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Sonata No.60 in C major, Hob.XVI:50
하이든 / 피아노 소나타 60번 C 장조
Franz Joseph Haydn 1732∼1809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궁정의 수레바퀴 제조자인 아버지의 12자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삼촌에게서 잠시 음악을 배웠고, 1740년부터 10년 동안 빈에 있는 성 슈테판(St. Stephan)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악기를 배우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며 변성이 되어 더 이상 성가대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1749년 성가대를 나왔다. 1750년부터 10년 동안은 교회의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고 건반악기 레슨도 하였다. 이 때에 메타스타지오의 소개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었던 포르포라(Nicola Porpora)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잠시 작곡이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든은 푹스(J. J. Fux)의 [Gradus ad parnassum]으로 대위법을 익히는 등 주로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758년에는 포르포라의 추천으로 모르친(Karl Morzin) 백작의 궁정 음악감독이 되었고, 이 곳에서 목관악기를 위한 <디베르티멘토>와 첫 교향곡 D장조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의 마지막 3개 소나타는 1794-1795년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작곡되었다. (Hob.50-52)
이 3개의 소나타는 런던의 피아니스트인 테레제 얀센(바르롤로치 부인)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녀는 당대 제1급 무용가의 딸로 런던에서 활약하고 있던 피아니스트였다. 하이든은 그 외에도 3개의 피아노 3중주곡과 1개의 피아노 협주곡도 그 녀에게 헌정하였다.
이 소나타들은 훌륭한 걸작으로서 음악 내용 및 피아노 작법으로 보아 얀센이 탁월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피아니스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이든 Haydn, Franz Joseph
(1732.3.31~1809.5.31,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작곡가.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며 18세기 후반 빈고전파를 대표한다. 고전파 작곡가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근대적인 현악4중주곡(絃樂四重奏曲)의 안출(案出)과 교향곡 완성, 그리고 교향적인 미사곡 확립 등 고전파음악의 기반을 쌓음과 동시에 명작을 남겼다. 또한 하이든은 당시 최대의 인기작곡가였는데 그 참된 값어치는 20세기 후반에 비로소 재인식되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음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출발하였다. 하인부르크와 빈에 있는 교회소년합창대원으로 출발하였고, 일반교양과 음악의 기초를 몸에 익혔다. 17세 무렵에 합창대를 떠나 빈에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음악 개인교수, 그리고 동료들과 악단에 의한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교계의 인기 있는 화려한 존재였던 툰 백작부인의 음악교사를 시작으로, 25세 무렵에는 퓌른베르크 남작의 와인칠의 거성(居城)으로 초빙됨으로써 최초의 현악4중주곡군을 작곡하였고, 27세 무렵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가의 악장이 되어서 초기의 일련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하이든의 음악활동을 결정지은 것은 29세 때 헝가리 대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가(侯爵家) 부악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이다. 에스테르하지가 4대의 군주에게 72세까지 38년 간에 걸쳐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최초의 5년간의 부악장 시절은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거성에서 세속음악을 담당하였고, 교향곡에 관해서는 바로크로부터 전고전파(前古典派)에 이르는 여러 양식을 시도하면서 독자적 교향곡 양식을 모색하였다. 34세부터 58세에 이르는 악장시절은 최신의 설비를 자랑하는 오페라하우스와 인형극 극장을 갖춘 에스테르하지궁전이 음악활동의 중심 터전이 되었다. 종래의 기악을 중심으로 한 세속음악에, 교회음악과 오페라의 작곡·지휘가 하이든에게 부과되었다. 특히 에스테르하지궁전의 오페라공연은 매우 충실하였고,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절찬을 받았다. 50세 이후부터 하이든의 명성은 유럽 전지역으로 퍼졌으며, 프랑스·에스파냐·이탈리아로부터도 작곡을 주문받았다. 하이든이 섬긴 3번째 군주 안톤 후작은 음악에 관심이 없었으나 명예악장 칭호를 줌으로써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58세부터 63세에 결쳐 런던의 연주회 주최자 잘로몬의 초청으로 2차례에 걸쳐서 영국으로 건너가 잘로몬이 주최하는 연주회를 위하여 12곡의 《잘로몬교향곡집》을 작곡·지휘하였다. 4번째 군주 니콜라우스 2세 후작의 희망에 따라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를 위하여 6곡의 미사곡을 작곡함과 동시에 하이든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2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四季)》를 발표하였고, 대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연표〕
AD 1732 3월 31일 오스트리아 로라우 출생
1738 하인부르크에서 기초교육을 받음
1740 빈 장크트슈테판대성당 소년합창대원이 됨
1749 년경 변성기로 소년합창대원을 그만두고 자활을 시작함. 현존하는 최초의 미사곡 작곡
1759 년경 모르친 백작가의 악장으로 취임. 초기 일련의 교향곡 작곡
1760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
1761 에스테르하지 후작가 부악장으로 취임. 연작 교향곡 《아침·낮·밤》
1766 에스테르하지 후작가 악장으로 승진
1772 교향곡 제45번 《고별》, 현악 4중주곡집 작품 20, 미사곡 《성 니콜라이》
1777 오페라 《달의 세계》 초연
1781 현악 4중주곡집 《러시아》
1785 W.A. 모차르트와 사귐. 국외로부터 작곡주문이 쇄도. 《파리교향곡집》 제 1 집
1790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 사망 후 명예악장이 되고 자유로운 음악활동 허용됨. 빈으로 이주.
현악4중주곡 《종다리》
1791 런던 바이올리니스트 겸 연주회 주최자 J. P. 잘로몬 연주회에서 신작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발표.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 받음. 교향곡 제94번 《놀람》, 제96번 《기적》
1794 제 2 차 런던 방문. 교향곡 제100번 《군대》, 제101번 《시계》
1795 교향곡 제103번 《큰북 연타》, 제104번 《런던》. 빈으로 돌아옴
1796 다시 에스테르하지 후작가의 악장으로 취임. 미사곡 《전시(큰북)》
1797 현악 4중주곡 《황제》
1798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미사곡 《불안한 시대(넬슨)》
1801 오라토리오 《사계》
1802 미사곡 《하르모니》
1803 최후의 작품이 된 현악 4중주곡 미완으로 끝남
1804 에스테르하지 후작가의 악장 사임
1809 5월 31일 빈에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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