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Concerto No.5 in F major, Op.103 'Egyptian'
생상스 / 피아노협주곡 5번 바장조 '이집트풍'
Charles Camille Saint-Saëns, 1835 ~ 1921
생상스는 첫 번째 협주곡을 쓴 지 거의 사십 년 만에 자신의 마지막 협주곡을 작곡했다. 생상스는 춥고 눅눅한 파리의 겨울을 피해 갔던 따뜻한 나라에서 경험한 이국적인 풍습과 기후에 대한 사랑을 가득 표현했다. 사실 이국적인 풍습에 눈을 돌린 프랑스 작곡가가 생상스 혼자만은 아니었지만 당대에 바그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작곡가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집트풍》을 구성하는 각각의 음표에는 1896년에 머물렀던 카이로보다 일반적인 지중해의 따사로움이 담겨 있다. ‘동방의 냄새’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악장은 중간 악장이다. 중간 악장에는 나일강의 뱃사람들이 부르는 누비아의 사랑 노래를 바탕으로 한 멜로디가 나온다. 밤에 우는 귀뚜라미와 개구리의 노랫소리와 함께 1889년 파리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자바의 가멜란과 에스파냐의 흔적까지도 느낄 수 있다. 생상스의 협주곡답게 이 작품도 독주자의 뛰어난 기량과 당당한 모습을 요구한다.
1악장 (Allegro animato)
Part 1
Part 2
Sviatoslav Richter, piano
Moscow chamber Orchestra / Kirill Kondrashin, Cond, 1952 녹음
소나타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 악장의 주요주제는 제3악장에도 사용된다.
2악장 (Andante)
Sviatoslav Richter, piano
Moscow chamber Orchestra / Kirill Kondrashin, Cond, 1952 녹음
나일 강가의 이국적인 정서가 넘치는 밤의 랩소디다. 구성의 제약은 무너지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마음껏 사막의 밤 공기를 호흡한다.
3악장 (Molto Allegro)
Sviatoslav Richter, piano
Moscow chamber Orchestra / Kirill Kondrashin, Cond, 1952 녹음
소나타형식을 취한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속을 누비면서 약동한다.
오랜 작곡생활의 최후에 명 연주가가 다시 그 모습을 무대 위에 나타내듯이.
Jean-Yves Thibaudet, piano
Concertgebouw Orchestra
Opgenomen 16 november 2011, Concertgebouw Amsterdam
Pnina Salzman, piano (1922 - 2006, Israel)
Lilya Zilberstein, piano
Alessandro Crudele, cond. / Orchestra UniMi (Milan State University Orchestra)
ΕΙΡΗΝΗΣ ΓΚΟΓΚΟΥ
Dorel Golan, piano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5번 F장조 작품 103 <이집트풍>
생상이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파리의 청중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46년 봄...그의 나이 불과 열한 살 때였다. 그로부터 50년후인 1896년의 오늘, 생상의 연주가 생활 50주년을 기념하여 데뷔했던 바로 그 자리, 사르 플레이에르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제5번>은 바로 이 연주회에서 있을 생상 자신의 연주를 위하여 작곡된 것이다.
명성과 명예를 모두 얻은 만년의 생상은 일상의 태반을 여행으로 보내며 세계 각지를 둘러보는데, 이런 여행에서 얻은 각 나라 각 도시의 인상을 당연히도 하나하나 그의 작품에 반영한다. 이 피아노협주곡 5번 역시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번에는 이집트 여행의 기념품이라 할수있는 작품이다.
언뜻 고전적인 협주곡의 양식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곡은, 그러나 여러 곳에서 관념 파괴, 형식 파괴의 실험적 시도가 나타난다. 흔히 이집트협주곡 또는 이집트 풍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험적 시도에 의한 동양적 색채의 가미에서 기인한다.
특히 2악장 안단테에서는 마치 이집트의 밤의 느낌을 충분히 느낄 만큼의 아름다운 선율을 구사, 이곡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선명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생상스 Charles Camille Saint-Saëns
(1835.10.09~ 1921.12.16, France)
숙모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접하고 스타마티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7세 때 피에르 말댕에게 작곡을, 보엘리에게서 오르간을 배웠다.
10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천재적 기량을 발휘 하였다.
1848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브누아와 알레비에게 각각 오르간과 작곡을 사사받았다.
1853년 파리 생마리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이 교회에서 즉흥연주를 들은 리스트로부터 ‘이 시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고 격찬을 받았다. 1861~65년 니데르메이에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고 이 때 제자로 메사레, 포레 등이 있었다. 1867년 칸타타 《프로메테우스의 결혼》이 세계박람회 기념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등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871년 국민음악협회를 설립하여 신작 연주를 장려하였으며 , 이 때 포레, 프랑크, 뒤카, 라벨, 드뷔시 등의 작품을 소개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1886년까지 이 협회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작곡활동을 하였다.
1888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고독한 방랑자가 되어 미국에서 동양까지 여행하였는데, 특히 알제리와 이집트는 그가 마음에 들던 곳으로 1880년 관현악곡《알제리 모음곡》 1891년《아프리카》 1896년 피아노 협주곡《이집트의 풍》 등의 작품을 남겼던 곳이기도 하였다. 1886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의 위촉으로 제3교향곡 《오르간》을 작곡하고, 189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21년 그가 사랑하는 곳 알제리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여러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당시 프랑스 음악계의 주류를 이루던 오페라를 13곡 작곡하는 등 힘을 쏟았으나, 오늘날 《삼손과 데릴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공연되지 않으며, 빈의 음악형식에 따른 소나타,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곡, 교향곡에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그는 독자적인 길을 추구하기보다는 갖가지 요소를 융합하거나 양식에 순응하면서 변화를 주는데 재능이 있었다.
작품의 특징은 고전적인 형식감과 절도를 중시하였으나,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과 색채적 감각이 뛰어나다.
대표작품으로 《삼손과 데릴라》를 포함한 오페라, 5곡의 피아노 협주곡,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동물의 사육제(謝肉祭)》를 포함한 관현악곡·실내악곡 등이 있다.
리히터 (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 - 1997)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 - 1997)는 1915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와 역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다고 한다. '독소(獨蘇)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피살되었고 어머니는 독일로 망명하여 리히터는 러시아에 혼자 남게 된다.
양친이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터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리하여 15살 때인 1930년, 오뎃사 극장의 연습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되었고, 1934년엔 쇼팽의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직업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37년, 비로소 처음으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겐리히 네이가우스(부닌의 祖父)의 문하에서 수업한다.
네이가우스는 이 나이 많은 제자를 극진하게 가르치고 갈무리해주게 되는데 그의 소개로 프로코피에프를 알게되어 그의 소나타 6, 7, 9번을 초연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5년, 전 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소련과 동구(東歐)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0년,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타지못하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서방세계 최초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이 비로소 서방세계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적인 명성을 쌓기에 이른다.
리히터에 대한 음악가들의 평
○ 반 클라이번(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 후)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연주다.
○ 에밀 길렐스(1955년 서방 첫 연주 여행에서)당신들의 칭찬은 정말 기쁘다.하지만 저 산너머 우리나라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그의 연주 솜씨는 나보다 천 배는 더 낫다.
○ 글렌굴드: 흔히 연주가 그룹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 부류는 악기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연주가들로 역사적으로 볼 때 리스트나 파가니니 등이 이에 속하는,이들의 특징은 그 악마와도 같은 거장성(virtuosity)에 있다. 이들은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연주가 자신과 악기와의 광계에 몰입하도록 만든다.이와 반대로 두번째 부류의 그룹은, 연주의 메카니즘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을 음악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그 음악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이들은 연주가 아닌 음악 그 자체를 가지고 청중들과 교감을 이루는데,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이 부류를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연주가라 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악기의 기계적 변화를 무시할 수 있는 연주가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터와 같은 연주가들은 음악적 구조라는 바탕 위에 그 악기와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연주가 자신과 청중들 또한 거장성이나 악기에 대한 피상적 질문에서 벗어나 음악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영적 가치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연주가 음악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근거는 연주가들이 결코 베토벤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를 창조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같은 연주를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더욱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연주를 연결고리로 작곡가와 청중들을 매개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만들 뿐 아니라,종종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작품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것은1957년 5월 모스크바 음악원이었다.프로그램은 가장 긴 곡 중의 하나인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로 시작했는데,리히테르의 템포는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중 가장 느렸다.여기서 두 가지 사실만 고백하도록 하자. 첫째 나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반복적 구조를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특히나 좀 긴 곡이라도 듣게 되면 무언가 불안정하고 어색함마저 느끼게 된다.둘째는 레코드를 통해 음악을 주로 듣지 음악회에 거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리히테르의 첫 프레이즈 연주와 그 느린 템포가 주었던 감동 때문이다.
사실 나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슈베르트의 반복적 구조에 대한 편견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며 기껏해야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리히테르에 의해 중추적인 요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우기 곡에 대한 분석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즉흥연주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었는데, 그의 음반을 들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바로 그 순간 나는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았던 것이다.
키릴 콘드라신 (Kirill Kondrashin,1914∼1981)
키릴 콘드라신이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빈 필하모니를 지휘, 정경화를 독주자로 하여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녹음한 뒤부터다. 그가 서방 자유세계의 지휘자들처럼 다양한 지휘활동과 레코드 녹음을 할 수 없었다는 취약점 때문에 위대한 거장성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콘드라신은 20세기 지휘사에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될 위대한 지휘자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가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묻혀 지내왔다는 것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지 못하고 전성기를 보냈을 뿐이다.
콘드라신은 소련이라는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기 3년전인 1914년 2월 21일 모스크바의전통적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당대 소련 지휘계의 거목이였던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법을 배운 뒤,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레닌그라드의 말리 가극장 지휘자로 취임하여 1943년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다음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볼쇼이 극장 지휘스탭에 가담했고, 1960년부터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상임이 되어 1976년까지 이 오케스트라를 키우는데 진력했다. 오늘날 모스크바 필이 누리고 있는 명성의 대부분은 콘드라신에 의해서 구축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후 런던이나 파리 등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어 자유로운 활동을 하다가 1979년에 갑자기 네덜란드로 망명, 세계의 음악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콘드라신의 네덜란드 망명은 그가 1981년 3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돌연 사망해버림으로써 불과 2년밖에 활동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콘드라신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맡아 말년의 음악 인생을 정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콘드라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들의 관계는 짧은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몇장의 레코드로 남은 기록은 우리 시대의 소중한 유산이 되기에 충분하다.
콘드라신의 지휘는 대체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중후해서 거대한 러시아 대륙의 유장함을 맛보게 해준다. 그가 소련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으면서도 말러같은 본격적인 서구음악에 심취했던 것은 매우 독특하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서유럽의 오케스트라들과 기념비적인 레코드 녹음이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67년의 길지 않은 생애가 그 가능성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콘드라신은 아쉬움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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