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구노의 아베마리아

박연서원 2013. 2. 14. 23:12

Ave Maria

구노의 아베마리아

Charles-François Gounod

 

 

Ave Maria, gratia plena
Dominus tecum
Benedicta tu in mulieribus
et benedictus fructus ventris tuis Jesus.
Sancta Maria, Sancta Maria, Maria
Ora Pro nobis
Nobis peccatoribus
Nunc et in hora, in hora mortis nostrae
Amen. Amen.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성모 마리아여, 성모 마리아여,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아멘

 

Placido Domingo

 

Mario Lanza

 

신영옥 & 조수미

 

Keedie

 

키메라

 

 

Nicholas Keay, Iain Simcock

James O'Donnell, cond / Westminster Cathedral Choir

 

Chorus

 

 

Cello

 

Violin & Harp

 

Anna Moffo

 

Hayley Westenra 

 

구노의 아베마리아에 얽힌 이야기

A STORY BEHIND GOUNOD'S AVE MARIA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린 구노는 음악 신동이라 불렸다.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그 친구 소식도 묻어 왔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파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 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다.

어느날이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다. 그 친구가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가족들과 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삼종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의례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엥베르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Ave Maria는 성모송이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엥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이다.
지구 반대편, 인종도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소위 "미개인"들의 나라에 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씨앗을 뿌린 우리의 성인은 지금도 명동 대성전 지하에 잠들어 계신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며 전교 회장을 역임하다 역시 순교하고 성인반열에 오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나란히... 

 

구노는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이다.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치는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한 열심한 신자이었다.
1841년에는 미사곡을 로마에서 초연하였으며, 레퀴엠 등의 종교곡을 작곡하였다.

1851년 "사포"를 작곡하고 1859년 "파우스트"로 대성공하고, 1867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등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1855년 성녀 세실리아 장엄미사를 작곡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버리고 종교 음악에

전념케 되었다한다. 1870년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에는 런던에 피난하여 5년 동안 그곳에서 작곡 활동을 하였다. 1875년 파리로 돌아온 뒤로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만년의 10년간은
조용한 생활을 즐기며 종교에 심취, 3개의 오라토리오 〈토비〉〈속죄〉〈죽음과 삶〉 등을 작곡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성가대장이었을 때, 당시 조선에서 전교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순교하는 소식을 듣고, 영감을 받고 즉흥적으로 성가를 작곡하였다.

이 성가는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한 성가이다. 우리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인 것이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Imbert, Lurent Marie Joseph)-한국명 범세형(范世亨)-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모방,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 입국하기 전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년간 사목하였던 앵베르주교는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어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조선교구는 먼저 입국한 모방, 샤스땅 신부와 더불어 교구설정 6년, 교회 창설 53년 만에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악조건속에서도 복음전파에 힘써 1839년 초 신자 9천 명을 넘었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고 정하상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박해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주교는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 하였고 앵베르주교는 이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자수하였고 동료 신부들에게도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며 자헌을 권유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서로 만난 세 선교사들은 모진 형벌과 고문을 받으며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하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리며 모욕하고 군중들의 온갖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병정들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었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주교가 순교하였을 때 나이 43세였으며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카톨릭사전, 한국 천주교회사, 하늘로 가는 나그네/ 김길수]

 

Charles-François Gounod 1818~1893

 

Born June 17, 1818 in Paris, France

Died October 17, 1893 in St. Cloud, France

 

프랑스 음악사상 빛나는 존재인 구노는 오페라와 종교 음악의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구노는 파리 음악원 출신으로 1839년에 로마 대상을 받아 3년간 국비로 로마에 유학하였다. 1843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팔레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아 극음악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1857년부터 오페라의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어 오페라 <<파우스트>>에 착수하였다. 1859년에는 이 오페라가 상연되었는데 처음에는 파리보다도 베를린과 밀라노와 같은 외국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파리에서도 이 오페라가 호평을 받게 되었고 그 후 10년 후엔 이 오페라에 발레를 넣어 그랜드 오페라로 개작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중후한 종교 음악과 시적인 낭만파 음악을 융합하였고 여기에 환상적인 기교를 더하여 오페라를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수준 높은 시적 아름다움이 내제되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이며 정신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감수성과 가톨릭 신자로서의 조용함을 겸한 그는 명쾌한 선율과 부드럽고 투명한 색채감을 가지고 그의 두 가지 성격을 잘 융합시켜 대중적이면서도 품위있는 서정성이 내포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의 오페라는 아리아 중심을 피하여 섬세한 감성과 경쾌한 정서에 의하여 전체적인 일관성을 갖도록 하였다. 1867년에는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를 발표하여 연속 100회 상연을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종교 음악 분야에서도 큰 활약을 하여 오라토리오와 같은 명작을 남겼다. 또 그가 남긴 순수한 가곡은 근대 프랑스의 가곡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