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rto Grosso, Op.1 No.2 in C minor
로카텔리 /합주 협주곡 C단조 작품1의 2번
Pietro Antonio Locat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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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dagio
II Allegro
III Largo
IV Allegro
V Allegro
Gottfried von der Goltz, cond.
Freiburger Barockorchester
Concerto Grosso, Op.1 No.11 in C minor
로카텔리 /합주 협주곡 C단조 작품1의 11번
Pietro Antonio Locat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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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argo
II Allemanda, Allegro
III Sarabanda, Largo
IV Giga, Allegro
Gottfried von der Goltz, cond.
Freiburger Barockorchester
Concerto Grosso, Op.6-4 in D major
코렐리 / 합주 협주곡 D장조 작품6-4
Arcangelo Co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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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dagio-Allegro (2'50)
II Adagio-Vivace (2'41)
III Allegro (1'09)
IV Allegro (3'15)
I Solisti di Zagrab
Pietro Antonio Locatelli (1695~1764, Italy)
베르가모 출생. 어렸을 때의 경력은 확실치 않으며 뒤에 로마에서 A.코렐리에게 배웠다고도 하고, 또 G.바렌티니에게 배웠다는 설도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베네치아 ·만토바 ·뮌헨 등지에서 이름을 날리고 1729년 이후는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연주기교는 당시 최고였으며, 특히 더블 스톱의 테크닉이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12곡의 바이올린협주곡과 그 카덴차로 씌어진 24곡의 카프리치오로 이루어진 작품집 《바이올린의 기법》외에 플루트소나타 ·트리오소나타 ·무반주소나타 그리고 《슬픈 심포니아》 등이 있다.
Arcangelo Corelli (1653.2.17~1713.1.8, Italy)
1666년 볼로냐에 있는 산페트로니오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G.벤베누티와 E.가이바라 등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로마에서 활약하였다. 1670년 17세의 나이로 유명한 볼로냐의 아카데미카 필라르모니카 회원이 되었고, 1671년 로마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산 조반니 디 피오 렌티니성당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670년대 말엽에는 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로마궁정 소속이었고, 1681년 작곡한 《트리오 소나타집 작품1》을 여왕에게 헌정하였다. 1682~1708년 로마의 성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성당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였고 이후 지휘자 및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1684~90 년 판필리 추기경의 악장이 되어 코루소궁전의 일요음악회에서 활동하였으며, 추기경의 지원아래 그의 자택에서 거주하며 작곡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1690년 예술의 후원자로 유명한 오토보니 추기경의 바이올린 수석주자와 악장으로서 교황청 추기경 주최 월요음악회에서 활동하여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1706년 목자 이름인 아르코 멜로 에리만테오의 이름으로 로마의 문예 아카데미 <아르카디아>의 입회를 허락받았다. 1710년부터 우울증이 악화되어 연주활동을 중단하고 1712년 자택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 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나타와 합주협주곡 형식을 완성한 12곡의 합주협주곡을 작곡하여 합주협주곡의 양식을 확립함으로써 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바이올린 양식에 있어서 합리적인 연주법을 확립하였는데, 특히 12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작품5》는 독주 소나타로서 새로운 길을 연 것으로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바이올린 양식의 발달에 기여했고 또 그가 작곡한 소나타 들과 합주협주곡 형식을 확립한 12곡의 합주협주곡 작품으로 유명하다. 코렐리의 어머니 산타 라피니는 코렐리가 태어나기 불과 5주 전에 남편을 잃었고 그는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게 되었다. 코렐리의 초기 교육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첫 스승은 푸시냐노 교외에 있는 마을인 산사비노의 보좌신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에 그는 파엔차와 루고로 가서 처음으로 음악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1666~67년 볼로냐에 있는 산페트로니오 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반니 벤베누티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또 다른 바이올린 연주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뇰리로부터는 보다 전문적인 것을 습득했다.
4년 동안 볼로냐에 머문후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의 처음 5년 동안 행적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아마도 토르디노나 극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1677년 독일을 여행하고 1680년에 로마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1677년 6월 3일 그는 자신의 첫 작품인 바이올린과 류트를 위한 소나타를 파엔차의 파브리치오 라데르키 백작에게 보냈다.
1675년 2월 3일 그는 이미 로마에 있는 산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제3바이올린 연주자였고 다음해 그는 제2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681년 로마에 머물렀던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틴에게 헌정한 2대의 바이올린과 첼로, 오르간 계속저음을 위한 12곡의 트리오 소나타 작품1이 출판되었다. 다음 해 그는 산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관현악단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고 1685년 2대의 바이올린, 비올로네와 첼로 또는 하프시코드를 위한 12곡의 실내 트리오 소나타 작품2가 출판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687년 9월부터 1690년 11월까지 팔라초 팜필리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중요한 음악행사를 공연하고 지휘했다. 그는 숙련된 지휘자로 근대 관현악단 지휘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에게는 특별한 음악 공연들을 기획하고 지휘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의 왕 제임스 2세의 명으로 로마에 온 영국대사를 위해 크리스틴 여왕이 후원한 공연일 것이다.
이 공연을 위해 코렐리는 150명의 현악기 연주자로 구성된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1690년 그는 조반니 룰리에르의 오라토리오 〈산타 베아트리체 데스테 Santa Beatrice d'Este〉 공연에서 33대의 바이올린, 10대의 비올라, 17대의 첼로로 구성된 대규모 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해에 그는 피에트로 오토보니 추기경에게 봉직했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689년 모데나의 공 프란체스코 2세에게 헌정한 2대의 바이올린과 아치형 류트, 오르간 계속저음을 위한 12곡의 교회 트리오 소나타 작품3이 출판되었고 1694년에는 오토보니 추기경의 아카데미를 위해 작곡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로네 또는 하프시코드를 위한 12곡의 실내 트리오 소나타 작품4가 출판되었다.
아마도 코렐리는 로마에 있는 독일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친 듯하며 1700년에는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의 연주회를 위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 겸 지휘자가 되었다. 같은 해 브란덴부르크의 소피아 샤를로테에게 헌정한 〈바이올린과 비올로네 또는 하프시코드를 위한 12곡의 소나타〉 작품5가 출판되었다.
1702년 나폴리로 가서 왕 앞에서 연주하고 이탈리아의 작곡가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작품을 공연한 듯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 자료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그가 1707~08년 로마에 머물렀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만났다는 증거도 없다. 1706년 코렐리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나르도 파스퀴니, 스카를라티와 함께 아카데미아 델 아르카디아에 들어갔으며 특별한 경우 연주회를 지휘하기도 했다. 12곡의 합주 협주곡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6은 그가 죽은 다음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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