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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없는 성악가 배재철씨

박연서원 2013. 2. 5. 11:04

성대 없는 성악가 배재철씨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면서
세계적인 콩쿠르를 석권했다.

유럽의 여러 성악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했고,
헝가리 미슈콜츠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2003년 일본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를 공연했다.

영국에서 <라보엠>을 공연했을 때,

더 타임스는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소리' 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2005년에는
아시아인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과 전속계약까지 맺으며
오페라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활약하던 2005년,
그는 돌연 갑상선암 선고를 받는다.
적출 수술을 받던 중 성대 신경이 끊기고 말았다.
오른쪽 폐 기능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테너라니..
직업적인 사형선고이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마라' 는 한 마디 말이
작은 희망의 소리로 들리게 되었고
바로 이 작은 소리에 용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2011년 4월 20일
더 페이스 콘서트 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출생지 : 대한민국

데뷔 : 2000년 에스토니아 국립오페라단 '라보엠'

학력 :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

         한양대학교 성악과 학사 

경력 : 독일 자르부뤼켄 국립오페라 주역 가수

수상 : 2000년 프란체스카 화뜨르 1등

         1999년 하오메 아라갈 1등

         1998년 도밍고 오페아리타 특별상

         1996년 시미오니토 1등 없는 2등

         1993년 동아 콩쿠르 1위

저서 : 기적을 만드는 오페라 카수

 

 

영혼의 목소리를 얻은 오페라 가수 성악가 배재철

 

2005년 가을이었다. 배재철은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의 전속 테너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오페라 <돈 카를로>의 주역을 맡아 세 번째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초연과 두 번째 공연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목소리가 가라앉고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테너였음에도 저음이 배어나왔다. 목뿐 아니라 어깨도 아파왔다. 아마도 연습에 너무 매달린 탓인 듯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혹이 있군요. 일단 초음파 검사부터 해야겠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갑상선 암이었다. 암이라는 판정을 받는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수술하면 나을 수는 있지만 목소리가 상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 그는 국제무대에서 쉴 틈 없이 초대를 받는 인정받는 성악가였다. 그런 그가 팔이나 다리도 아니고, 목소리를 잃는다는 건 곧 생명을 잃는 것과 같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애써 그런 상황을 부정하며, 일단 당장 눈앞에 닥친 공연 일정만 취소하고, 다른 일정은 남겨두었다.

그렇게 그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수술을 시작해보니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안 좋았다. 혹의 크기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수술실에 급히 주임 의사가 불려왔다. 의사들은 기도를 절개하고 호스를 꽂기로 했다. 그것은 오페라 가수로서의 생명이 완전히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성악가로서의 삶이 마지막에 다다른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바로 한국인 간호사였다. 게다가 그는 배재철의 지인을 통해 배재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 간호사가 ‘오페라 가수이니 성대를 망가뜨릴 수 있는 기도 절개는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기도 절개는 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예전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의사는 수술 도중 나와서 배재철의 아내에게 “당신 남편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목소리가 중요합니까?”라고 물었을 정도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안타깝게도 수술 도중 성대에서 노래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신경 세 가지가 끊어지고 말았다.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괴로운 결과가 수술대 위에 누워있던 배재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재철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 했다.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예능을 선택하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의 집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대입 실기를 볼 때도, 레슨비는커녕 교재 살 돈도 없어서 성악을 전공한다는 형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성악과에 들어왔는데, 아는 오페라라고는 이탈리아 가곡 두 곡이 전부였다. 음반을 살 돈도 없었다는 얘기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교수가 아닌 강사를 지도 선생으로 배정받았다. 아마도 집안 경제력이 거기에서도 문제가 된 듯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그가 가장 잘 하는 것, 바로 연습이었다. 한번 노래하면 세 시간은 꼼짝 않고 연습에 매달렸고, 온종일 노래만 부르기도 했다. 군대는 단기사병으로 공군 초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위치가 비행기 엔진을 테스트하는 곳에서 가까웠다. 거기서 그는 엔진 테스트하는 소음에 맞서서 노래하며 엄청나게 성량을 길렀다. 군대를 다녀오면 노래에 감을 잃는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엄청나게 성장했다.

2년 후 복학하자, 마치 외인부대에서 노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듯, 교내외에서 기량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위클리’라는 교내 연주회에서 주목을 끌더니 ‘이대웅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동아 콩쿠르’에서는 1등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국내에서 무서운 신인으로 인정받던 그는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거기서도 연습 또 연습으로 일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디 국립음악원에 들어가서는 수석으로 졸업했던 것이다. 당시 별다른 수입이 없이 집에서 매달 부쳐오는 70만 원으로 생활해야 했던 그의 또다른 수입원은 콩쿠르 입상 상금이었다. 한번 받으면 두 달 정도는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콩쿠르에 도전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한번은 콩쿠르에 입상했는데 상금 대신 오페라 공연 주역 자리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헝가리에서 상연되는 오페라 <토스카>였다. 스물다섯의 배재철이 생애 처음으로 주역으로 서보는 오페라 무대였다.

2001년에는 핀란드 페스티벌에 올라가는 오페라 <리골레토>에 출연했고, 이어서 여러 오페라에 줄줄이 얼굴을 내보였다. 2003년에는 영국 카디프 극장에서 했던 <라 보엠>에 여주인공 미미를 사랑하는 로돌포 역으로 출연했는데, 영국의 <더 타임즈>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서 공연할 때는 한 평론가가 공연 후 그 공연 관계자에게 배재철을 두고 ‘오페라 가수가 무대 위에서 마이크에 대고 노래해도 되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실은 엄청난 성량 때문에 벌어진 오해였다.

한국에서도 그는 인기 있는 신인 오페라 가수였다. 매년 귀국하여 <리골레토>, <토스카>, <라 보엠> 등을 공연했다. 2004년 말에 30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라 보엠>이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상연되었을 때도 주역을 받아 주목을 끌었다.

200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자리를 옮겼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의 전속 가수로 초빙을 받은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안정적인 공연 활동을 펼쳤다. 이듬해 <돈 카를로>에서는 주인공 돈 카를로를 맡아 열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 공연이 그로서는 전성기의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 공연을 앞두고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수술 후 한 달 동안은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났다고 해서 그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도 간신히 할 정도였다. 호흡은 짧고 성량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언젠가 노래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지기 어려웠다. 그의 머리는 노래하는 법을 알았지만, 성대의 신경이 끊어져 머리의 명령을 전달받기 어려웠다.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노래하지 못하는 세상은 암흑과도 같았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그저 깊은 어둠으로만 보였다. 공연 기획 매니저나 대학 교수를 하면 어떠냐는 말도 들었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저 노래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뜻밖의 좋은 소식을 듣는데, 성대를 재건하는 수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전처럼 노래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부여잡는 심정의 배재철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 수술을 잘 하는 의사는 세상에 단 3명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힘들고 드문 수술이었다. 그 의사 가운데 한 명이 독일에 있었지만, 배재철은 그 수술을 맨 처음 개발한 일본 의사인 이싯키 박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 일본에서 음악기획사를 운영하는 와지마 토타로가 큰 도움을 주었다. 와지마는 배재철을 일본에 알린 장본인이자, 그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수술은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한 달 동안은 소리를 내지 말고 있어야 했다. 마침내 한 달 만에 말을 했을 때, 기대는 무너졌다. 여자 목소리처럼 가늘고 힘없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아무래도 예전으로 돌아갈 길은 없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왕년의 30퍼센트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다. 말소리는 그나마 정상적이었지만, 노래하는 건 쉽지 않았다. 호흡이 짧아 몇 번이고 끊어서 노래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노래를 놓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 발성연습을 했다. 스스로 재활치료를 하듯 학생들을 가르쳤고, 교회 성가대도 가르쳤다. 자신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좌절감이 밀려들었지만, 노래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평온함을 느꼈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회복이 될지, 언제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막연했다. 하지만 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것은 명성과 성공과 찬사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안이었다.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모든 순간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죽음을 선고받은 것도 아니고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지만, 내게 목숨보다 중요한 소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했다.”

와지마는 그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재기무대에 세웠다. 예전처럼 큰 무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더 큰 감동을 받는 듯 했다. 그가 부르는 곡이 달라지고, 예전과 분명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노래는 삶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지난 2008년 7월에 도쿄 오페라시티 리사이틀 홀에서 다시 한번 그는 무대에 올랐다. 단독 콘서트였다. 그 공연을 보면서 240명의 관객들은 눈물로 그를 응원했고 큰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교회에서 주최하는 공연인 <러브 소나타>가 파시피코 요코하마 국립대 홀에서 벌어졌을 때, 그는 6천 명의 관객들 앞에서 다시 노래했다. 자신의 노래 소리가 허공에 뜨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다시금 좌절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2008년 12월에 도쿄 하쿠주 홀에 다시 그의 공연 무대가 섰다. 관객 300명이 홀을 가득 채웠다. 거기서 그는 가곡 <얼굴>을 포함해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 여러 곡을 불렀다. 관객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그의 노래에 호응했다. 그 공연이 끝나자 NHK에서는 저녁 9시 뉴스에 “어젯밤 기적의 무대가 있었습니다.’라는 감동적인 뉴스를 보냈다. NHK는 그 전에 2년 동안 배재철을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내보내기도 했다. 2009년에 단독 콘서트를 다시 열었던 배재철은 최근에도 여러 공연 일정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자신의 삶에서 두 번째 변성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에서 주역이다.
“나는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주역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을 맡지 못한다 해도 나는 변함없이 내 삶의 주역이다. 주역이 성공하려면, 자신이 맡은 역할에 푹 빠져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게 연기인지 실제인지 다 잊고 온전히 빠져 노래에 파묻힐 때 관객에게 감동이 전달된다. 이제 나는 내 영혼으로 아리아를 부를 차례이다.”

 

(수술 전)

Nessun Dorma - Ten. 배재철

 

"フェデリコの嘆き" (2005年 4月22日)
チレア作曲 歌劇 「アルルの女」 より


수술 후, 노래를 부를 수 없던 기간...2005년 10월~2008년 12월

 

(재기후)

ベー・チェチョル "初恋" (2009年 10月10日)

 

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이야기 (배재철 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