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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大統領

박연서원 2023. 3. 29. 09:11

박정희, M16...그리고 심슨의 뇌물

"故 박정희 대통령의 뇌물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랑!

글 : 데이빗 심슨(美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국제담당 중역)​

"1960년대초 어느 해 여름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해는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나는 한국의 청와대를 방문하여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 대통령이 계신 집무실로 바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비서관이 열어주는 대통령 집무실 안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이 놀랄 만큼 크게 의심케 만들었다.

대통령 집무실엔 커다란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 속에서,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볼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나는 내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궁 집무실 내에서 무더운 여름을,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부채 하나로 이겨내고 있던 한국의 대통령을 보게 된 것이다.

아무리 빈국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그렇게 여름날 부채질을 하면서 나랏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심 놀라워하고 있던 그 순간! 박정희 대통령이 일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내가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상상했던 나의 모순이 순식간에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벽에 걸린 양복 저고리를 막 걸치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박 대통령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社에서 오신 국제담당 데이빗 심슨氏가 각하를 면담하러 왔습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박대통령께 정중한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이리로 앉으시오."

한국에서 느껴보는 한여름날의 무더위 때문인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긴장할 때는 넥타이로 손이 가는 버릇이 있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손님이 오는 걸 깜박했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집무실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충분하오. 이 순간에도 우리 국민들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논밭일을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나야 고생하는 우리 국민들에 비하면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이라도 에어컨을 좀 트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미국 조야에서 나도는, 한국의 박 대통령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국민들로부터 독재자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솔선수범하는 한 나라의 영도자라는 그 정평....,

나는 지금 그 소문을 대통령 집무실에서 직접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켜지 않고 나랏일 보는 대통령, 그러면서도 국민들이 논밭일을 하면서 흘리는 땀방울을 먼저 생각하는 박 대통령!

나는 지금까지 만나봐왔던 세계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통령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외모와는 달리 그가 한없이 큰 거인 대통령임을 나는 가슴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각하.."

이윽고 비서관이 나를 위해 에어컨을 작동하고서야, 비로소 나는 박 대통령과 한국군의 총기구매에 관한 업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박대통령께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더글라스社의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이 결정이 한국군의 현대화와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회사에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100만 달러 수표가 든 두툼한 봉투를 박 대통령 앞에 불쑥 내밀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게 무엇이오?"하면서 그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100만 달러라...이 돈은 내 봉급으로는 3대를 걸쳐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방문내내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인상에서, 비로소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는, 역시 박대통령도 내가 만나본 다른나라 후진국의 대통령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런 대통령임을 알고, 내심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감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웬지모를 존경심과, 경이롭기까지 했던 내 느낌에 순간적으로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내 말에 잠시 웃음인지 모를 그런 표정을 지으시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적막이 흐른 후 박 대통령은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심슨 선생!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내게 주는 것 맞소?"

"각하, 맞습니다."

"그래요 그럼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러고는 박 대통령은 내가 준 수표가 든 돈봉투를 나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리고 내게 되돌려준 봉투를 보면서, 의아해 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다시 말했다.​

"자! 이제 이 돈 100만달러는 내 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가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인 더글라스社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값어치만큼 M16 소총을 더 갖다 주시오!"

"나는 돈보다는 총으로 더 받았으면 하오, 심슨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박정희 대통령은 뜻밖에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왠지모를 내 생각의 부끄러움과 나의 작아짐, 그리고 한없이 크게 보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는 그냥 그의 명령에 조아리는 신하가 된 느낌이었지만,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에 몸을 떨어야 했다.​

"심슨, 당신이 내게 준 이 돈 100만 달러는, 내 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 월남전선에서, 조국의 부름을 받아,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인 대통령이,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사용할 수가 있겠소.

그러니 이 돈은 다시 가져가고, 대신 이 돈만큼의 M16 소총을 우리나라에 가져다 주시오!"​

나는 박 대통령의 신하가 된 기분으로 한없는 감동을 받아, 미국 더글라스社의 국제담당 중역으로서 처음으로 보람을 느꼈고, 큰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귀국하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감동 받은 이야기들을 소상하게 보고하였고, 그 이야기는 미국 언론과 조야에 널리 퍼져 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당부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 값어치의 소총을 한국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그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미소 띤 순수한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집안의 부모님 같은 그런 인자한 한 아버지의 웃음을...​

그렇게 박 대통령 그에게는, 자국의 국민들이 곧 바로 자신의 자식들이요 형제들이라는 인식을 나에게 가르쳐 줬다.

내가 집무실을 나올 때 다시 양복 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큰 거인!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배웅하는 청와대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청와대 경내를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한국은 머잖아 위대한 대통령으로 인해,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감동을 받고 또 존경심을 느껴본 대통령은 없었다.​

이후 나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미국내에서 친한파로 자리매김이 되어졌고, 나 또한 박정희 대통령 전도사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끝).​

미국 더글라스 맥도날드(MD)社

국제담당 중역/ 데이빗 심슨 올림

 

 

'박정희 前 대통령의 눈물' 큰 반향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 1964년 12월 10일 독일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독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앞에 두고 박 대통령 내외는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왼쪽은 당시 함보른 광산 사장. /유재천씨 제공 [조선일보]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의의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우리 국민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였였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


🔹️앨빈 토플러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난 후에 가능하다.
이런 인물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세계가 본받고 싶어하는 모델이다."

🔹️헨리 키신저
"20세기 혁명가들 5인 중 경제발전이라는 기적을 이룩한 사람은 오직 박정희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산업화를 통해 민주화의 토대를 다진 인물이라서 존경한다."

🔹️아이젠 하워 대통령
"박정희가 없었다면 공산주의의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폴 케네디
"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을 불과 20년 만에 세계 정상급 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후진타오
"나는 새마을 운동을 많이 연구했다. 상당수 중국 국민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등소평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아시아의 4마리 용중 박정희를 특히 주목하라."

🔹️마하티르와 훈센
"박정희대통령을 최고로 존경한다."

🔹️김정일
"예전에 유신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박정희는 새마울 운동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지 않았는가?
서울을 보라.
서울은 도쿄보다 나은 민족의 자산이다." --- 정주영과 대화 중

🔹️푸틴
"박정희에 관한 책은 어떤 책이라도 다 가져오라. 그는 나의 모델이다."
가스프롬 등 주요 에너지 기업과 전략 사업의 국영화를 통한 경제 개발 방식도 "박정희식 모델"을 답습한 것이라는 평가.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박정희 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쫓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오직 일만 하고 평가는 훗날 역사에 맡겼던 박정희를 존경한다.
한국을 번영시키겠다는 박정희의 강한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받친 리더였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
"박정희 집권 당시 율곡 사업에 관련됐던 공무원들은 놀랄 정도로 청렴했고, 박정희의 청렴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브루스 커밍 박사
"유신 후 한국은 종합적인 산업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것은 위대한 성공(a grand success)이자, 한국의 독립 선언이었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들과 달리 부패하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교 비교정치학 과목
논문과 책으로 출판.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고속도로, 조선소도 없는 나라에서 선박, 원자력 기술 등
이미 50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하버드대학교 비교정치학 과목 중에서

🔹️피터 드러커 미국 사회학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을 탄생한 대한민국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정치 지도자들 중 내가 진심으로 존경한 사람은
박대통령뿐이다.
그분의 사명감, 추진력, 그리고
치밀함은 비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버트 험프리 미국 부통령
"박정희대통령은 적어도 한국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
경제발전과 부정부패 차단을 동시에 하기 위해서는
박대통령식 모델이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박정희 같은 지도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자 37대 부통령을 지낸 린든 존슨.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이를테면 날개를 달고 승천하려는
호랑이가 날개를 잘린 것 같은...."

🔹️미국 뉴욕타임즈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독일 국정교과서
"남한은 세계경제로 통합되었다.
대통령 박정희(1961~19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능력을 가진 국가로 만들었다.
수도 서울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독일 국정교과서(중학교 지리 109)

🔹️허만 미국 연구소장
허만은 싱가폴 총리에게
"당신은 한국의 박정희를 만나봐야 할 것같다.
내가 만나보니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듣고 싱가폴 총리는 박정희대통령을 만나 후에
"아시아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박정희를 꼽고 싶다.
그는 오직 일만 하였으며 평가를 바라지 않았다."

🔹️오버홀트 미대통령 수석비서관
"박정희는 한국 민주주의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박정희는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을 산출했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로런스 헨리 서머스
미국 재무장관이자 하버드대 총장.
"박정희의 한국은 불과 한 세대 안에 가난을 극복하고
세계유수의 산업국가 반열에 올랐다.
20세기를 틀어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였다."


박정희 최후 만찬장
趙甲濟


심수봉과 신재순의 증언이 김재규의 범죄를 소상히 밝혔다. 만약 심수봉과 신재순이 그날 그곳에 없었다면 온갖 조작과 허위가 난무했을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었던 두 여인에 의해 역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보존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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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최후 만찬장에서 심수봉은 '그때 그 사람'을 불렀을까?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세 사람에게 내가 집요하게 물었던 것은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입은 상태에서 ‘난 괜찮아’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였다.

어제 MBN의 '불타는 트롯맨'의 심사위원으로 심수봉씨가 출연했다. 가수들이 심수봉의 불후의 명곡 '그때 그사람' '비나리' '백만송이장미'를 불렀고 심씨도 자작곡을 불렀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인 10.26 때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하여 사살되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손바닥으로 박정희의 등에서 샘솟듯하는 피를 막았던, 그야말로 레전드가 된 68세 가수의 시간이었다.

심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엔 뭔가 '그때 그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30여년 전 인터뷰했을 때도 그랬지만 어제도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난장판을 겪고도 심리적 안정을 유지해온 것이 고맙게도 생각되었다.
심수봉 씨의 노래 가사는 자전적인 분위기이면서 문학적이다.

나는 박정희의 마지막 만찬장에 있었던 생존자 3명, 즉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 신재순, 심수봉 세 사람을 다 만나서 거의 초단위로 역사적 순간들을 재구성한 적이 있다.
김계원 씨가 작고했으니 이젠 두 여인만 남았다. 박정희의 최후의 순간을 정확히 증언해주는 두 여인의 존재는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沈, 申 두 증인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고 객관적이다.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세 사람에게 내가 집요하게 물었던 것은 "박정희가 가슴 관통상을 입은 상태에서 '난 괜찮아'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였다.
세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피하게"란 뜻이었다.
박정희 세대는 '난 괜찮아'를 입에 달고 다녔다. 특히 신재순 씨의 증언이 세부적이었는데 술안주의 위치까지 기억했다.

그녀는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名言을 남겼다.
"체념한 듯 해탈한 듯했습니다."

참고로 심수봉 씨에 대한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검찰관 대위 차한섭 작성 1979년 11월18일자 참고인 진술조서가 있어 소개한다.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불려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문: 진술인의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에 대해 진술하시요.
답: 1978.9.9. MBC 78대학가요제에서 본인의 가요 ‘그때 그 사람’이 힛트를 하게 되여 1979.6월부터 정식으로 가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1979.10.26. 저녁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식당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 진술하시요.
답: 1979.10.26. 본인은 집에 있는데 16:30경 며칠 전 만난 적이 있는 박선호씨로부터 전화가 와서 17:30까지 내자호텔에서 좀 만나자고 하여 당시 본인은 그날 저녁 쇼쇼쇼 프로 스케줄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였더니 그것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하기에 본인은 연예인들 공연이 있는 줄 알고 흑석동에서 기타를 사가지고 약속시간 보다 조금 늦게 내자호텔로 갔더니 입구의 차에 박선호가 있어 동승하고 있던 신재순과 함께 궁정동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문: 그날 궁정동에 도착하여 연회석상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경위에 대해 진술하시요.
답: 궁정동에 도착한 시간이 18:00가 조금 지난 때였었는데 처음 들어간 곳이 대통령경호관 대기실 이었으며 그곳에는 평소 지면이 있던 안재송씨와 또 한 분(나중에 알고보니 정인형 처장이었음)이 계셨으며, 그곳에서 박과장에게 보안각서를 제출하였고 그곳에서 TV를 보다가 잠시 후 부속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중 어떤 분(남효주)이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여 18:40경 각하가 계신 연회석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중앙에 탁자가 놓여 있고 방안쪽 중앙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앉아 있었고 본인은 각하 좌측에 신재순은 우측에 앉았으며 본인 앞쪽에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앉아 있었으며 신재순이 앞에는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앉아 있었으며 김재규와 신재순 사이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문: 연회석상에 들어가기 전에 대기실에 있는 동안 연회석상의 얘기가 듣기지는 않았어요.
답: 간혹 대기실 문이 열리고 할 때 들려오는 소리는 차지철과 김재규가 상호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 연회석상에서 김재규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할 때 까지의 경위에 대해 아는 바를 진술하시요.
답: 연회석상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소개 인사등이 있었고 그리고 19:00경이 되려고 하니 각하께서 자꾸 시계를 쳐다 보시니까 차실장이 “시간이 되면 TV를 켜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얼마 뒤 차실장이 자동스윗치로 TV를 켜 7시 KBS 뉴스를 시청하였는데 그때 삽교천 제방 준공식 장면 등을 보았고 다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미 대사가 만난다는 뉴스를 보시고는 각하께서
“총재도 아닌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으며, 그러다가 김재규 부장에게 각하께서 '깡패들 사진만 말고 진짜 사진을 좀 보여달라'고 하자 김재규는 '예' 하고 답변 하였습니다.
이때 각하께서 우리 노래나 한 곡씩 들어보자고 하시면서 저를 쳐다보기에 본인은 대기실로 가서 기타를 가지고 와 본인은 ‘그때 그 사람’을 부르고 앵콜곡으로 ‘두만강’을 불렀으며 다음 차 실장을 지명하니 차 실장이 ‘도라지’와 ‘나그네 설움’이란 두 곡을 불렀는데 ‘도라지’를 부를 때인가 누군가가 와서는 김재규 부장에게 귀속말로 “과장님이 좀 뵙자고 합니다”라고 하니까 김재규는 곧 밖으로 나가고 차 실장의 노래가 끝난 후 신재순에게 지명이 되어 신양이 ‘사랑해’를 부르려고 본인이 반주를 하는데 김재규가 들어와 앉자마자 앉은 자세로 차 실장을 향하여 이 건방진 놈 하면서 총을 한 발 쏘았고 바로 일어나서 각하를 향하여 1발을 쏘았습니다.

문: 그날 연회석상의 분위기는 어떠하였는가요.
답: 별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으나 김재규와 김계원은 계속 침울한 것 같았고 오히려 각하께서 분위기를 조정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문: 연회석상에 들어간 후 김재규가 자리를 몇 번이나 비웠나요.
답: 처음에 연회석상에 본인과 신재순을 남겨두고 전원이 잠시 나갈 때 나갔었고(그때가 언제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차실장이 도라지를 부를 때 한 번 나갔습니다.

문: 처음 김재규가 차 실장을 향하여 1발을 쏘았을 때 차 실장이 어디에 맞았으며 차 실장의 행동은 어떠하였나요.
답: 그 당시 차 실장이 손목에 맞은 것을 보았고 차 실장은 화장실로 갔다가 손의 피를 씻고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태도로 보아서는 차 실장은 김재규가 자기를 사살하려고는 생각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문: 그 당시 김계원 실장의 행동은 어떠하였는가요.
답: 김재규가 차 실장을 향해 총을 쏘았을 때 김계원은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문: 김재규가 차 실장을 향해 총을 쏠 때 각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요.
답: 각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김재규가 각하를 향해 1발을 쏜 것입니다.

문: 차지철을 향해 1발을 쏠때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각하 앞에서 왜 이러느냐고 만류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김계원은 김재규가 차 실장을 향해 총을 쏘자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 각하께서 1발을 맞았을 때 진술인은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차 실장이 화장실을 갔다 나오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각하께서는 나는 괜찮아라고 하셨는데 본인이 옆에서 보니 호흡이 이상한 것 같아 "괜찮으시냐"고 다시 물으니 "괜찮다"고 하셨는 데 곧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문: 각하께서 1발을 맞을 때 진술인은 계속하여 각하 옆에 있었나요.
답: 본인은 차 실장이 1발을 맞고 화장실로 들어갈 때 옆에 있는 기타를 치우려고 일어서 있는데 김재규가 각하를 향해 1발을 쏘았는데 각하께서는 본인이 앉았던 쪽으로 쓰러지기에 본인이 가서 부축을 하고 각하를 바로 세웠습니다.

문: 그후 김재규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각하에게 1발을 쏘고 나갈 때까지의 경위에 대해 진술하시오.
답: 김재규가 차 실장과 대통령 각하에게 각 1발씩을 쏘고 난 뒤에 김재규는 머뭇거리며 다시 총을 장전하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전깃불이 나갔으며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을 때는 불이 들어왔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석 입구에서 문갑을 잡고 피하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총을 쏘았고 그리고는 탁자를 돌아서 꾸부리고 있는 각하 곁으로 와서 각하의 머리를 향해 또 1발을 발사하였는데 본인은 총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부속실로 도망을 갔습니다.


문: 두 번째 김재규가 총을 쏘러 들어왔을 때 진술인과 신재순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답: 본인은 각하 좌측에서 신재순은 각하 등쪽에서 피를 막고 있었습니다.

문: 두 번째 들어오는 김재규를 분명히 보았는가요.
답: 예. 차 실장을 쏘고 각하 곁으로 왔을 때 김재규와는 눈이 한번 마주치기까지 했습니다.

문: 대기실 옆의 부속실로 들어가서 귀가할 때까지의 경위에 대해 진술하시요.
답: 본인이 부속실로 도망을 와 있는데 조금 후에 신재순이도 들어 왔으며, 그리고 얼마 뒤 바로 옆 대기실 입구에서 총성이 들리더니 계속해서 총소리가 몇 발 들렸으며, 그러다가 조용해지자 본인들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대기실에 두었던 핸드백을 가져오라고 하였더니 신양이 들어가서 핸드백을 가져왔는데 본인도 한 사람이 그곳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신양이 두 명이 쓰러져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얼마간인가 둘이서 계속 대기하는데 남효주가 와서는 빨리 나오라고 하여 둘이서 함께 앞건물의 경비원 대기실 방으로 갔습니다. 그때가 22:30경 이었는데 그곳에서 손을 씻기도 하고 그곳에 계속 기다리다가 남효주가 23:30경 본인과 신양을 내자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고 본인은 그곳에서 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문: 부속실에서 있는 동안 바깥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없나요.
답: 경비원 대기실 부근에서 누가 “다 죽였어”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으나 그외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문: 경비원 대기실 방으로 가서 무슨얘기를 들은 것은 없나요.
답: 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 가서 TV를 켜니 금주의 인기가요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 두번째 김재규가 각하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고난 뒤 차지철은 즉사하였나요.
답: 아닌 것 같습니다. 도망와 부속실에 있는데도 계속해서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문: 각하께서 2번째 총을 맞고 난 뒤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나요.
답: 부속실로 도망와 있는데 연회석 쪽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각하에게 묻는 것 같았으며 그러더니 각하 빨리 모셔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문: 더 진술할 것이 있나요.
답: 없습니다.

문: 이상 진술은 사실과 틀림이 없나요.
답: 예 모두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서기 1979년 11월18일
진술인 성명 沈玟卿(沈守峰)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검찰관 대위 차한섭
검찰서기 상사 이승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