 통영에서 멀지않은 산청이 고향이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월북하고 없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의 동인이었던 최재덕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호 대향을 써서 대이상향이라는 본래의 의미대로 낙원의 느낌을 물씬하게 풍기도록 하였다.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29.5×64.5cm, 1954년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고 했는데, 이 그림은 이를 옮긴 것이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곧 만나게 될 가족에 대하여 희망에 차서 그린 것이다. 유화가 1점 더 있다. 그림의 테두리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받은 루오가 쓰던 수법을 응용한 것으로 이중섭도 이를 자주 애용했다.
가족
종이에 유채, 41.6×28.9cm
소
소는 중등 과정부터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고 동창들은 전한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습의 소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 <비둘기가 있는 가족>이 그려져 있다.
가족과 비둘기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그림은 재빨리 완성해 이런 느낌이 더더욱 강조되었고, 그럼에도 등장인물의 개별 특징이 또렷한 것이 큰 특징이다.
소와 새와 게
종이에 유채와 연필, 32.5×49.8cm
황소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투계
종이에 유채, 29×42cm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소와 어린이
나무판에 유채, 29.8×64.4cm
기진맥진한 소는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이중섭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지고 가던 지게를 세우고 남자아이가 딱한 처지의 소 가랑이 사이에 들어가 앉아 두 손으로 꼬리와 뒷다리를 쥐었다. 무슨 행동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재빨리 소 불알을 훌트면 기운이 버쩍 난다고 한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곤란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히 계산되었으므로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닭과 가족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년 무렵
가족이라는 주제는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소망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월남한 이산가족이기도 했던 그는 이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극단적인 예였다. <가족>의 위쪽의 아이에게 긴 색띠를 들도록 하여 화면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자신은 꽃을 쥐도록 했는데 꽃잎이 뚝뚝 듣도록 했고, 아내쪽에는 새를 배치했다. 셋 모두 앞을 보도록 한것과 달리 아래의 아이는 화면 안쪽을 향하도록 하고, 고개를 쳐들어 셋을 보도록 연출했다. <닭과 가족>의 닭은 결혼직후 이중섭이 일삼아 키우기도 했고, 즐겨 먹던 것이다. 두 아이는 병아리가 든 광우리를 들고, 아래 두 사람은 성징이 불분명하여 아이들로 착각하게 하지만 암탉을 안은 듯한 왼쪽은 아내고, 오른쪽은 지아비로 닭에게 어떤 작용을 가하고 있다. 교미시키기 위하여 발정하도록 항문에 숨을 세차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부부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무렵
박명자-한용구 기증,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봉황이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된 듯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 하다. 일어서서 날아오를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만나려 애쓰나 만나기 힘든 것이다. 후자는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보강하고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그림은 이중섭이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어떻게 보든 함의가 풍부한 그림이다. 비슷한 유형의 그림이 서울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되었다고 하는데, 새들이나 애정이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까마귀는 6.25 전쟁 전만 해도 흔하던 새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포성과 화약 냄새 때문인지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통영에서 그려졌다고 하는데 평화로웠던 그 곳에서 반갑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 검게 세 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은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릴 소재다. 까마귀를 이루고 있는 붓질을 자세히 보면 날려져 있어서 마치 글씨예술(서예)의 비백과 같다. 그래서 전통 예술의 냄새가 진한 것이다. 대한 미협전에 출품되어 절찬을 받은 작품이다.
물고기와 게와 노는 네 어린이
종이에 유채, 36×27cm, 1951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을 그린 일련의 유화들이다. 앞은 거대한 물고기와 노는 두 남자아이를
그렸다. 줄을 이용해 대상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지운 연출이 돋보인다. 끈을 이용한 구성은 자주 애용되는 방법이다. 더욱이 화면 아래쪽의 아이가 입은 옷을 물고기가 물도록하여 생기를 돋구었다. 아이와 물고기가 만드는 그림자도 연결시켰다. 그러다 보니 밝고 어두운 부분을 구별하여 묘사하게 되었는지, 이중섭의 그림에서 드물게 명암법이 등장한다. 그래서 제주도 또는 부산 시절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본다. 뒤의 것은 물고기와 게를 앞세운 네 명의 남자아이들이 앞사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는 방법으로 줄지어 있는 모습을 새을자 모양으로 배치했다. 그밖에도 이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맨 앞과 뒤에 있는 아이들이 잡은 끈인데, 이를 두 번째 아이가 잡아 당기므로 해서 더욱 재미있게 연관지웠다. 배경을 한가지 색으로 평면으로 칠하고 테를 둘러 정연해 보이나 억센 붓질로 그렸다.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발 앞에 있는 게를 잡으려는지 두 손에 쥔 끈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아이를 그렸다. 턱을 쳐들고 위를 보도록 해 얼굴이 마치 고개를 뒤로 젖히듯 배치되어 있는데, 몸체는 앞을 향하고 있다. 또한 게가 정확히는 풀빛에 가까운 특이한 색으로 눈길을 모은다. 이런 눈속임 장치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중섭의 연출이 그만큼 높은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전체는 매우 거칠게 그려졌는대 칼칼한, 조야한 맛을 우리 미감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횐 소
나무판에 유채, 30×41.7cm, 1954년 무렵
서울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소의 상태도 평정을 이루어서 심정이 안정된 가운데 최고조의 상태를 보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도판 16과 같은 붓질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검은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을 보이고 있다. 특히 머리와 꼬리 부분에 그런 표현이 강하다. 사의성 마저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서예를 비롯한 전통 예술에 대한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솜씨 좋은 소잡이가 생각나는 그림이다.
소
종이에 유채, 27.5×41.5cm
다친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 뚝뚝 떨어지기까지 한다. 소 그림에서도 매우 드문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그라지지 않았으므로 뿔을 앞세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태세다. 거의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흰 소
종이에 유채, 34.5×53.5cm, 1953년 무렵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아가려 하고 있다. 붓과 물감칼로 비교적 넓게 발려진 흰 빛깔에 비해 어두운 빛깔의 물감은 붓을 꼿꼿이 세워 그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릿발 같은 매우 숙련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추사체의 필획을 보는 것 같다.
복사꽃이 핀 마을
종이에 유채, 29×41.2cm, 1953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오늘날 대표작으로 꼽는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려 남긴다. 이 그림은 이곳에서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의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소그림들에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숙련된 붓질에서 오는 시원스런 맛이다. 이런 것이 기운생동의 미감이 아닐까?
길
종이에 유채, 41.5×28.8cm, 1953년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 전면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봄의 어린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cm
환희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1955년
복숭아꽃이 수 놓여진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그러나 물감을 두껍게 쌓이도록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말린 위에 전면적으로 물감을 칠한 다음, 긁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으로 간혹 사용했던 기법이다. 자부와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무덤벽화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전람회가 열린 미국 공보원의 직원이 간직하던 것이다.
손
종이에 유채, 18.4×32.5cm, 1954년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갈색조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선은 흰 선의 한 자락을 집어들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의 주변에 그려진 것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손을 그린 2점 중 하나로,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유채와 연필, 10.5×12.5cm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5×37cm, 1953년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먹과 수채, 10.5×12.5cm
물고기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는 즐겨 그려졌던 그림으로 앞에서도 살펴보았다. 세 명의 남자아이가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원산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와 부모의 약?대신으로 얻어간 그림이라고 한다. 벌거숭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붉은 색조와 초록빛을 띤 물고기의 색이 독특하다. 물고기, 게와 노는 두 남자아이는 거의 같은 상태로 무려 다섯 번이나 그려진 것으로 확인된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거의 같은 소재를 거듭 탐구하듯 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부부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중의 하나. 싸우는 듯한 설정인 도판 11과 흡사하나 아래 암탉의 자태를 보면 교미를 위한 자세다. 두 마리의 닭이 모여 이루는 형태가 꼬리로 인하여 덜 완결되기는 했지만 하나의 동그라미를 이루는데서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림으로 된 언어다.
여섯 마리의 닭
종이에 연필과 수채, 26×36.5cm
두 마리의 닭을 통해 다툼과 어울림의 여러 정황을 노래한 이중섭은 여러 마리의 닭이 펼치는 드라마를 그림으로써 자신이 즐기던 소재를 더욱 심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한데, 푸르고 붉은 색깔의 닭을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중앙 뒤의 닭을 빼고 오른쪽 닭의 꽁지를 잡고 있는 남자아이를 선으로만 그린 연필화 한 점이 전한다.
닭과 게
종이에 연필과 과슈, 29×41cm
앞에서 살펴 본 그림의 왼쪽 위에 등장하는 닭을 그대로 옮겨진 듯 그려져 있고 닭이 굽어보는 쪽에는 게 한 마리를 배치했다. 게 주위에는 복숭아꽃잎을 배치하여 닭이 물고 있는 복숭아와 연관을 지니도록 했고 색채로도 청색과 분홍빛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꾀해 하나의 산뜻한 소품을 완성했다.
여인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중섭의 초기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그린 연필화로 전 해에 그려 지유텐에 출품한 것이 엽서그림을 제외하면 유일하다. 굵직한 연필선이 특징인데 훗날 특장이 되는 굵고 거친선을 감안한다면 이중섭의 개성이 벌써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랫도리에 걸친 옷은 고갱이 자주 그린 태평양 연안지역에서 입는 사롱이라는 치마와 흡사한데, 이것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대향이라는 서명은 이 그림에서 처음 쓰였다. 훗날 아내가 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
소년
26.4×18.5cm, 종이에 연필, 1942∼5년
세 사람
18.2×28cm, 종이에 연필, 1942∼5년
8. 15 직후에 열린 해방기념 미술전에 내기 위해서 원산에서 들고 왔으나 늦어서 미수에 그쳤다는 바로 그 그림들이다. 1943년 이래 그 때까지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42년에 그렸던 것을 다시 손 봐 출품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소년>은 화면의 거의 다를 차지하는 헐벗은 둔덕 가운데 난 길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가지만 벌린 나무가 있고 아래 구석에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가 있다. 무대는 어느 산등성인 듯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 아이,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가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나타내고자 한 것은 스산한 정감이다. 이러한 느낌을 하늘에는 가로줄을, 헐벗은 땅 부분에는 무수한 세로줄을 그었다가는 지우거나, 바탕재인 종이가 패일 듯 힘주어 그음으로써 더욱 강화했다. <세사람>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스산한 감정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숨으려 드는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 단말마와 같은 일제의 등살에 못살게 된 식민지 민증의 내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못가에서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1940년 말에서 1941년 후반기 사이에 그린 그림 엽서
14×9cm
후배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중섭은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그리던 이중섭은 겨울을 맞아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돌아와 있으면서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하고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활을 쏘는 사람들
종이에 펜과 수채로 그림,
9×14cm 1941년 말
소와 말을 타는 사람들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1년말
소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다. 1941년 한 해 동안 작은 크기이지만 80매에 이르는 그림을 고심해서 그렸다.
환상적인 바다풍경
종이에 청먹지로 그리고 수채
9 ×14cm 1940년말
원산만으로 보이는 해변에 꼬리는 물고기, 몸통 위는 소인 괴물이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환상적인 광경을 그렸다. 마치 원산에 사는 자신을 소개하는 듯한 설정이다.
부인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일본인 부인이 아이들과 거듭된 곤란 탓으로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가자, 다시 익숙한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식민지를 거친 민족 내지는 국가의 처지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 점은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편지는 그림과 어울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토록 명랑하고 낙관적인 인물이 비극적인 말로를 맞게 된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감상이 문득 일어난다.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이중섭이 눈에 선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자화상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하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1956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개인전 직전 처음 크게 건강을 상해 병원에 입원했던 이중섭은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마치자 다시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그림들은 서울로 가서 병원을 오가던 그가 다소 안정을 되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가리키는데 크레파스를 그어 마련한 거칠거칠한 질감이 계절 분위기를 잘 살렸다. 그러나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상태로 등장하는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플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희거나 노란 색을 칠한 새가 그런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구상네 가족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1955년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어른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어른 여자와 한 아이가 이를 쳐다보고 있고 화면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부러워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과 이중섭이 서로 손을 조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서로의 우정에 대한 표시라 여겨진다. 이중섭이 입고 있는 옷은 이즈음 그려진 연필로 그린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옷으로 보인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년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왼쪽의 소는 앞다리와 뒷다리 한쪽마저 상대방에게 올려놓았다. 싸움이 바야흐로 끝나려는 광경이다. 이런 설정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 소도 이긴 소도 모두 몰골이 형편없어서 싸움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위의 작품과 함께 1955년 5월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것이므로 말년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강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1956년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검게 표현되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절필작이라고 하는 비슷한 일련의 그림 중 하나이다. 화면의 전체에 물감이 칠해지고 남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있고, 하단에 담을 설정해 흰 새를 올려놓은 것도 있다. 제목은 당시 막 개봉된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고 싶은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그린 것 같다.
옛이야기
장판지에 유채, 31×41cm, 1956년
정릉에서 살던 만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한다. 사슴과 학으로 여겨지는 동물과 불로초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이상을 배경으로 한 십장생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운 날씨인 듯 한데 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상투까지 틀고 있어서 의외의 느낌이다. 복고적인 태도를 느끼게 하는 이런 작품들이 꽤 그려졌으나 환영받지 못하여 사장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달밤
종이에 잉크와 수채, 17.5×13.5cm
구름에 쌓인 달을 바라보고 누운 어린이가 나오는 특이한 설정의 그림이다. 달과 구름은 자주 애용되는 전통적인 문화의 한 품목이지만 그것을 소재로 다룬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재를 소화해낸 방식에서 우리는 전통을 어떻게 잘 살려냈는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구름을 처리한 방식에서 그가 소재로만 다룬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덩어리 구름과 꼬리 구름을 소화한 방식에서 전통적인 미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아래에 자족적인 남자어른이 아니라 누운 어린이를 배치하여 자연과 어린이로 새롭게 끌고 간 점이 이중섭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운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24.5cm
일본에 건너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의 하나다. 서귀포에서 살 때
자주 가서 놀던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즐거이 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과의 유대를 흐트리지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종이에 유채와 연필, 27×39.5cm
두터운 바탕칠 위에 정성들인 선묘로 아이들과 나뭇잎, 물고기를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끈을 설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에는 채색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왼쪽의 아이는 뒤만 보이고 머리와 팔은 보이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움직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라면 그림에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셈이다.
꽃과 어린이
종이에 펜과 수채, 17 ×15.3cm 1940년말
네 어린이와 비둘기
종이에 연필, 31.5×48.5cm
이 그림이 상당히 큰 규모라서가 아니라 종이에 연필로 그려진 이중섭의 작품들을 흔히 스케치나 소묘, 또는 밑그림이라고 부르기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근래 들어 이런 그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현상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이를 연필화로 부르고자 하며,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긴다. 특히 요즘은 덜 하지만 중국, 일본과 같이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글씨예술(서예, 서도를 가리킴)이 발달한 우리의 경우 붓이나 연필을 구사하는데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이중섭은 1940년대부터 이를 감지하고 독특한 붓질과 연필구사법을 개발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종이 위에 확신을 가지고 긁다시피 그어댄 선의 맛은 그 자체 독자적인 감각을 발휘한다.
꽃과 어린이와 게
종이에 잉크, 9 ×14cm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어린이
종이에 펜과 유채, 19.2 ×12.2cm
개구리와 어린이
종이에 잉크와 수채, 10.5 ×25.7cm
판자집 화실
종이에 펜과 수채, 26.8×20.2cm
방 하나인 판자집의 네 벽에서 한 벽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부를 보이도록 했다. 그런데 지붕과 실내는 약간 비스듬하게 설정해 단조로움을 피하고자 했다.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도 봉투까지 쓰기를 마치고 누워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자족한 모습이다. 겨울 언저리임을 알 수 있는 풍경과 주변 색깔에 비해 자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노란색은 매우 효과적이다. 창조의 기쁨에 다른 곤란은 문제도 아니라는 이중섭의 기분이 전달되는 것 같다.
작품
1904년, 제4회 지유텐 출품작
소와 소녀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소묘
종이에 연필, 23.3 ×26.6cm 1941년, 제6회 지유텐 출품작
망월
제4회 지유텐 출품작
그림엽서
1941년 중반기
망월
1943년 제7회 지유텐 출품작
오지환 시집의 속표지 그림
소
종이에 연필, 26.5 ×33cm
신문을 보는 사람들
은박지에 유채,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 소장
동원유원지
종이에 연필과 수채, 유태 19.2 ×26.5cm
게와 담배대
종이에 연필과 수채 19.2 ×26.5cm
Humoresque in Gb major, Op.101, No.7
Marco Rocha,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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