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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덕 하모니카 연주(09.10.7)

박연서원 2009. 10. 8. 23:05

 

 

 

 

 

 

 

전재덕 

 
출생 1974년 6월 20일
소속 JNH
데뷔 2004년 1집 앨범 '전제덕'
학력 혜광학교
경력 영화 '튜브', '똥개' OST 참여
수상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전제덕은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생후 보름만에 찾아온 원인 모를 열병으로 시력

잃었다. 7살이 되던 해 시각장애자 특수학교인 인천 혜광학교에 입학해 초중고 과정

마쳤다. 혜광학교 입학직후 교내 브라스밴드에서 북을 연주하면서 음악과 처음 만났다.

중1때 학교 재정문제로 브라스밴드가 해체되면서 사물놀이에 입문, 장구채를 잡았다.  

 

 
 

고1이던 1989년 혜광학교 동창 3명과 함께 제1회 '세계 사물놀이겨루기 한마당'에 출전,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이 대회는 당초 서서 하는 '선반'과 앉아서 연주하는 '앉은반'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가르는 방식이었으나, 멤버 모두가 시각장애인었던 까닭에 선반 연주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들의 놀라운 연주에 감동한 심사위원들이 즉석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예정에도 없던 '특별상'을 신설해 시상했다.

이를 계기로 동 대회는 2회부터 '선반'과 '앉은반'을 분리해 시상하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후 이듬해인 1993년 이들은 '다스름'이란 팀이름으로 동 대회에 다시 출전,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고 전제덕은 MVP를 받았다. 이후 '다스름'은 팀이름을 '사물 천둥'으로 바꾸고 김덕수 산하 사물놀이패로 활동했다.

전제덕이 하모니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 라디오방송을 통해 우연히 투츠 틸레망(Toots thielemans)의 연주를 듣고 나서부터다. 투츠 틸레망은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재즈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의 연주에 깊은 감동을 느낀 전제덕은 투츠의 음반을 모두 섭렵, 재즈하모니카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전제덕은 현재 국내 유일의 재즈하모니카 연주자다. 세계적으로도 재즈하모니카 연주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 '하모니카 마스터'가 된 그는 놀라운 연주력으로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 오래전에 이미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연주력에 주목한 많은 대중가수들이 음반 세션으로 그를 초청해 조성모, 박상민, 조규찬, 이적, BMK, 김정민 등의 음반에 참가했다. 또한 영화 '똥개' '튜브' 등 많은 OST음반에도 참가했다.

전제덕은 서정적 감수성과 화려한 테크닉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재즈의 즉흥연주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2003년 재즈보컬 말로의 3집음반 '벚꽃지다'에 음반세션으로 참가해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영혼까지 흔들만큼 짜릿하고 영롱한 소리"라는 극찬과 함께 '한국의 투츠 틸레망'이란 별명을 얻었다.

들숨과 날숨을 이용해 연주하는 악기는 하모니카가 유일하다. 그래서 하모니카는 인간의 체온에 가장 가깝다.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이 악기의 음색은 그 주인인 전제덕을 닮았다. 하모니카는 불과 한 뼘 남짓하지만, 전제덕의 하모니카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크기와 깊이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전제덕은 하모니카를 만나 온전한 기쁨을 얻었고, 하모니카는 전제덕을 만나 온전한 생명을 얻었다.  

 

운전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잠깐 해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하모니카 연주 음반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외국의 유명 뮤지션이나 가능할 것이라고 여기던 음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제덕의 하모니카 연주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테크닉과 감성이 돋보인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그는 보란 듯이 해냈다. 그리고 그의 연주 인생은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권유로 하모니카 시작
하모니카 연주로만 채워진 음반 하나가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하모니카에도 이렇게 다양한 음색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자그마한 하모니카에 입김이 들락날락하면서 만들어내는 음악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CF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Before the Rain’, 인생의 굴곡을 표현한 듯 애절한 ‘My Road’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모니카 연주곡이다. 지금까지 리 오스카와 투츠 틸레망스로 대표되는 해외 뮤지션들만이 하모니카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 오스카와 같은 뮤지션이 우리 곁에 있었다. 지난해 10월 하모니카 연주 음반 「전제덕」을 출시한 연주가 전제덕(31)이다.

팝, 재즈, 보사노바 등 다양한 리듬이 어우러진 그의 연주곡들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 하모니카와 드럼, 퍼커션 등이 어우러져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타이틀곡 ‘우리 젊은 날’을 시작으로 12번째 트랙 ‘나의 하모니카’까지 그의 앨범에는 하모니카가 낼 수 있는 모든 음이 다 들어 있는 듯하다.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빠른 속주곡도 있고, 다양한 전자음과 어우러져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펑키 리듬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시각장애를 딛고 이뤄낸 성과라는 사실에 많은 음악평론가들은 환호를 보냈다. 그의 음반은 지난 3월 22일 열린 제2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스 재즈&크로스오버’ 부문에서 수상했을 정도다. 이제 음반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계속 듣는 데는 장사가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도 없고, 악보를 볼 수도 없으니까 연습으로 모든 것을 커버했어요. 비장애인보다는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겠지만, 앞이 안보이니까 듣는 수밖에 없죠. 하도 많이 들으니까 CD 플레이어가 고장 나던데요.(웃음)”

뮤지션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상상외로 큰 어려움이다. 악보를 볼 수도 없고, 연주법을 배우기도 힘들다. 시각장애인 전제덕 역시 그런 어려움을 셀 수 없이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는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기보다는, 자신의 단점을 다른 것으로 보충해나가는 ‘낙천성’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천성을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저는 음악이 안되는 것 때문에 ‘미치겠다’ ‘걱정된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일반적인 장애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터득했거든요. 뭔가를 꼭 이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좋아서 했기 때문에 오래 할 수 있었죠.”

지금이야 하모니카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원래 그는 시각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물놀이 연주자였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에서 장구채를 잡았던 그가 하모니카와 인연을 맺은 것은 8년 전이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스웨덴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스의 곡을 듣고 하모니카를 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냥 취미로만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의 말처럼 ‘그냥 좋아서’ 시작한 것이다. 그게 자신의 업이 될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연주곡을 들으면서 따라 하다가 하모니카를 무척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광민은 그에게 “네가 하모니카 시장을 개척해보라” 말을 했다. 처음에는 ‘하모니카로 먹고살 수 있을까?’ 의문도 가졌지만,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2001년부터 하모니카 연주자로 나섰다.

“저도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우리나라에서 하모니카 연주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가능할 것 같더라구요. 기타와 피아노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만 하모니카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수많은 음반들을 들으며 코드 진행을 따라했다. 처음에는 음을 따라 하는 연주였지만, 이력이 붙으면서 자신이 새롭게 편곡을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자연히 그의 몸에 음악적 패턴이 생긴 것. 그의 하모니카 연주 실력이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가수들의 세션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조성모, 조규찬, 이적, 김정민 등의 음반 작업과 영화 ‘똥개’ ‘튜브’ OST 작업에도 참여했다.

전제덕은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주가를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하모니카 음반을 출시했다. 처음이기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과연 음반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작업은 난관에 부딪혔다. 프로듀서, 작곡가, 연주가도 모두 하모니카 음반을 만들어보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7개월간 서로 의견 차를 조율하면서 그렇게 음반은 태어났다.

“클래식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많았지만, 대중음악은 드물었거든요. 게다가 국내에서는 처음이고. 음반이 나왔을 때 정말 뿌듯했어요.”

얼마 전 하모니카 단독 콘서트를 연 것 또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물놀이를 시작으로 음악의 세계에 빠져
비포장 길을 걸어가다 차 소리에 놀라서 개천에 빠진 일, 버스에 못 타게 하는 운전기사와 싸움을 벌였던 일 등. 여느 그는 시각장애인처럼 ‘투쟁하면서 살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열병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전제덕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우연히 접한 사물놀이였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죠. 인천 혜광학교 다닐 때 역사 선생님이 사물을 가르치셨어요. 사물을 잘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제 인생을 달라지게 만든 거죠. 수업이 끝나면 매일 5~6시간씩 연습만 했어요. 당시에는 사물놀이 테이프도 구하기 힘들어서 서울과 인천을 이 잡듯이 뒤져 친구들하고 복사해서 들었어요. 언제부턴가 사물놀이가 제 인생이 되었죠.”

그의 말대로 사물놀이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다. ‘수업 반, 공연 반’이라고 할 정도로, 그가 속한 사물놀이패는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88년에는 국악관현악단과 사물놀이 협연을 했고, 1989년에는 세계사물놀이대회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심사를 본 김덕수씨와 맺은 인연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1993년에는 드디어 세계사물놀이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전제덕은 그 대회에서 MVP로 뽑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사물놀이를 만난 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다른 장애인들이 힘든 현실에서 주저앉았을 때, 그는 사람들과 무대에서 만나며 힘을 키워갔다. 음악은 그에게 세상을 보게 하는 ‘희망의 빛’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김덕수씨다. 1996년 김덕수씨가 운영하는 난장뮤직에 들어가면서 그는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만난 이들과 연주를 같이 하면서 차근차근 실력도 많이 쌓았다. 하모니카 음반이 나올 수 있게 해준 이주엽 사장도 그가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음악은 저에게 희망이고, 삶의 원동력이에요.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제가 음악을 하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남들처럼 먹고살려면 안마사 공부를 해야 하는데, 왜 안 하느냐고 나무라시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음악 때문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전제덕은 요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3월 19~20일 열렸던 생애 첫 콘서트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아서, 콘서트 일정이 계속 잡혀 있기 때문이다. 광주, 부산, 대구,  대전, 부천 등에서 5월 초까지 콘서트가 계속될 예정이다. 그리고 6월에는 그의 공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앙코르 공연이 계획되어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jeduk.co.kr)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잠깐 동안이나마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에게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 뮤지션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바로 운전이다.

“동생에게 운전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동생 차를 잠깐 몰아본 적이 있어요. 시동도 꺼 먹고, 동생한테 잔소리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조수석에 있을 때랑 운전을 할 때 체감 속도가 무척 다르던데요. 재미있었어요. 눈이 보이면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운전이에요.(웃음)”

누구도 그가 뮤지션으로 우뚝 설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것도 자신만의 힘으로 해냈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한다. 그가 꼭 해보고 싶다는 운전은 불가능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하모니카로 감동시키는 ‘감동 드라이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전제덕이라는 이름 앞에는 이제 시각장애인이 아닌 ‘뮤지션’이라는 수식어가 훨씬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