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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화백의 그림세계

박연서원 2013. 10. 14. 14:39

장욱진 화백의 그림세계

(1918-1990)

 

 

 

장욱진. 한국의 서양화가. 신사실파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동화·전설·이웃 등의 소재를 사용하며

동양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7년 충남 연기(燕岐)에서 출생.

경성제2고보, 양정고보를 거쳐 도쿄대[東京大]를 졸업.

1948년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약.

1945~1947년 국립박물관 학예관, 1954~1960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0년에 사직한 이후로 작품활동에만 몰두했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8년 분청사기에 그림을 그린 도화전을 열었고,

1983년 판화집을 냈다.

동화·전설·이웃 등 친근한 소재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성으로 그려냈으며,

동양화적인 화법에 동양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었다.

주요작품으로 《까치》(1958), 《두 아이》(1973), 《집》(1978),

《가로수》(1978) 등등이 있으며,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1976)가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현대 한국 화단에서 가장 자유로운 정서를 가지고 있는 화가 장욱진은 일제 시대에 태어난 조선의 어린 학생으로서 일본에서 열리는 그림대회에서 일등을 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 후 동경미술학교에 다닐 때에도 식민지인으로서, 그림 속에 일본 풍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모로 차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교수들에게 그 그림 실력만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할 때의 장욱진은 여느 교수들과는 다르게 귄위와 형식을 지독히 싫어했다.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줄곧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낡아빠진 양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 덕분에 새로 들어온 수위들은 그를 구걸 온 사람으로 여겨 문 앞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대학 정문 앞에서 수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허름한 옷차림의 교수님을 쉽게 상상해 볼 수있다.


그의 또 다른 기벽으로는 죽도록 마셔대는 술에 있다. 한번 술을 시작하면 열흘이나 보름씩 밥도, 안주도 거부하고 줄기차게 마셨다. 술을 먹는 것도 황송한 데, 밥을 어떻게 먹으며, 더군다나 안주는 미안해서 먹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도 술을 먹을 때처럼, 다른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때로는 식음조차 전폐하고는 그림 그리기에만 빠졌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을 다 완성하면 몇 달을 앓아 눕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살아가는 의미이고, 술은 휴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술과 그림은 인생 그 자체였다.

평생 그림과 술 밖에 몰랐던 그였기에 돈을 지니는 것이나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경멸했다. 때문에 부인이 책방을 운영하면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보살폈고 덕분에 그는 오로지 그림에만 온 정신을 쏟을 수 있었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유희를 주는 그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명성과 그림의 가치의 반은 헌신적이었던 부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나 선각자, 위인들 뒤에는 그들을 위한 희생이 존재했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린아이의 그림 같기도 한 장욱진의 그림들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그 크기도 작다. 그는 손바닥 만한 화폭 속에 해와 달, 나무와 집, 소와 까치, 가족 등 소박한 이미지를 담아냈다. 이는 큰 그림엔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싱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비록 크기는 작지만, 그 속에는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세계가 그려졌다. 한국인의 소박한 정서와 가족의 따뜻한 사랑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우리네 풍경 등이 그 안에 곱게 놓여있다. 어떠한 허영이나 사치로도 그려낼 수 없는, 작지 않은 아름다움 들이다.

4.19혁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절, 장욱진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덕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산 속의 사찰이나 시골과 같은 자연에서, 혹은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가족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던 그는 그것을 자신의 그림 속 원천으로 삼았다.

겸손하고 욕심없이 살았던 장욱진에게도 삶의 고난이 찾아오는 데 오십이 넘어 얻은 막둥이가 15살이 되던 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백내장을 얻어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68세에는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조차 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욱진은 70세가 넘을 때까지 미국, 유럽, 태국, 인도을 여행하며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73세였던 겨울 어느 날, 점심 식사 후 갑자기 그리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평소의 그답게, 신선처럼, 홀연히...

 

I'm simple...

 

"이 말은 내가 되풀이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

 

장욱진은 그림과 주도(酒道)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신명 하나로 그림을 그리는 장인으로 살기를 고집하는 그를 세상의 눈은 기인으로 여겼다. 

 

또는 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간 화가라 말한다,  그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고 화가는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뱉어내는 것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 하였다. 그런 화가였기에 그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 

 

공기놀이 / 캔버스에 유채,   1938

 

 

독 /  캔버스에 유채,   1949

  

붉은 소 / 캔버스에 유채,   1950 

 

자화상 / 종이에 유채,  1951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樹下  / 캔버스에 유채,   1954

 

그는 늘 잎이 풍성한 나무를 그렸고,

이는 가난하지만 늘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그의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여름 한낮, 나무 아래에서 속옷만 입고,

누워있는 어린 아이의 편안하기만 할 마음 또한 그렇다..

  

자동차가 있는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53

 

그의 그림 들 중에 특히 어린아이의 그림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작품이다.

그만큼 자유롭고 순수한 상상력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는 도시를 싫어했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바라본 도시 속 자동차를 그려냈다.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 거의 유일하게 문명의 사물이 들어있는데

그 문명도 나무들과 함께 조화롭고 평화롭게 위치하고 있다.

 

자전거가 있는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55  

 

나룻배 / 목판에 유채,  1951

  

마을 / 종이에 유채,  1951 

  

소 / 캔버스에 유채,  1954

 

붉은 색이 나는 땅 위에 녹색의 들이 잘 어울리어 활력이 넘쳐나고,

가축과 집 가까이 찾아 드는 까치도 한 식구로 여기고 있다. 

  

집 / 캔버스에 유채,  1955 

 

얼굴 / 캔버스에 유채,  1957

 

아이의 눈, 코, 귀, 목이 가장 단순한 기호로 그려져 있다.

그 뒤로는 집 세 채가 바로 또는 거꾸로 서 있다.

천진한 어린이가 두 다리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면 집이 거꾸로 보일 것이다. 

 

달밤 / 캔버스에 유채,  1957

 

어두운 반달만이 아스라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순간이다.

창문 하나 달랑 있는, 지나치게 검소한 집과 새

그리고 형태만 파악되는 나무들이 충분한 여백을 만들면서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욕심을 부리거나 하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와 새 / 캔버스에 유채,  1957

 

화면에 그린 소재들이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한결 같이 간결하다.

작가가 늘 말하는 [나는 심플하다]는 말 그대로

소재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만 그려서 가장 단순한 그림을 창작한다.

 

배와 고기 / 캔버스에 유채,  1960

  

까치 / 캔버스에 유채,  1958 

 

해,달,산,집 / 캔버스에 유채,  1961 

 

모기장 / 캔버스에 유채,  1956

 

입체주의 시점에서 그린 그림이다.

즉, 모기장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視占)에서 그리고

등잔, 요강과 그릇은 옆에서 바라다 보는 시점에서 그렸다.                 

 

무제 / 캔버스에 유채,  1962 

 

어부 / 캔버스에 유채,  1963

  

춤 / 캔버스에 유채,  1964

  

산수 / 캔버스에 유채,  1968

  

얼굴 / 캔버스에 유채,  1969 

 

풍경 / 캔버스에 유채,  1970

  

가족도 / 캔버스에 유채,  1972 

 

나무와 아이 / 캔버스에 유채,  1969 

 

어미소 / 캔버스에 유채,  1973 

 

고향 생각이 나면

  

그리움 

 

가족 / 캔버스에 유채,  1973 

 

하얀 집 / 캔버스에 유채,  1969

 

부엌 / 캔버스에 유채,  1973

 

원시시대 그려졌다고 하는 동굴 벽화 같기도 하고, 암호화된 그림 같기도 한 작품이다.

사람도, 벽도, 부엌의 모습도 모두 단순화되었다.

 

가재도구 하나 제대로 없이, 빈궁하기만 한 살림이지만

그들은 절망하거나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라고 할까... 

  

툇마루 / 캔버스에 유채,  1974

  

멍석 / 캔버스에 유채,  1973

  

평상 / 캔버스에 유채,  1974

  

초당 / 캔버스에 유채,  1975 

 

길에서 / 캔버스에 유채,  1975

  

나무와 까치 / 캔버스에 유화,  1977

  

원두막과 정자 / 캔버스에 유화,  1977

  

가족 / 캔버스에 유화,  1977

  

돼지 / 캔버스에 유화,  1977

  

소와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78 

 

길이 있는 마을 / 캔버스에 유화,  1979

  

가로수 / 캔버스에 유화,  1978

  

가족 / 캔버스에 유화,  1979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6 

 

집과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6

  

나무 / 캔버스에 유화,  1989 

 

밤과 노인 /캔버스에 유화,   1990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신선의 모습을 한 노인은 바로 작가 자신...

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그는 세상을 등지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 아래 있는 세상은 늘상 그의 바람처럼

어린 아이와 새 그리고 나무로 차 있다.  

 

무제 / 캔버스에 유화,  1988

 

나무,   1987

 

백내장 수술 후 완전하지 못한 시력으로 그린 그림들 중 하나인데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와 새, 소와 해 그리고 사람이 그려져 있다.

모두 장욱진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며 세상의 구성원들이다.

늘 그렇듯 나무가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나무가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과 기운을 공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무와 집,   1988

 

문 하나 달랑 있는 작은 초가집 안에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고,

그의 가족인 듯 한 부인과 아이가 밝은 햇살 아래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햇빛을 즐기고, 새소리를 듣고, 나무가 주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욕심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 가족은 전형적인 한국인, 우리네의 정서이다. 

 

노인,   1988

 

그림 한가운데에 크고 잎이 풍성한 나무 한 그루가 놓여있고,

해와 달, 소 그리고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림의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지극히 단순화된 나무도 그렇고,

화가 자신으로 여겨지는 노인의 모습도 수묵수채화처럼 맑고 가볍다.

인생의 말년, 그의 마음도 이와 같이 가볍기 때문이 아닐지...?

 


Für Elise

Bagatelle for Piano in A minor, WoO.59

Hans Kann,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