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무릉도원(武陵桃源)]
설악산 한오름산장에서 / 김 효중 지음
산장 밖은 사방간데 두메산골
숲의 아아라 숫바다 일렁일렁
아니오리골이 빚어내는 선경(仙境)
샐녘 안개장막 드리우면
선녀탕 선녀들 숫몸 드러내고
스쳐가는 총각바람 얼굴 붉히네
텃밭에 고추 감자 꽃잎 하롱하롱
함께 지키는 이들 섬세한 손길
삶의 불향기 슴배이는 한오름산장
눈빛끼리 마음길 트이면
초록별은 혼불로 타올라
오목가슴 열어주네
황진풍진 습습한 나에게
산장은 몸을 낮추고 순살결 드러내며
삶의 무게 내려놓으라 하네
한오름은 제 스스로를 내려놓고
젖은 가슴으로 모듬모듬
마음 비워 산을 찾아오라 하네
질녘 어둠 싸묵싸묵 밀려와
내 머리 발밑에 정금고요 쌓이나니
별내음 흐던한 화엄세상 보아라
시멋없이 나 별밭 예돌다가
나운나운 까치발로 숨어들어
어느새 초저녁 조약별로 피어나네
멀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그리움의 공간 만리를 지척으로
넘나드는 정여울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네
호매론 선비들 여낙낙
안으로 안으로 모아드니
지혜의 살여울 가슴밭에 나울나울
무수리바람 불고 포실눈 흩뿌려도
본래면목(本來面目) 무상대도(無上大道) 얼뿌리에서
새순바래기 엄돗나니
바위틈 흐르는 물소리 바람소리
산장 식구들 가슴 비우고 머루밤드리
불서러움에 움치는 내 영혼 휘어로운데
(용어 해설)
정여울 : 정이 감돌거나 넘치는 모습
아아라 : 아득한
숫바다 : 파도가 거센 바다
샐녘 : 날이 샐 무렵
숫몸 : 숫처녀몸
불향기 : 뜨거운 향기를 강조하고 미화한 말
슴배인 : 스며배인
초록별 : 새로 별이 뜨는 모습을 미화한 말
오목가슴 : 접히고 눌린 마음을 비유한 말
습습한 : 촉촉이 풍겨나는
순살결 : 자연스럽게 빛나는 길의 모습을 살결로 비유한 말
젖은 가슴 : 사랑과 정이 촉촉히 담긴 모습을 뜻하는 시적 표현
질녘 : 해질녘
싸묵싸묵 : 조금씩 흔들리며 나아가는 부사어
정금고요 : 절대고요
흐던한 : 흐벅한, 넘치는
시멋없이 : 망연히, 아무 생각없이, 쓸쓸히
별밭 : 별이 찬란히 뜬 밤하늘
예돌다가 : 여기 저기 떠돌다가
나운나운 : 가볍고 산뜻한 모습
조약별 : 조약돌처럼 이름 지어지지 않은 별, 작은 별
호매론 :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난
여낙낙 : 여유있고 넉넉한 모습
모아드니 : 여럿이 한테 모여들다
살여울 : 급하고 빠른 여울물
나울나울 : 물결치는 모습
무수리바람 : 사정없이 불어대는 바람
포실눈 : 함박눈
本來面目 : 자기의 본성,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모습
無上大道 : 그 위에 더할 것이 없는 높고 큰 도리
새순바래기 : 새로 나올 순(싹)을 기다리는
머루밤드리 : 깜깜한 밤이 새도록
불서러움 : '서러움'의 의미를 강조한 말
움치는 : 움추리는
휘어로운 : 휘엉청 밝고 빛나는
▶김효중 시인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숨겨진 아름다운 말을 찾아 후세에 남기는 것을 사명으로 시를 쓰는 여류 시인.
∙ 충남 부여 출생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 2009년『시와시학』으로 시인 등단
∙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년 퇴임
∙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 저서로『박용철의 하이네 시 번역과 수용에 관한 연구』(문광부 우수도서)․ 『한국비교문학의 현장』․ 『한국현대시 연구』․ 『번역학』(대우학술총서)․ 『한국현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현대시의 이론과 비평』․ 『새로운 번역을 위한 패러다임』(학술원 우수도서) ․ 『글로벌 시대의 한국문학』․ 『한문문학의 세계화 전략』등이 있음.
사람이 나이 들면서 가장 아름답게 늙어 가는 모습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효중 시인이 그분이다. 경기여고․서울대 국문과라는 명문학교 출신이라거나, 독일 유학을 하고 대학 교수로서 한 생애를 보냈고 좋은 저서를 남겼으며 훌륭한 부군과 건강한 자손들을 두어서만은 아니다. 올바른 생각과 건실한 생활 속에서 한 생애를 보냈으며 영예롭게 정년을 맞이하고 대학에 명예교수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어서만도 아니다.
정년을 맞이한 오늘도 여전히 시인으로 창조적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본격적인 제2의 인생을 활기차게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런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을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흔히 사용하는 우리말에 여생(餘生)이란 말이 있다. 앞으로 남은 노년의 나머지 인생이란 뜻이 될 것이다. 세상에 어찌 ‘나머지 인생’이란 말이 성립할 것인가? 바람직한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쓰고 남은 나머지 인생이란 없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이 지속되는 한 하루하루가 곧 소중한 인생이며, 마지막 그날 그 순간까지가 생의 과정으로서 의미 있게 인식되고 아름답게 마무리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순원 소설가께서도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노년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효중 교수의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생의 완숙기에 새롭게 시작된 시쓰기의 창조적인 노력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시인으로서의 생애 덕분이다. 흔히들 낙향을 하거나 은퇴해서 그럭저럭 나머지 인생을 보내려 마음먹는 그 무렵에 새로운 추억과 그리움, 동경과 꿈을 지니고 신인으로서 데뷔하고 시집을 펴내는 창조적, 주체적, 열정적 자유인의 모습을 펼쳐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싱싱하고 탄력 있으며, 보람 있고 의미 있을 것인지 떠올려 보노라면 아름다운 노년이 될 것이 자명한 이치가 될 수 있으리라.
김 재 홍 (경희대 교수, 현대시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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