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의 역사를 다룬 KBS 주말 대하드라마 '천추태후'가 야심차게 안방극장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
천추태후를 알기 위해서는 고려 태조 왕건에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손이 없는 왕후들도 많고 타살된 왕자들도 많이 보입니다.
혜종-정종은 호족 세력과 결혼을 했고 광종때부터는 왕족만을 왕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전반적인 고려 초기 왕들의 계보나 혼인 체계 같은 거시적인 그림이 정리된 것으로 보고
---------------------------------------------------------------------------------
왕건은 전국의 호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많이 해서 부인들이 29명이나 됩니다.
(1) 신혜왕후 : 정주 출신 호족 유천궁의 딸로, 태조가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 있을때 아내로 맞았다. 하였으나 왕건이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 때 신혜왕후가 나와 "의로써 탐학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녀자도 분발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갑옷을 입혀 의거에 참여하도록 권하였다. 충주는 후백제와 신라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충지이며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신라 5소경의 하나이다. 육군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요충지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자신의 지원세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선의왕후가 25세에 죽자 성종을 길렀다.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다시 맞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할머니이다. 태조의 여러 후비들 중 유일하게 대부인 칭호를 가지고 있다. 평씨 성은 신라 육두품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신분적 위치는 높지 않았다.
태조가 나주를 정벌할 때 지역 호족 딸인 오씨와 혼인하였으나 나주의 권력 기반이 약해 혜종은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1) 의화왕후 : 진주 임씨로, 병부령 대광 임희의 딸이다. 태조가 태자비로 선택한 데는 진천의 지역적 위치와 임희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실력자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 흥화군은 광종 때 역모죄로 참사당하였고,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제2비로 들어간다. 이는 당시 혜종의 외가 세력이 약했으므로 충주 호족 세력의 역모를 잠재우기 위한 고육지책 이었을 것이다. 왕규의 학문적 능력과 군사적 지원으로 혜종의 왕위가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다. 혜종이 즉위한 뒤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로 추대하기 위하여 혜종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고 혜종이 죽은뒤 정종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왕규와 일당 수백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후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 의문이다. 살았더라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중 서원경이 있던 곳으로 독자적 지방세력이 구축되었던 곳이다. 고려 건국 직후부터 반란이 여러차례 시도되었을 정도로 반고려적 성향을 띄었고 태조가 민심수습의 노력 결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처제를 정종과 혼인시켜 왕위계승 경쟁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3. 정종 (왕요, 4년)
이복동생 왕요가 혜종의 측근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즉위 2년만에 병사(독살?)하자
박영규의 3자매는 모두 고려 왕실과 혼인하였는데 첫째는 태조의 17비이다. 성명 미상의 공주는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혼인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정종이 재위 4년만에 병석에 누워 사망하자 정종의 선위를 받아 동복동생인 광종이 25세 나이로 득위한다.
(1) 대목왕후 : 신정왕후의 딸로 광종의 사촌동생이다. 고려시대 첫 근친혼이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려 하자 노비들이 그 주인을 배반하는 풍조가 성행하였으므로 이 법의 실시를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종의 어머니이고 천추공주는 문원대왕 과 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과 혼인하였다. 문혜왕후는 태조의 6번째 왕후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로서 신혜왕후 슬하에 자식이 없자 동일한 호족인 정주에서 혼인한 여인이다. 성종의 재가하게 된다. 이후 선정왕후는 목종의 왕비가 된다. 대한 신뢰의 표시 및 동생들의 실력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조취로 자신의 딸을 광종에게 출가시켰다. 반대로, 왕족내혼을 통해 왕실에서 입지가 확고하게 된 동생 광종에게 자신의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혜종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빈약한 혜종의 왕권이었기 때문에 경화군부인은 왕의 공주였지만 왕후가 아닌 부인에 머무른 것이 아닌가 한다.
5. 경종 (왕유, 6년)
광종의 무고한 살육의 원한을 풀어주고자 경종은 복수법을 시행해서 복수를 허용하게 되는데,
초월적 존재임을 과시하고 왕실내의 단결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시대 왕실의 혼인제도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계가 같더라도 모계만 다르면 생활권을 달리하는 방처혼적(訪妻婚的)인 가족구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과의 동성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씨 성을 칭하였다. 성종의 누이 동생으로 목종의 어머니이다. 경종이 죽자 2살인 목종 대신에 왕후의 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천추궁에서 머무른다.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천추태후라 부르게 하였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죽게 되고 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가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강조는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나 66세에 사망했다.
6. 성종 (왕치, 16년)
성종은 22세로 득위하였고 (이 때 목종은 2살이었고 경종의 사위라는 장점도 있음), 숭유억불 정책, 문물제도 정비.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 문덕왕후 : 광종의 딸로 경종의 여동생이다. 처음에는 수명태자와 혼인하여 선정왕후를 출산 하였으나 수명태자가 일찍 죽자 성종에게 재가한다. 선정왕후는 이후 목종의 아내가 된다. 성종은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어머니가 왕씨인 것으로 보아 왕실 외손일 가능성도 있다.
성종의 병세가 깊어지게 되어 성종의 선위로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득위하게 된다.
재가하였기 때문에 성종의 딸로서 자랐다. 목종은 성종의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강조의 정변 목종이 후사가 없고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8. 현종 (왕순, 22년)
천추태후의 자객에도 여러차례 살아남은 현종은 강조의 옹립으로 18세에 등극하는데,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피했고 왕은 나주로 피난했다. 공주에 묵게 되고 원성태후가 어의를 지어 드리고 편안히 모시었다. 김은부의 세자매가 (원혜태후, 원평왕후) 모두 왕비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광종 때 왕실족내혼이 이루어진 이래 새로운 양상이다. 계기가 되었다. 아들 문종은 11대왕이 되고 그 뒤 고려 왕통은 문종의 후손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경장태자는 현종의 생모인 헌정왕후와는 남매간이다. 서눌의 딸이다. 현종은 태조 이래 가장 많은 13인의 비빈을 두었고 그 중에는 귀족가문의 타성도 다수 있었다. 광종 이래 새로운 혼인관계로 귀족과의 연결을 통하여 왕실의 고립을 막고 많은 자녀를 두어 왕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blog.daum.net/yelti |
'문화 역사 시사 > 문화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Just The Way You Are - Bruno Mars (브루노 마스) (0) | 2014.01.27 |
---|---|
Little Drummer Boy 외 - Pentatonix (0) | 2013.12.24 |
시인의 품격 (치마 / 문정희 vs 팬티 / 임보) (0) | 2013.11.04 |
산사람 - 이정선 (해바라기) (0) | 2013.11.02 |
설악산 얘기 - 진교준 (0) | 2013.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