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퍼셀 / 메리 여왕의 장송을 위한 음악

박연서원 2016. 3. 15. 20:20

Music for the funeral of Queen Mary Z. 860

퍼셀 / 메리 여왕의 장송을 위한 음악

Henry Purcell, 1659-1695

 

 

Full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1. Funeral March 장송 행진곡 (02'08)

 


1. Funeral March 장송 행진곡 (02'08)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2. Man that is born of woman 남자로 태어났고 (02'21)

 

2. Man that is born of woman 남자로 태어났고 (02'21)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3. In the midst of life 생의 한 중간에서 (03'40)

 

3. In the midst of life 생의 한 중간에서 (03'40)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4. Canzona 칸쪼네 (02'24)

 

4. Canzona 칸쪼네 (02'24)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5. Thou knowest, Lord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아는 주님 (02'51)

 

5. Thou knowest, Lord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아는 주님 (02'51)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6. Funeral March 장송 행진곡 (01'17)

Baroque Brass of London

Mark Benett, flatt trumpet

Crispian Steele-Perkins, flatt trumpet

Michael Laird, slide trumpet

Ron Bryans, sackbut

Robert Howes, drum

 

6. Funeral March 장송 행진곡 (01'17)

Timothy Brown, cond.

Clare College Choir, Cambridge

 

이 음악은 1694년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메리 여왕의 장례식(1695년 3월)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퍼어셀도 그 해 세상을 떠났다. 영국 국교 성공회에서 쓰이는 3가지 매장 식문  남자로 태어났고, 생의 한 중간에서,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아는 주님 사이에 금관 악기에 의한 칸쪼네를 삽입하고 처음과 끝엔 장송 행진곡을 덧붙인 작품인데 이것은 음악학자 더스턴 다트의 편집에 따른 것이다.
엘리자베드 여왕과 제임스 1세의 치세 때 이룩된 영국 음악의 황금 시대는 1625년경 주요 작곡가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 청교도 혁명과 공화정 시대엔 음악도 침체되었으나 17세기 후반 퍼셀에 의해 영국 음악은 또한번 소생의 꽃을 피우게 된다. 어린 시절 왕실 예배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출발한 그는 왕실의 상임 작곡가,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오르가니스트가 되면서 영국 음악계의 총아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그 시대의 작곡 양식의 기반 위에 넘치는 창작력으로 모든 장르의 음악에 걸쳐 방대한 양의 작품을 썼다.   판타지아, 트리오 소나타, 모음곡 등 기악 음악,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나 요정의 여왕을 비롯한 극음악, 또 앤덤, 송가, 가곡, 칸타타 등 다양한 성악곡을 작곡했다.
이중엔 폴리포니를 사용한 풍부한 악상에 판타직한 내용이 담겨진 곡이 많다.
생의 절정기인 36세로 요절한 그는 유복한 환경을 제외하면 같은 나이에 죽은 모짜르트와 닮은 점이 많다. 그의 죽음으로 영국 음악은 다시 긴 침묵의 세월을 맞게 된다.

 

March, Man that is Born of a Woman, In the Midst of Life and Canzona.

 

Man that is born of a woman
hath but a short time to live, and is full of misery.
He cometh up, and is cut down like a flow'r.
He flee'th as it were a shadow,
and ne'er continueth in one stay.

In the midst of life we are in death:
of whom may we seek for succour,
but of thee, O Lord, who for our sins art justly displeased?
Yet, O Lord God most holy, O Lord most mighty,
O holy and most merciful Saviour,
deliver us not into the bitter pains of eternal death.

 

Baroque Brass of London

Mark Benett, flatt trumpet

Crispian Steele-Perkins, flatt trumpet

Michael Laird, slide trumpet

Ron Bryans, sackbut

Robert Howes, drum

 

Sir Simon Rattle, cond. / Berliner Philharmoniker

Hans-Christoph Rademann, chorus master / RIAS Kammerchor

 

Soloists:
Céline Scheen • Hana Blazikova
Alice Foccroulle • Pascal Bertin
Jean-Christophe Clair • Jean-Michel Fumas
Phillipe Froeliger • Thibault Lenaerts
Renaud Tripathi • Jean-Claude Sarragosse
Lionel Meunier • Malcolm Bothwell
Jean Tubéry, cond.

Ensemble La Fenice

 

Song for Two Sopranos & Continuo Z. 504

Harry Christophers, dir.(cond.)

The Sixteen (Orchestra & Choir)

 

Henry Purcell, 1659.9.10-1695.11.21

 

헨델이 영국에서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영국에는 작곡가 퍼셀이 있었다.

그의 수많은 앤섬(종교 합창곡)은 언어가 가진 정서를 매혹적인 멜로디를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비올 환상곡이나 트리오 소나타 분야에서도 당대에 필적할 만한 작곡가를 찾기 힘들었다.

 

모짜르트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음악가였던 퍼셀은 거의 모든 장르에 손을 대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다양성과 타고난 풍부한 영감은 그가 생존하던 세기의 갖가지 가능성의 최상의 부분을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퍼셀의 천재성에의 선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영국 음악은 다양한 길을 걸어왔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것을 택하지도 않으면서 그러한 길을 철저히 구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퍼셀의 작곡가로서의 큰 가치가 인정된다.

 

퍼셀은 이탈리아 악파의 흐름을 이어받은 근대 작곡가였으나, 모든 발견의 배후에는 스스로를 형성해온 민족적, 대위법적 전통을 항상 상기하여 새로운 음악의 이름 아래 전통을 부정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의 청중에게 미치는 매력은 다음의 두 가지 음악관 사이에 애매하고 확실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퍼셀은 성악곡, 기악곡을 불문하고, 또한 종교곡, 세속곡을 불문하고 자신의 음악에 독특한 세 개의 구성 요소를 훌륭하게 통합하여 유럽의 역사상 필적할 것이 없는 하나의 종합으로 멋지게 마무리해냈다.

성악곡(및 합창곡) 분야에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속되어 있던 퍼셀은 물론 예배용 작품을 많이 작곡했다. 웨스트민스터를 위해서이든 채플 로열을 위해서이든, 그의 앤덤 그 자체는 엘리자베스조와 제임스 1세 시대의 빛나는 전통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퍼셀의 선율적, 운율적 재능은 그 조바꿈의 센스와 심리적 천재성의 증거인 조성관계에 대한 직관과 아울러 디도와 에네아스를 크게 특징지우고 있다.

버려졌던 카르타고의 여왕 이야기를 통하여 여기에서 무대화되고 있는 것은 몬테베르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대극장인 것이다. 불가사의와 환상의 음악가 퍼셀은 이 전설에 맥베드에서 직접 유래하는 마녀들의 음산한 장면을 다루었다.

그의 영감은 완벽하게 시의 운율상의 요구와 합치되고 있다.

리듬을 다루는 데 탁월했던 퍼셀은 매우 자유롭게 합창과 춤을 다루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사실에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퍼셀의 전작품을 통하여 자기 나라 전래의 민속무용, 특히 17세기 말에 크게 인기가 있던 혼 파이프가 곁들여진 불규칙한 운율의 가능성에 매우 매료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선명하게 묘사된 디돈의 인간상은 몬테베르디의 아리안에서 베르크의 룰루에 이르는 오페라사(史)에 반짝이는 별처럼 많은 대여주인공들과 한 자리에 놓일 수 있으며, 그 최후의 탄식은 음악이 표현한 것 중에서도 가장 비통한 신음소리의 하나이다.

뒤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독창적인 오페라의 시도가 런던에서는 실패로 끝나자 퍼셀은 부수음악, 세미 오페라, 마스크는 배제했고 더이상 극장용 작품은 작곡하지 않았다.

 

이러한 혁신성은 만년의 세미 오페라나 마스크뿐만 아니라 가곡을 만드는 법이나 관현악 서법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관현악법은 18세기 거장 중의 한 사람, 가령 텔레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참신했는데, 퍼셀 쪽이 더 재능이 뛰어났었다.

그밖의 두드러진 특색과 아울러 퍼셀의 특징이 되고 있는 것은 매우 생기에 찬 억양감(抑揚感)이다.

 

이것이야말로 퍼셀을 몬테베르디나 모짜르트와 맞먹는 음악극 작곡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작곡가였던 그는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엄격한 이상 및 확실한 연극적 직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청춘의 숨결이 넘치는 작품의 약동 속에서도, 비수(悲愁)나 비탄(悲嘆)과 마찬가지로 기쁨 속에서도, 그 어떤 막연한 환상처럼 고뇌 속에도 그 모습을 나타내어 우리들 마음 속에 직접 와닿는 위대한 작곡가라는 것을 현대인들은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퍼셀의 생애

 

왕실 예배당의 젠틀맨이며 웨스트민스터의 성가대장이었던 동명의 아버지 헨리 퍼셀의 3형제 가운데 둘째로 1659년 9월 10일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으며 막내 다니엘 퍼셀도 많은 작품을 남긴 음악가이다.

퍼셀은 직업음악가로서 매우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삼촌 토마스 페셀도 헨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정 교회(Chapel Royal)에서 고위직에 있었던바, 그를 그곳의 합창단에 입단케하여 어린이 합창단의 수장이었던 헨리 쿠크(Henry  Cooke)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으며, 후에는 헨리쿠크의 후계자이었던 펠헴 험프레이 (Pelham Humfrey)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1669년 왕실교회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성가대장 쿠크와 P.험프리에게 유럽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배웠다.

유명한 쿠크 악장, 이어서 펠햄 험프리 악장이 이끄는 찰스 2세의 예배당에 어려서부터 참가가 허용되었으며 1670년에는 이미 국왕의 탄생일을 위하여 오드를 작곡했다.

 

1673년 변성기로 성가대를 떠나 왕실 악기조율사 조수로 있다가 이듬해 그는 왕실 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및 관리자 겸 조율사였던 존 힌제스턴 (John Hingeston)의 문하에서 수업을 마쳤다.

존 블로우가 험프리의 뒤를 이어 찰스 2세의 악장이 되는 한편, 1677년 M.록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약관 18세의 나이로 왕실 현악합주단 상임작곡가가 되어 가곡과 판타지아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들은 전통적 대위법을 구사하여 16세기말~17세기 영국 최대의 환타지아 명작으로 꼽힌다.

 

1679년 J.블로우에 이어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이 지위는 상당한 것인데, 그는 당시 정규적인 급료 이외에 교회 부근에 사택을 제공받기도 했다.

1680년 씌어진 멋진 판타지아와 인 노미네 외에, 극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찰스2세의 런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가와 <테오도시우스>를 작곡하였다.

1681년에 그는 프란시스 (Frances)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여성의 출신성분은 확실치 않지만 열의에 찬 이해심이 많은 반려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 결혼으로 퍼셀은 6명의 자녀를 얻었으나 성장한 것은 둘뿐이었다.

 

1683년에 힌제스턴이 죽자 그가 이 직책을 계승 받았으며 같은 해에 3성의 소나타를 작곡한다.

이 악보의 서문에서 작곡자는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거장들의 충실한 모방을 시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름만은 인용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코렐리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작풍(作風)의, 특히 선율적인 착상과 매력을 도입하면서도 퍼셀은 국민적, 영국적 작곡가로서의 독자적인 작풍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특히 자유롭고 활달한 기악어법(器樂語法)은 퍼셀 특유의 것이며 코렐리풍의 3성 소나타의 고전주의적 균형감과 비교했을 때 그 생생한 멜로디 라인에 놀라게 된다.

 

1688년 제임스 2세가 추방되자 퍼셀은 곧 새로운 왕조에 공손한 뜻을 표하기 위해 기욤 드 나소(윌리엄 3세)와 그의 아내 메리의 대관식 음악을 작곡했다.

같은 시기에 친구가 경영하는 첼시 여학교를 위해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를 작곡하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영국 오페라의 대표작이 된다.

존 블로우의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퍼셀의 극적인 어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륄리와 서정비극에 약간의 형식적 차용이 있다고는 해도 그 감정 표출에는 후대의 가장 위대한 작품군만이 비견될 수 있는 긴박감과 진실성이 달성되고 있다.

 

철두철미하게 가창만으로 곡이 전개되는 디도와 에네아스는 본격적인 오페라이다.

그 이후 퍼셀은 이탈리아식 오페라보다는 혼성(混成) 장르를 좋아하는 런던 사람들의 취미에 따라서 마스크 또는 노래에 의한 에피소드에 기악 반주를 수반한 스토리의 진행을 나타내는 회화가 삽입되는 세미 오페라 쪽으로 향한다.

여기에 이어 디오클레티엥(1690), 아서 왕, 또는 영국의 위인(1691), 요정의 여왕(1692), 결혼한 난봉꾼과 아테네의 타이몬(1694), 템페스트와 인도의 여왕(1695) 등의 주요 작품이 발표되었다.

 

그는 존 블로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일했었는데, 그는 이 직책을 얻음으로써 안정된 급료와 성앤스가에 있는 임대주택을 제공받게 되었으나, 1695년 11월 21일에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악성 감기인지 또는 결핵인지), 확실한 것은 과로가 이미 쇠약해진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그들은 퍼셀이 너무 일에 시달렸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장엄한 장례식에 참석하여 경의를 표했다.

 

장례식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메리 여왕의 장례를 위해 그가 작곡한 몇 개의 앤덤이 연주되었다. 유해는 파이프 오르간 아래에 있는 사원의 북쪽측랑에 묻혔고 그가 묻힌 자리에는 그의 이름을 새긴 대리석 명패가 붙어 있는데, 이 곳에는 그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 퍼셀의 주요 작품

 

처음에는 궁정작곡가, 왕실예배당 오르가니스트 등으로 활약하면서 다수의 교회음악과 기악곡을 남겼으며, 퍼셀은 6개의 극음악, 43개의 부수음악, 앤섬을 비롯하여 110곡의 종교성악곡, 기타 세속 독창곡, 합창곡, 트리오 소나타, 건반악기 작품 등 그 시대 음악의 모든 부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오페라 <디도와 아에네아스:1689>, 세미오페라 <아서왕:1692>, <요정의 여왕:1692>, <인도의 여왕>을 비롯하여 찬가 <찬양하라 빛나는 세실리아:1692>, <오라, 너 예술의 아들이여:1694>, <메리여왕의 장송음악:1695> 등은 현재에도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그 작품들은 기수(奇數)의 소절(小節)로 이루어진 주제(主題), 불규칙한 프레징, 박자와 리듬의 충돌 등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것들로서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의 영국음악은 그의 창작에 의하여 비로소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는 영국의 헨리 퍼셀이 작곡한 오페라이다.

트로이가 멸망한 이후의 카르타고를 배경으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트로이의 장군인 에네아스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 퍼셀의 연표

 

1659년 9월 10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출생.
1668년(09세)  작곡 시작.

1669년(10세)  왕실교회 소년성가대에 들어감.

                    성가대장 쿠크와 P.험프리에게 유럽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배움.
1670년(11세)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드> 작곡.
1673년(14세)  변성기로 성가대를 떠나 왕실 악기조율사 조수로 일함.

1674년(15세)  존 힌제스턴(John Hingeston)의 문하에서 수업을 마침.        

1677년(18세)  M.록이 사망하자 후임으로 임명.

                    왕실 현악합주단 상임 작곡가가 되어 가곡과 판타지아를 작곡.

1679년(20세)  웨스트민스터 사원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됨.
1680년(21세)  찰스2세의 런던 귀환을 축하하는 환영가와 <테오도시우스>를 작곡.

                    멋진 판타지아와 인 노미네 작곡.
1681년(22세)  프란시스(Frances)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
1683년(24세)  3권 중 최초의 곡집이 나온 현악기를 위한 3성의 소나타 작곡.

                    힌제스턴이 죽자 그가 이 직책을 계승 받음.
1685년(26세)  제임스 2세의 대관식을 위한 앤덤 <내 마음은 기쁨으로 넘치나이다> 제작.
1688년(29세)  제임스 2세가 추방.
                    기욤 드 나소(윌리엄 3세)와 그의 아내 메리의 대관식 음악을 작곡.
1689년(30세)  첼시여학교를 위해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를 작곡.

                    12월 런던에서 대표작이자 유일한 오페라인 <디도와 아이네아스> 초연.

1695년(36세)  11월 21일에 쇠약해진 건강을 더욱 악화로 사망.
                    장례식날 메리 여왕의 장례를 위해 그가 작곡한 몇 개의 앤덤이 연주됨.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그와 인연이 깊은 파이프 오르간 아래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