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말라야 Himalaya'
관람일시 : 2015년 12월 25일(금) 오후4시
관람장소 : CGV 구로 1관 (ScreenX)
동행 : 아내
저녁식사 : (활어회전문)고래사냥 (영등포 중앙지구대앞)
감상평 : 정말 감동적이다. 산꾼들의 의리, 극한 상황에서의 대처, 감성과 이성 사이의 선택,
산에 오르는 이유 등을 제시하며 시종일관 한눈을 팔지않게 만든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히말라야의 웅장한 모습 등 볼 만한 것이 많은 영화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고 몰라도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정보들! 오늘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대호> 등의 초기대작들과 맞붙어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산악 영화 <히말라야>다.
1. 8천 미터 14좌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히말라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히마’와 집을 뜻하는 ‘알라야’가 합쳐진 말로, ‘눈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서 비롯되어 히말라야 산맥을 ‘세상의 지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산맥에는 해발 고도 8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열네 곳이 있는데, 이들을 ‘14좌’라고 한다.
가장 높은 8,848m 짜리 봉우리는 ‘에베레스트’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진 ‘초모랑마’이다. 초모랑마는 티베트어로 ‘세상의 어머니 신’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높은(8,611m) 봉우리는 카람 코란 산맥의 제2봉이라는 이름의 K2이다. 칸첸중가(8,586m)는 ‘눈으로 덮인 다섯 개의 보물’, 로체(8,516m)는 초모랑마의 ‘남쪽’ 산이라는 뜻이다. 그 밖에도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7m),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바트(8,125m), 안나푸르나(8,091m), 가셔 브룸 1봉(8,068m)과 2봉(8,035m), 브로드피크(8,047m), 시샤팡마(8,027m) 등이 14좌에 포함된다.
여기에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382)까지 포함하여 16좌라고 하는데, 이들은 각각 칸첸중가와 로체의 위성봉으로, 주봉과의 높이 차이가 작아 독립된 봉우리로 보지 않는다. <히말라야>의 주인공인 엄홍길 대장은 지난 2001년,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8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2004년 얄룽캉에 성공적으로 오른 뒤, 2007년에는 네 번째 도전 만에 로체샤르 등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16좌 완등에 성공한 산악인이 되었다. 그 밖에도 에베레스트 남봉, 칸첸중가 남봉, 칸첸중가 중봉, 로체 중봉, 안나푸르나 중봉, 안나푸르나 동봉, 브로드피크 중봉, 시샤팡마 중봉 등이 8천 미터가 넘는 위성봉들이다.
2. 세상의 어머니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초모랑마는 히말라야의 최고봉, 아시아의 최고봉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초모랑마는 티베트어이고, 네팔 어로는 시가르마타(하늘의 이마)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초모랑마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주무랑마봉(珠穆朗瑪峰)이라고 한다. 에베레스트는 근대식 측량법으로 초모랑마의 높이를 측량했던 영국인 측량사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중국 정부가 2005년에 발표한 초모랑마의 높이 측량 값은 8.844.43m인데, 이는 바위의 최고점까지의 높이이고, 그 위에 덮인 얼음과 눈은 계산하지 않은 값이다. 1998년 미국 탐사대가 산꼭대기에 설치한 GPS 장비에 따르면 2008년 기준 8,850m. 해수면 기준의 높이가 아니라 산의 전체 높이를 따지면 바닥이 해수면 아래에 있는 하와이 마우나케아 산(해발 4,206m)이 10,203m로 더 높고, 지구 중심부터 따지면 지구에서 가장 불룩한 지점인 적도 인근 안데스 산맥의 침보라소 산(해발 6,268m)이 더 높다. 이 높이는 대륙붕의 이동으로 인해 1년에 5cm씩 더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3. 초모랑마 관련 기록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1924년 영국의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은 인류 최초로 초모랑마 정상 등정에 도전했다. 그들은 정상을 200여 미터 남긴 곳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으나 결국 사망했다. 이들이 등정에 성공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지금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초모랑마 등정에 최초로 성공한 사람은 1953년 5월 29일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찍은 사진의 주인공은 힐러리가 아닌 텐징이었다. 텐징이 카메라를 다뤄본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1977년 9월 5일 고상돈이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다. 이때 베이스캠프와의 무전을 통해 남긴 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이로써 한국은 여덟 번째 초모랑마 등정국이 되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말라야의 14좌 중에서는 등정 난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찾는 사람이 많다. 장비가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90년대 이전에는 10명이 도전하면 그중 4명 정도가 사망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1990년 이후로는 기상 예측 기술과 등반 장비가 발전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오는 상업 등반대가 늘어나 등반 중 사망률이 7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2014년 2월까지 4,042명이 6,871회 초모랑마 정상을 밟았다고 한다.
4. 박무택과 백준호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2004년 5월.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초모랑마 등정에 나섰다. 등반대장 박무택과 후배 장민은 5월 18일에 초모랑마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중 겨우 100m 정도를 내려오다가 조난했다. 박무택은 설맹으로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장민은 그를 부축하다가 탈진하고 말았다. 박무택은 장민을 먼저 내려보내고 자신은 비박을 하기로 했다. 날이 저물고 날씨도 나쁜 8,750미터 고도에서 비박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녁 7시. 이 등반대의 부대장이자 박무택과 절친한 선배인 백준호는 캠프 5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구조에 나섰다. 함께 출발한 셰르파 두 명은 날이 저물고 날씨도 나빠지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10시경 다시 캠프로 하산했다. 백준호는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 결국 다음날(19일) 오후 3시에 박무택을 찾았다고 무선을 보냈다. 백준호가 베이스캠프와 무전으로 주고받은 마지막 말은 이랬다. “무택이가 밤새 무산소에 노출돼 손과 코에 동상이 심합니다. 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구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백준호에게서도 소식이 끊겼다. 20일 낮, 초모랑마를 단독 등반하던 오은선이 8750m 지점에 숨져있는 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했다. 실종됐던 백준호와 장민은 중국인 등반대에 의해 8,450m 지점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등반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심산은 동료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혼자서 눈보라를 뚫고 올라간 백준호에 대해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가라고 평가했다.
5. 휴먼원정대-1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엄홍길 대장은 16좌 중 열다섯 번째 봉우리에 도전했던 얄룽캉 등정에 막 성공한 직후에 박무택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와 박무택은 함께 칸첸중가, K2, 시샤팡마, 초모랑마를 함께 등장한 사이였다.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의 시신을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신 수습을 위한 등반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전하지 않는 초모랑마 등반, 게다가 얼어붙은 시신을 수습해서 하산해야 하는 위험한 미션으로 사람들을 모으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엄홍길의 진심은 여러 산악인에게 전해졌고, 많은 이들이 관심과 격려의 뜻을 보내왔다. 세계 등반 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8천 미터 이상 고지에서의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이었다. 언론사의 다큐멘터리 팀까지 꾸려지며 대규모 원정대가 조직될 수 있었다. 상업적 의도나 개인적 성취욕 없이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떠나는 원정대라는 의미로 ‘휴먼 원정대’라고 이름 붙인 이 원정대는 2005년 3월 히말라야로 떠났다.
이들은 4월 초에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지만, 시신 수습에 적합한 날씨를 기다리느라 일정이 계속 늦춰졌다. 8,300m 지점의 임시캠프까지 갔다가 포기하고 내려오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모두 지쳐갔다. 드디어 5월 29일, 5시간의 행군 끝에 박무택의 시신을 만날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나 걸려 얼음에서 떼어낸 박무택의 시신은 무거웠다. 엄홍길은 200kg도 넘었을 것으로 회상한다. 이 시신을 데리고 100m를 하산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눈 폭풍에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고, 예정보다 훨씬 길어진 원정과 악천후로 대원들의 체력에도 문제가 많았다. 게다가 다음 코스는 50m 높이의 절벽 구간인 ‘세컨드 스텝’이었다. 계획은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운반해 화장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강행하면 원정대의 목숨도 보장 못 할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쉽게도 절벽 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박무택을 매장해주고 내려왔다. 이날(2005년 5월 29일), 제주도에서는 한국인 최초 초모랑마 등정에 성공한 고(故) 고상돈씨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또 이날은 텐징 노르게이와 에드먼드 힐러리가 인류 최초로 초모랑마 정상에 오른 지 5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류와 초모랑마의 인연에 큰 의미가 있는 이 날 박무택은, 엄홍길 대장의 표현에 따르면, “영원한 8천 미터”가 되었다.
7. 산의 허락
이미지=영화<히말라야> ⓒCJ 엔터테인먼트
박무택은 초모랑마 정상에서 하산하던 도중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었다. 설맹(雪盲, snow blindness)은 설안염이라고도 하는데, 눈이나 빙판에 반사된 태양광을 장시간 보았을 때 망막이 손상되어 일어나는 시력 장애를 말한다. 보통 흙이나 아스팔트 등은 자외선의 90%를 흡수하고 10% 정도만 반사한다. 그런데 눈과 빙판은 무려 80%를 반사한다. 이는 여름철 자외선보다도 네 배나 높은 수치다. 게다가, 고도가 1,000m 상승할 때마다 자외선에 대한 노출 위험도는 16%씩 증가한다. 박무택이 왜 고글을 쓰고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8,850m 고도의 만년설 위에서 닥친 설맹은 결국 사망 사고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산소 결핍에 의한 고산증은 2,400m 이상만 되도 발생할 수 있는데, 8천 미터 이상에서의 산소 농도는 해수면 고도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8천 미터 고산 등반에 최적인 시기는 겨울이 끝나고 우기가 오기 전인 봄이다. 이 기간에 산 정상 부근의 기온은 섭씨 마이너스 40도, 텐트 안의 기온도 마이너스 25도라고 한다. 고산 등반은 그야말로 ‘극한’의 자연과 맞서는 것이다.
엄홍길은 16좌 완등을 하기까지 22년간 열여덟 번의 실패를 겪었고,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산이 인간에게 잠시 정상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하며, 산에 대한 경외감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품고 산다. 프랑스의 산악인이자 작가인 가스통 데뷔파는 이런 말을 했다. “히말라야는 신비의 왕국이다. 이곳에 들어가는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
영화 '히말라야' OST
창문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산울림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오늘 처럼 비가 내리면은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거에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잊혀지진 않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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