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글로벌 韓商 '경제 한류'의 주인공들

박연서원 2011. 4. 11. 13:14

[글로벌 韓商 '경제 한류'의 주인공들]

[1] 매출 1조원 '강철 기업' 필로스테크 일군 고종호 회장 가족

 

 '마법의 鐵' 개발… 오바마도 격찬한 美제조업 스타

합금 2배 강하게 만드는 나노 열처리 기술 개발…
기계·전자 첨단 업체들 "기술 도입하겠다" 열광

 

2009년 5월 19일 미국 워싱턴
DC. '올해의 중소기업인상' 시상식에 참가한 새뮤얼 고(34) 필로스 테크(Philos Tech) 사장에게 캐런 밀스 중소기업청(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수장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포드자동차 사장단과 인사할 때 제 옆자리에 서 있으세요."

CNN, 폭스 등 주요 현지방송사의 플래시가 연방 터지는 가운데 포드 사장단과 악수하던 밀스 청장은 "굉장한 기술인 것 같으니 포드차가 필로스 테크 기술을 도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 포드 자동차는 필로스 테크에 전화했다. "본사로 급히 들어와 달라." 엔진 등 자동차부품에 필로스의 독점 특허인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이 도입된 순간이었다.

필로스 테크는 이제 미국이 자랑하는 스타 중견기업이 됐다. 지난해 2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주례연설에서 새뮤얼 고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언급했으며,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재작년 11월 JP모간, 골드만삭스 등의 은행장들이 모인 금융포럼에 그를 중소기업 대표로 초청했다.

미국 정부가 필로스 테크에 열광하는 이유는 첨단 기술력이 미국 제조업을 부활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새로운(New)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란 평가가 나온다.

◆미국 자동차·전자부품·항공우주 산업이 티타늄 나노 열처리에 열광

지난 2일(현지시각) 미국 일리노이주(州) 시카고시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윌링시의 필로스 테크 본사. 연구개발실(R&D) 문이 열렸다. 외부인에게 극히 이례적으로 회사의 두뇌를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필로스테크의 창업주 고종호(가운데) 회장과 외동아들 새뮤얼 고(오른쪽) 사장, 셋째 딸 고지승 총괄이사가 오랜만에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 모였다. 고 회장은 “한국기업과 협력해서 세계로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연구실 가운데의 컴퓨터 모니터에 금속을 엑스레이 찍어 해부해 보여 주는 듯한 화면이 떴다. 0.598마이크로미터(1마이크로미터는 100만분의 1m)까지 재는 성분 분석기에 일반 합금강을 넣은 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콩알 크기만한 다이아몬드 모양이 잡혔다. 고 사장은 "이 모양이 작을수록 단단함을 나타내는 경도가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경도 579.7HV(단단함을 나타내는 단위). 이번엔 필로스 테크가 특허를 갖고 있는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적용한 합금강을 넣자 현미경 속의 입자가 좁쌀 크기로 줄었다. 경도 1278HV. 일반 합금강보다 두 배 단단한 제품으로 재탄생했다.

티타늄을 금속 표면에 침투시키는 열처리 기술을 적용하면 내마모성이 3~5배 강해지면서도 변형이 생기지 않는 마법이 나온다. 자동차·전자부품 같은 회사들에는 경쟁력을 올리고 원가를 절약하는 결정적인 기술이 되는 것이다. 또 티타늄 나노 열처리를 한 골프 드라이버의 경우 '꿈의 골프채'로 불리며 비거리가 10~20야드 늘어나고 드라이버 무게는 35g 줄어든다.

필로스 테크의 기술은 자동차·전자부품·항공기는 물론 방위산업체가 생산하는 대포, 저격수의 총 등 수많은 중요 분야에 적용된다. 고 사장은 "미국 포천 1000대 기업 가운데 200개 기업이 필로스의 주요 고객들"이라고 말했다. 중장비 기업의 대표주자인 캐터필러를 비롯, GM·포드·크라이슬러·히타치·보잉 등이 대표 고객사다. 올해 미 전역 6개 사업장에서 매출 1조원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중국의 삼성전자' 폭스콘과 협력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 창업주 고종호(66) 회장과 외동아들 새뮤얼 고 사장, 셋째 딸 고지승(35) 총괄이사 등 티타늄 나노 열처리로 '철(鐵)의 제국'을 일군 가족이 모였다. 고지승 이사는 "우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두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고 회장은 "모 대기업이 내준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가서 회사 임원들과 기술전략회의를 마치고 방금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고 회장 가족은 짧은 서울 모임을 가진 후 또다시 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 회장 부자(父子)는 이달 14일 중국 선전의 '폭스콘' 사업장 내에 문을 여는 필로스의 차이나 공장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대만업체인 폭스콘은 애플 아이폰과 같은 제품을 중국 내에서 생산에 성공, 최근 '중국의 삼성전자'라 불리는 제조전문기업이다. 고 회장은 "일리노이주 정부가 우리 회사의 중국 진출을 위해 중국 광둥성 고위 공무원을 소개해 줬다"고 말했다.

◆재외동포 사업가들과 한인네트워크 잠재력은 풍부

필로스 테크는 한상(韓商) 1·2세의 결합이 탄생시킨 이상적인 협력모델이다. 티타늄 나노 특허기술은 아버지인 고 회장이 죽을 각오로 개발했지만 언어 장벽, 문화 차이로 한계에 봉착했다. 고 회장은 이에 메릴랜드 공대 박사과정(화공학)에 재학 중이던 아들을 끌어들였다.

고 사장은 "재외동포 사업가들과 한국 기업이 협력해서 해외에 진출할 기회가 많은데, 아직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고 회장, 강성노조에 질려 한국 떠났지만… "명품 스케이트 제작, 김연아 선수에 선물할 것"

 

고종호 회장에겐 한국을 떠나야 했던 아픈 사연이 있다. 한국에서 금속 표면처리 사업체를 운영하다 강성노조와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 회사 자산을 직원들에게 미련없이 넘기고 1993년 미국로 떠났고 남은 그 회사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시절 공중분해됐다.

새뮤얼 고 필로스 테크 사장이 성분 분석기로 금속성분을 측정하고 있다. 고 사장 은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은 철을 단단하게 강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시카고=김종삼 프리랜서 사진작가

고 회장은 요즘 미국 본사를 아들에게 맡기고 2006년 부천에 세운 연구소와 올해 초 문을 연 군산 공장을 오가며 기존 B2B(기업 간 거래)가 아닌 '필로스' 브랜드를 내건 명품 만들기에 한창이다. 그는 "한국 현실에 절망했지만 미국에서 재기한 후 한국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고 회장은 피겨 스타 김연아 선수를 위해 티타늄 나노 열처리를 한 필로스 스케이트 날을 개발해 김 선수에게 곧 선물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고급 골프채, 주방기구, 미용용품을 군산공장에서 만들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마크를 달고 수출할 계획이다. 철저히 고가(高價) 정책을 써서 필로스 기술이 적용된 미용가위 하나에 120만원, 주방용 칼 세트(7개)에 245만원의 가격을 매겼다.

[2] 오스트리아 '영산그룹' 박종범 회장

 

1억원 들고 1조원 매출 '유럽 韓商의 꿈' 일구다

車영업맨 하다 IMF 맞아 40代에 단칸 사무실 얻어 車부품 등 10여개 업종 도전
"고국 알아야 주변인 안돼…" 한국문화회관 위해 私財 털고 두 아들은 한국 군대 보내

지난달 25일 전남 순천 율촌공단. 박종범 영산그룹 회장(54)이 산업용 손장갑 제조회사인 'GYC' 기공식을 마친 뒤 부지 2만3000여㎡(7000평)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5월이면 이 벌판에 공장 두 동(棟)이 들어섭니다. 고국에 세우는 첫 공장이예요. 말주변이 없어 잘 표현을 못하겠지만, 벅차다고 할까? '그동안 잘 해왔구나' 싶어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아자동차 계열사의 오스트리아 법인장이던 그가 고국행을 포기한 것은 1999년. IMF 금융위기 직후였다. "모기업이 쓰러졌어요. 돌아가야 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죠. 당시 부장급이어서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오스트리아 빈의 단칸 사무실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의 전 재산은 10만달러(1억1000만원)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 고국에 투자하는 돈은 75억원(전체 합작투자액 250억원의 30%). "기공식에 참여하는 게 올해만 세 번째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감회가 좀 새롭네요. 해외에서 모은 돈을 한국 제조업에 투자하는 것이니까요."

박종범(가운데) 회장이 슬로바키아 질리나시(市)에 있는 영산그룹 공장 ‘카르멜 오토’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이곳 부품을 장착한 완제품 자동차가 매달 7000여대씩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질리나=김홍수 특파원
직원 한 명, 책상 하나, 팩스 한 대로 시작한 영산은 지금 슬로바키아·러시아·중남미·오스트리아·체코·미국 등 15개국에 지사를 둔 그룹으로 성장했다. 연간 매출액은 1조원(7억유로) 규모. 자동차 부품, 부동액, 보일러, 타이어, 에어컨에서 산업용 장갑까지 사업 아이템은 10여 가지가 넘는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한인사회의 뿌리가 깊지 못해요. 오스트리아 교민사회도 2500여명에 불과하죠.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미국과 달리, 보이지 않는 배타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식당이나 민박집을 하면서 눌러앉을 생각은 없었어요. 20년 동안 몸에 밴 영업 노하우로 승부를 보고 싶었죠."

'큰 제품(자동차)을 다뤘다'는 과거 경력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렸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이었다니까요. 뭘 몰랐으니까 했지."

사업 아이템을 찾아 발버둥을 쳤지만 돌파구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을 돌아다니다 보니 통장 잔고도 뚝뚝 떨어졌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매일 1~2시간밖에 잠을 못 잤어요. 자다 깨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수건으로 몸을 감고 자야 했죠."

사업은 작은 곳에서 시작됐다. 우크라이나 지인이 소개해준 제과업체에서 25만달러어치 사탕포장지 주문을 따낸 것. "종잇장보다 더 얇은 포장지가 컨테이너에 실려왔어요. 산처럼 쌓인 포장지를 보면서 '해냈다' 싶었지요."

하지만 이 사업은 그에게 첫 패배를 안겼다. 그가 사탕 포장지를 팔아 당시로써는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생산업자인 한국 인쇄업체의 잘못으로 대형 클레임(손해배상청구)을 당했던 것. 이것저것 빼고 물어줘야 할 돈만 50만달러가 넘었다. 더구나 파산한 인쇄업체 사장은 숨어버렸다. 박 회장은 거래처에 "버는 대로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다. 두 아들도 미국계 국제학교에서 학비가 싼 공립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렇게 2년 동안 돈을 갚았다.

이 실패가 다시 기회를 안겼다. "JB Park(박 회장의 영어 이름)은 믿을 수 있다"며 거래처들이 다른 일을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영산그룹의 다양한 아이템은 그렇게 축적됐다. 기아차 공장이 슬로바키아에 자리 잡은 것을 계기로 2004년 자동차 관련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슬로바키아 질리나시에 승용차 개조공장,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동차 생산라인용 철제 구조물 제조 공장을 설립했고, 올 상반기 중엔 체코에도 자동차 부품공장을 열 예정이다.

박 회장은 제품 공급자인 한국의 중소기업과 상생(相生)을 도모하고 있다. 영산그룹은 종합물류센터를 보유하고 있어 유럽 전역의 구매주문에 즉각 응할 수 있다. 이런 강점을 활용해 영산그룹은 한국 중소기업에 유럽의 '무역 허브(Hub·중심축)'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박 회장은 "수출 경험이 전무하고, 자금력이 달려 해외 시장 개척에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한국 중소기업들에 우리의 판매망과 물류센터 서비스를 제공해 유럽 수출길을 열어 주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100% 한국산 제품으로 사업 승부를 걸어온 박 회장은 작년부터 오스트리아 한인 회장을 맡아 교민사회 발전을 위해 사재(私財)를 투입하고 있다. 교민사회가 빈 시로부터 요지에 있는 연건평 2800㎡ 건물을 단 1유로의 임대료로 50년간 임대받아 한국 문화회관(연내 개장예정)을 갖게 된 데는 박 회장의 기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 한상'의 꿈(dream)을 이룬 그가 한인 뿌리 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 박 회장은 장남 건영(26·빈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 둘째 아들 건호(24·런던 정경대 법학과) 모두 "주변인이 되지 않으려면 한국을 더 잘 알아야 한다"면서 고국에서의 병역의무를 다하도록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지켜준 것은 "종교(천주교)와 고국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했다. '영산'이라는 회사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산의 이름이자 그의 고향(광주) 주변을 흐르는 영산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한국에만 갇혀있지 말고 유럽에 와서 길 찾아라"

朴회장, 후배들에 苦言

 

박종범 회장은 "차세대 유럽 한상(韓商)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박 회장 세대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 해마다 유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

전남 순천에 있는 산업용 손장갑 공장에서 생산 라인 여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박종범 회장. /순천=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박 회장이 꼽는 한국 젊은이들의 장점은 '순발력과 영리함'이다. 그가 속한 기성세대가 높은 언어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교포와 유학생을 중심으로 유럽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요즘 20~30대 젊은이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해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어 영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같은 세대 유럽인들과 비교했을 때 정신력이 강하고, 승부 근성도 있다.

약점도 있을 터. "하나의 일을 진득하게 해내는 끈기가 부족하고, 한순간의 고비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우선 국제 감각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고의 틀을 한국에만 가둬두지 마세요. 국제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외국어 실력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 나에게 일을 맡기는 상대방에게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나 자신을 신뢰성 있는 브랜드로 만드는 것, 그게 글로벌 사업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유럽 개척한 韓商들 누가 있나

스페인의 참치왕 권영호
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

오스트리아 영산그룹 박종범 회장 외에 스페인 인터불고 그룹 권영호(70) 회장이 유럽 교민사회의 대표적인 글로벌 한상이다.

인터불고 그룹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한국·중국·앙골라·가봉·라스팔마스 등 세계 각국에 2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연 1조원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원양어선 선원 출신의 권 회장은 스페인에 터를 잡고 원양어업 회사를 창업, 아프리카 어장을 개척해 부를 쌓았다. 권 회장은 조선소, 유통업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최근엔 한국에서도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호텔, 골프장, 건설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노르웨이 라면왕'으로 불리는 이철호(74)씨도 유럽 지역에서 성공한 대표 사업가다. 하지만 이씨는 1990년 라면업체를 매각해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했다.

유럽에 퍼져 있는 한인 이민자 수는 약 3만명이다. 유럽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은 해외 주재원 출신이나 1970~80년대 유학생으로 왔다가 현지에 거주하게 된 사례가 대부분이다. 독일의 경우엔 광부·간호사로 온 경우도 많다. 유럽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이 중 자기 사업을 벌이는 이민자는 1200명으로 추산된다. 주로 여행업·식료품점·식당 등에 몰려 있다.

유럽 각국의 이민 2세대부터는 의사·변호사·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량 배출되고 있는 추세다. 앞으로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성공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문화행사 기획사 '에코 기획'을 운영하는 이미아(42)씨, 영국 RBS 증권 아시아 투자 본부장 패트릭 한(38) 등도 유럽 차세대 비즈니스맨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94년 오스트리아 빈에 '아카키코'라는 아시안 음식점을 열고 현재 11개 지점(연 매출 250억원대)을 운영하는 전미자씨는 "유럽 사람들이 동양인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지만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움을 준다"며, "유럽에서 사업을 하려면 좀 더 현지인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3] 세계 최대 IT 싱크탱크 '벨 연구소' 김종훈 사장

 

美서 10억弗 벤처신화 일구고 세계 '에너지 혁명'에 도전

美서 첫 계약 따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려… 그런 유리벽도 날 못 막아
정보통신 에너지 효율 4년 뒤 1000배 높일 것

 

"이 자리를 거부한 사람은 역사상 당신밖에 없다.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2001년 여름 세계적인 통신장비회사 루슨트테크놀로지스(현 알카텔-루슨트)의 헨리 샤트 회장이 탄식했다. 그의 앞에 앉은 인물은 이민 1.5세대 한국인 김종훈. 그는 당시 샤트 회장이 꺼낸 70년 전통의 최고 IT 연구기관 벨 연구소 사장(소장)직 제안을 끝내 고사(固辭)했다.

당시 김종훈은 IT업계의 '떠오르는 거인'(워싱턴포스트 선정)이었다. 1975년 처음 미국에 건너왔을 때 그는 가난을 벗어나려 점심을 거르고 신문을 돌리던 중학생이었다. 그러나 20여년 만에 그는 재미 교포 벤처신화의 대표적 인물이 됐다.

루슨트는 2005년 메릴랜드 교수로 재직하던 김종훈을 다시 설득했다. 김종훈은 "잠깐 도와주겠다"고 승낙했다. 이렇게 벨 연구소 사장에 취임한 김종훈(51)은 올해로 7년째 2만여명의 연구개발 인력을 이끌고 있다.

◆가난을 인정하지 않던 '사이언스 키드'

일요일인 지난 6일 오전. 김 사장은 자신의 집 근처인 메릴랜드주 베세스다의 명문 골프장 콩그레셔널CC 클럽하우스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나왔다. 김 사장은 올해 US오픈을 개최하고 회원이 되려면 10년이 걸린다는 이곳의 정규 회원이다. 그는 "시간이 없어 골프는 거의 못 치고 짬짬이 헬스장만 이용한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서 출장 간 게 한국·중국·스위스·스페인·프랑스·인도네시아·벨기에·호주.또 어디더라."

그는 첫 딸 이름을 딴 통신장비회사 유리시스템즈(Yurie Systems)를 창업, 1998년 미국 통신업체 루슨트에 10억달러에 매각(본인 수입 5억달러·당시 약 7000억원)하고 미국 400대 갑부 반열에 올랐다.

"사실 유리시스템즈는 한국 대기업에 먼저 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어떻게 믿고 기술을 사느냐'는 분위기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깔본 거죠."

연구원 2만여명의 세계 최대 IT 연구소를 이끄는 김종훈 벨 연구소 사장. 그는 "한국인은 유대계나 중국계 같이 미국에서 서로 끌어주는 단합력은 없지만 대신 원하는 것을 꼭 이뤄내는 헝그리 정신이 있다"고 말했다. /벨 연구소 제공

김 사장은 중학교 2학년 때 부모와 함께 1975년 미국 메릴랜드주로 건너왔다. 가난했던 그의 집은 흑인 빈민촌 한가운데였다. 편의점 계산원, 신문배달, 야채가게 점원 등 안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가난을 인정하긴 싫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주는 공짜 점심도 먹지 않았다. 유일한 위로는 과학과 수학이었다. 영어는 서툴지만 두 과목은 항상 자신 있었다. 그의 가난과 재능을 안쓰럽게 여긴 교장은 조기 졸업을 허락했다. 그는 고학으로 존스홉킨스대(학·석사), 메릴랜드대(박사)를 졸업했다.

◆헝그리 정신으로 '유리벽'을 깨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치기 위해 그는 1980년대에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하나 창업했다. "그런데 PC 붐이 사라지면서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간 번 돈도 모두 빚 갚는 데 나갔고…."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7년간 해군 핵잠수함 장교로 복무하다가 1992년 유리시스템즈를 창업했다. 첫 계약을 따는 데 1년6개월이 걸렸다. 김 사장은 "한국인으로서 '유리 벽'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유대계나 중국계는 미국사회에서 서로 돕지만 한국계는 그런 줄이 없습니다. 대신 밤을 새워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한국인의 DNA '헝그리 정신'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는 미사일 제어를 위해 무선·구리선·광케이블 등 모든 네트워크를 연결해 쉽게 데이터를 전송하는 ATM 통신장치를 만들었고 이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스포츠 공헌 활동도 열심이다. 그는 NBA 워싱턴 위저즈, NHL 워싱턴 캐피털스 공동 구단주도 맡고 있다.

이제 그는 떠나온 한국에 거꾸로 손을 내밀고 있다. 2009년에는 서울시, 고려대와 손잡고 서울 상암 DMC에 '서울 벨연구소'를 창립했다. 또 삼성·KT·서울대 등을 참여시킨 국제연구 컨소시엄 '그린터치(Green Touch)'도 만들었다. 그는 "2015년까지 정보통신 분야의 에너지 효율성을 1000배 높이겠다"고 말했다. 전세계에 '에너지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한국 경영진, 외국인과 머리 맞대야"

김 사장은 기술 적응력이 뛰어난 한인(韓人)에게 IT 분야는 아직도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특히 생명공학 IT(Somatic IT) 부문이 유망합니다. 한국인은 대부분 건강과 IT에 모두 관심이 많아요." 그는 "삼성이 IT와 생명공학을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반드시 돈을 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쓴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한국이 통신 인프라로 IT 강국이 됐지만 이미 한계입니다. 빨리 소프트웨어로 방향을 바꿔야 해요. 또 한국기업 경영진은 외국인들을 채용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김 사장은 "한인 2세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미국인·유대인과 경쟁해 성공하고 한국인과 다시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다. "한국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내 두 딸(유리·주리)도 10대가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자긍심을 갖더군요. 둘 다 한국을 '놀라운 나라(marvelous country)'라고 합니다."

 

[벨 연구소는…] 트랜지스터 등 개발, 지구촌의 발명센터… 특허만 2만개 넘어

 

김종훈 사장이 이끄는 벨 연구소는 '지구촌의 발명센터'로 불린다. 1925년 설립 이후 정보통신·에너지 분야의 핵심 기술들을 잇달아 발명해왔기 때문이다.

김종훈 벨 연구소 사장이 6일 자택 근처인 미국 메릴랜드주 베세스다의 골프장 콩그레셔널 CC 클럽하우스에서 기자의 질문에 웃으며 답하고 있다. /베세스다(메릴랜드)=임민혁 특파원 lmhcool@chosun.com
대표적인 사례가 트랜지스터이다. 현대 전자기기의 핵심 부품인 트랜지스터는 1947년 존 바르딘(John Bardeen)과 월터 브래테인(Walter H. Brattain),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가 함께 발명했다. 세 발명자는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함께 받았다.

디지털 카메라 기술도 벨 연구소에서 나왔다. 1970년 벨 연구소에 근무하던 윌라드 보일(Willard Boyle) 박사와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박사는 빛을 디지털 정보로 바꾸는 반도체 신소자(CCD)를 발명해 발표했다. 현재 CCD는 디지털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의 핵심 부품이다. 역시 두 발명자 모두 200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밖에 광케이블, 통신 위성기술 등 수많은 현대 기술이 벨 연구소에서 나왔다. 벨 연구소가 보유한 특허는 현재 2만7900여개에 이른다.

 

[실리콘 밸리의 韓商들 누가 있나] 이종문, 한인 IT 인력의 대부…

김윤종,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려

 

미국에는 "실리콘 밸리의 냄새는 카레"라는 말이 있다. 금융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가 인도 IT 인력의 미국 내 영향력을 빗대 유명해진 말이다. 실제 미 IT 업계에는 3만여 명의 인도 기술인력 네트워크가 가장 강력하다. 인도 다음으로는 중국계 IT 인력의 목소리가 거세다.

여기에 도전하는 '제3의 물결'이 바로 재미 한인이다. 재미 한인 IT 공동체 'K그룹'에 따르면 한인 IT 인력이 실리콘 밸리에만 약 4000여명에 이른다.

IT 벤처로 성공한 재미 한인 1세대는 주로 60대 이상으로, 자수성가 후 벤처 투자가로 활약하고 있다. 'IT업계 재미 한인의 대부'로 불리는 이종문(83) 암벡스 벤처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1982년 컴퓨터 그래픽카드 회사인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시스템사를 설립하고 1995년 상장해 1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1996년부터는 암벡스 벤처그룹을 설립해 벤처캐피탈리스트로 활약 중이다.

황규빈(75) 회장은 1983년 모니터 제조·컴퓨터 네트워크 회사 텔레비디오를 설립해 1983년 한국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회사를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김윤종(62) 자일랜 창업자는 1999년 컴퓨터 네트워크 벤처업체 자일랜을 20억달러에 알카텔에 매각한 뒤 국내외 벤처기업 투자와 자선활동을 벌이고 있다.

2·3세대는 20~50대로 대부분 활발하게 현역에서 활약 중이다. 김종훈(51) 벨 연구소 사장이 대표적인 2세대 재미 IT 벤처 기업인이다.

차세대 터치스크린 기술을 개발한 제프 한(35) 퍼셉티브 픽셀 대표도 유명하다.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4] 1달러로 시작, 12억 달러 美軍에 납품 신대용 DSE 회장

 

후세인 혼낸 '벙커 버스터' 만든 美방산 거물

은퇴 방산 전문가에게서 방산업의 모든 것 배워
"대학때 월남 파병 반대로 고문당하기도 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파병이 한국경제 동력"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13개월간 참전한 마이크 워커(Walker) 전 대령. 그는 2008년 11월부터 미국 방산업체 DSE에서 운영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전쟁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반드시 총알이 발사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는 다른 대기업 비즈니스맨과 다릅니다. 전쟁터의 생명을 생각하며 하나의 불량품도 허용하지 않는 철학을 갖고 있죠. 그는 대단한 애국자입니다."

신대용 DSE 회장이 MK19 기관총을 앞에 두고 40mm 자동기관총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총탄을 비롯한 10여종의 무기를 미 국방부에 납품하고 있다. 신 회장은“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미 방산업계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로버타 라이트

워커 전 대령이 언급한 인물은 한국계 신대용(67) DSE 회장이다. 신 회장은 총탄뿐 아니라 지하 25m까지 뚫고 폭발하는 '벙커 버스터'를 만들어낸다. 그가 지난 10년간 미 국방부와 체결한 공급 계약은 12억달러(약 1조3450억원). 이를 통해 연간 2억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부에 들어가 야전 군인이 목숨을 의지하는 무기를 공급하는 한국인. 신 회장의 미 주류사회 진출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1달러를 주고 공장을 사서 현재의 DSE를 일궜다.

믿을 수 있는 사람

1971년 그가 미국으로 건너올 당시 수중엔 현금 200달러뿐이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데 병원 갈 돈이 없고, 냉장고가 텅 빈 '절대 가난'을 경험했다. 1979년 자동차 부품공장을 인수하고, 1980년 현재의 DSE를 창업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온 시간과 단절돼 비약하는 결정적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그도 맞는다. 그는 "그 순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성숙해질 때 찾아온다"고 했다.

1979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신 회장에게 미국 변호사 에드워드 콜먼씨가 갑자기 전화했다. 플로리다 템파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다. 콜먼은 그가 자주 나가던 볼티모어시 아시아문화센터에서 만난 변호사였다. 정작 도착한 곳은 작은 자동차 부품공장이었다. 콜먼 변호사는 두툼한 법률 문서와 펜을 건네고 받아 적으라고 했다.

'나, 신대용은 이 공장을 1달러에 인수하는 데 동의한다.'

망설이는 신 회장에게 콜먼 변호사는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너는 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신 회장이 장기에 걸쳐 대금을 치를 수 있도록 보증했다. 신 회장은 "나중에 콜먼에게 '왜 나를 도왔느냐'고 물었지만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다"며 "문화센터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성실한 사람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1년여 지난 뒤 콜먼 변호사는 방산업 분야로 눈을 돌려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지역 신문에 20달러를 내고 경험자를 찾는 구인 광고를 싣는다. 돈이 없어서 '은퇴자 선호'라고 단서를 붙였다. 한 달 뒤 하얀 캐딜락을 탄 피터 디켐프라는 이름의 백발노인이 찾아왔다. 공장을 둘러보며 디켐프씨는 질문을 던졌다. "국방부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 "자금은?" 신 회장의 대답은 거의 모두 "노(no)"였다.

국방부 컨설턴트이면서 수백만달러의 재산가인 디켐프씨는 시간당 6달러의 보수를 제시한 신 회장에게 일주일 뒤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승낙한다. '내가 커피 마시자고 하면 언제든지 마시고, 내가 점심 먹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먹을 것이며 내가 돈을 달라고 하기 전까지 기록만 해둘 것.'

그는 만 4년간 신 회장에게 국방부 계약서 작성과 기술 습득, 인맥 형성, 문제 해결 통로 등 방산업체 운영의 노하우를 가르쳤다. 디켐프씨는 7살 때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포드 비행기 부사장이었던 양아버지를 만나 대학에 가고 성공했다. 그는 신 회장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고,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은혜를 자신이 베풀 차례라고 느꼈던 것이다. 신 회장은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베풀 차례"라고 말했다.

조국과의 불화와 화해

신 회장은 연세대 기계공학과 재학 중 월남 파병에 반대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졸업 후 한국베어링에 근무하던 시절 중앙정보부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 미국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난과 고문이 싫어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은 변했다. "저는 6·25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피란길의 어머니들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쥐고, 등에 또 하나의 애를 업고, 머리에는 살림을 이었죠. 그 피란길에서 살기 위해서 비정하지만 아이들의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바로 그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월남 파병이 한국 경제의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벌어들인 달러 가치보다도 우리 기술자들이 체득해서 돌아온 기술력이 그 후 건설산업 등을 일으키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신 회장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면 사회가 거꾸로 자신을 돌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백석꾼이 아니라 만석꾼을 꿈꾸라"고 당부했다.

 

☞美방산업계의 거대 한상 신대용 DSE 회장은

▶이민: 연세대 졸업 후 1971년 도미
▶회사설립: 1979년 자동차 부품업체 운영, 다음해 DSE 설립
▶사업장: 미국 플로리다 템파 본사 등 플로리다·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에 6개
▶매출: 미 국방부와 지난 10년간 12억달러 이상 계약.
▶주요 제품: 벙커 버스터, 5인치 주니 로켓, 155㎜ 포탄, 25파운드 폭탄

신대용이 만드는 무기들

 

1986년 카다피 겨눈 주니 로켓 포함, 포탄·미사일 등 모두 10여종 생산

 

"팡! 팡! 팡! 팡!"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럿공항에서 자동차로 50분쯤 떨어진 사우스캐롤라이나 개프니타운. 미국 방산업체 DSE 공장 '건룸(gun room)'에 있는 MK19 기관총에 40mm 자동기관총탄이 장착됐다.

미 공군 소속 군인들이 2.2t짜리 벙커 버스터 2기를 무기 이동트럭에 싣고 있다. 벙커 버스터는 지하에 숨은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만든 폭탄이다. /로이터

머리 부분이 둥근 후추병 크기의 40㎜ 총탄은 한 박스에 32발씩 들어갔다. '징~'. 기계가 움직이는 짧은 준비음에 이어 총구가 불을 뿜자 200m 지점에 약 60~70도 각도로 기울여 놓은 모래더미가 하늘로 튀었다. 불꽃이 튀며 맞은 자리엔 연기가 가라앉자 움푹 팬 젖은 모래 속이 드러났다. 지름 15피트(약 4.5m) 이내는 모두 섬멸한다는 엄청난 파괴력의 총탄이다.

신대용 DSE 회장이 만드는 미군 무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지하에 숨은 적을 소탕하는 벙커 버스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난공불락이라던 후세인의 지하 벙커가 이 폭탄에 맥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지하 핵시설 및 동굴 속 장사정포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군의 무기다.

벙커 버스터는 미국 내에서 DSE를 포함해 단 두 곳에서만 생산된다. 이밖에도 DSE에서 생산하는 무기는 1986년 카다피를 노린 리비아 공습 때 사용됐던 5인치 주니 로켓, 155㎜ 포탄, 25파운드 폭탄, 미사일 등 10여 종에 달한다.

신 회장은 이들 무기를 플로리다주 5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1개 공장에서 생산한다. 그가 만들어낸 무기는 미 국방부, 미 의회 내 수많은 소위원회 등 미국의 권력 장치에서 수없이 검증하고 승인했다.  

[5] 뉴욕 부동산업계 '미다스 손' 우영식 사장

맨해튼의 '스카이 거라지'
車와 함께 엘리베이터 타고 내리면 부엌으로 이어져… 두달 만에 100% 분양
아르헨 빈민촌서 자라고 뉴욕서 허드렛일하며 공부
디자인 배우던 대학 4학년 땐, 80만달러 건물 리모델링해 8개월 뒤 180만달러에 팔아…

니콜 키드먼도 믹 재거(롤링 스톤스의 리드 싱어)도 그가 지은 집에 산다

미국 뉴욕 맨해튼 11가 200번지는 부촌(富村)인 첼시 지역. 스테인리스 외벽의 날렵한 20층 콘도미니엄(우리식으로는 아파트)은 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바로 부엌으로 이어진다. 뉴욕 최초로 차고가 하늘에 있는 '스카이 거라지(sky garage)' 빌딩이다.

콘도 펜트하우스엔 할리우드 여배우 니콜 키드먼과 남편 키스 어반이 1000만달러(약 111억원)를 주고 입주했고, 돌체&가바나의 유명 디자이너 도메니코 돌체도 2채를 2900만달러(약 323억원)를 주고 사들였다. 록 그룹 롤링 스톤스의 리드 싱어 믹 재거도 이곳 입주민이다. 서울의 엘리베이터 주차타워에서 영감을 얻어 이 멋진 빌딩을 지은 디벨로퍼는 한국인 우영식(58·미국 이름 영우) 영우&어소시에츠 대표다.

이 빌딩은 월가발(發) 경제위기가 미국을 강타한 2009~2010년에 완공됐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완공 2주 만에 60%가, 또 한 달 반 이후에는 100% 완전 분양되었다. 딱 두 달 걸린 셈이다. 뉴욕타임스가 이 신기한 빌딩을 소개한 뒤 무려 150개국에서 합작을 제의했다. 우 대표는 "불황에 견디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물건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우영식 대표는 뉴욕 맨해튼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부동산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로케이션(위치)과 타이밍(시기), 그리고 또 타이밍”이라고 했다. /김재현 타임스퀘어비주얼 대표 촬영

맨해튼 서쪽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영우&어소시에츠. 본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회사의 상징 '퍼플 카우(보라색 소)'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흑백의 소들 가운데 보라색 소만이 눈에 띄는 것처럼 다른 것보다 탁월하지 않으면 선택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영우&어소시에츠는 '웨스트 첼시의 등대'로 불리는 첼시아트타워, 17만스퀘어피트에 이르는 '피어 57' 등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에서 굵직한 프로젝트 50여개를 지금까지 진행, 이젠 '뉴욕의 간판 디벨로퍼'로 떠올랐다.

"무조건 멕시코 국경을 건너겠다"

뜨거운 눈물을 삼켜야 하는 고행의 외길은 우 사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미국 이민을 꿈꾸며 먼저 파라과이행 비행기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우 사장은 가족들과 함께 12세 때 한국을 떠난다. 파라과이에서 8개월, 아르헨티나에서 7년을 보내며 우 사장은 새벽 1시 반에 일어나 소젖을 짜고, 빈민촌의 야채가게에서 일했다. 

니콜 키드먼, 믹 재거 등 유명 연예인이 입주한 뉴욕 맨해튼 11가 200번지 빌딩의 조감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 바로 자신의 집 앞에 내리는 뉴욕 최초의 ‘스카이 거라지(차고)’ 빌딩으로 유명하다. /영우&어소시에츠 제공

19세. 갑자기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우 사장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미국 영사관을 찾아갔다. "당신은 아무래도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다." 미 영사관은 비자발급을 거부했다. 그래도 단 500달러만 들고, '무조건 멕시코 국경을 건너겠다'며 작별 인사를 하는 우 사장에게 매형의 아르헨티나 친구가 손을 잡아끌고 다시 미 영사관으로 갔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했던 매형 친구는 "우리 회사 직원인데 토끼 고기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 보낸다"고 말했고, 30분 만에 비자가 발급됐다. 매형 친구는 "미국 플로리다주 보카 레이턴에 가면 존 보가트라는 친구가 수퍼마켓을 하는데 찾아가라"고 말했다. 웨스트 팜 비치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보카 레이턴에서 스페인어로 단지 이름만 갖고 택시로 돌아다니며 찾은 수퍼마켓 앞에서 우 사장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다렸다. 해가 질 무렵 가게에 나타난 보가트씨는 "너는 이 지역에서는 유일한 동양인이기 때문에 불법 이민자로 당장 추방된다"며 비행기를 태워 뉴욕으로 보냈다. 뉴욕의 랭귀지스쿨에 다니며 그는 유대인 푸줏간, 가구점의 일용사원, 뉴욕의 택시운전사로 일하며 뉴욕 디자인계의 명문 단과대학 '프랫디자인스쿨'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 중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디자인 감각이 자연스럽게 길러졌고, 결국 4학년 때 부동산 디벨로퍼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뉴욕 부동산의 벽을 발로 허물다

대학 졸업반이던 1979년 12월, 우 사장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옆의 6층짜리 건물을 80만달러에 사들였다. 당시 50만달러의 모기지를 끼고 자신의 돈 10만달러, 2명의 투자자로부터 받은 돈 20만달러를 들고 계약하는 날 유대인 건물주는 "건물을 사서 무엇 할거냐"고 물었다. 불과 3개월 전 40만달러에 건물을 산 전 주인은 두 배의 값을 치르겠다고 덤벼드는 동양 젊은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우 사장은 자신이 건물을 두 배로 비싸게 치르고 산 것을 그 순간 처음 알았다. "부동산을 하다 보면 우연히 산 빌딩이 가장 돈을 잘 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빌딩이 그랬습니다." 그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옆에 있다는 위치를 고려하면 건물이 그동안 너무 무성의하게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저평가됐다고 판단했다. 창고처럼 쓰던 6층을 비워 쇼룸처럼 개조하자 임차인이 몰려들었다. 8개월이 채 안 돼 180만달러를 받고 건물을 팔아넘겨 최초의 부동산 사업에서 100만달러를 벌었다.

영우&어소시에츠는 현재 우 사장 이외에 변호사이자 파트너인 한인 마거릿 리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그렉 카니 등 3명의 파트너 체제로 되어 있다.

마거릿 리는 "이 가운데 손해를 본 프로젝트는 단 한 건"이라고 말했다. 2001년 9·11 사태가 터지면서 경기가 얼어붙는 바람에 현금흐름에 문제가 생겨 16만달러의 손해를 본 적이 있다 한다. 우 사장은 나중에 돈을 번 뒤 당시 손해를 본 투자자에게 돈을 빌려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우 사장은 "이민 2세대로서 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미국 부동산 분야에서 주류 사회와 쉽게 섞이며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며 "무엇보다 좋은 마음을 먹고 인내하라"고 조언했다.

 

성공한 사람의 뒤에는 언제나 은인이 있다. 우 사장의 은인은 한국인 오춘선 충주비료 전 사장이다.

우 사장의 30여년 비즈니스 경력 중 최대의 위기는 1991년에 찾아왔다. 주식시장이 폭락한 블랙먼데이가 발생하고 4년 뒤 뉴욕 부동산시장은 깊은 침체로 빠져들었다. 모든 담보와 자금을 다 쓰고, 파트너였던 마거릿 리의 크레디트카드에서 마지막 자금을 빼내 썼으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우 사장은 마거릿 리에게 말했다. "이제 막다른 골목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보라. 나는 옛날로 돌아가 택시 운전을 하겠다."

그때 오춘선 충주비료 전 사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뉴욕에 도착해서 가구점에서 일하던 19세 우 사장을 우연히 가구를 사러 들렀다가 만난 오 전 사장 부부는 그를 아끼며 보살폈다.

"힘든 일이 있느냐?" 다음 날 뉴저지의 집으로 와달라고 얘기한 오 전 사장은 우 사장에게 액수를 안 쓰고 사인을 한 수표 2장을 내밀었다. "내가 집사람 모르게 가지고 있는 돈이 17만달러가 있네. 이 한도에서 쓰게."

우 사장은 이 돈을 가지고 일어섰다. 우 사장은 뉴욕 프랫디자인스쿨에 오춘선 사장의 이름으로 강의실을 기증했다. 그리고 평소 오 전 사장이 자주 하던 얘기를 입구에 걸었다. "큰 꿈을 가져라(Dream Big)."

 

AIG 본사건물 1달러(제곱피트당)에 사고, 볼품없는 건물 1억달러에 매입…

미국이 놀란 우 사장의 투자 안목

 

영우&어소시에츠는 지난달 초 다시 미국 주류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맨해튼 남단 펄스트리트 375번지에 위치한 32층짜리 버라이즌타워를 시애틀 소재 부동산 개발업체 사베이와 함께 1억달러에 인수했다.

이 빌딩은 밋밋한 성냥갑 모양의 콘크리트 건물로 뉴욕의 대표적인 볼품없는 건물로 꼽힌다. 영우&어소시에츠 본사 4층 회의실 벽엔 벌써 원형 빌딩 주변을 녹색의 식물들이 싸서 둘러 가는 건물의 조감도가 핀으로 꽂혀 있다.

"디자인 파워의 시대죠. 애플이 성공한 것도, 현대차가 성공한 것도 디자인의 힘이죠." 우영식 사장은 싱가포르의 디자이너에게 버라이즌타워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과제를 맡겼다고 했다.

우 사장의 힘은 디자인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뉴욕의 부동산 투자회사인 '존스 랭 레살'의 스캇 레이덤 부회장은 "영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한발 앞서 보고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버라이즌타워를 인수한 것도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구글이 확장하려면 결국 버라이즌타워가 몇 안 되는 선택지라는 것을 간파한 선수(先手)라는 것이다.

월가발(發) 금융위기 속에서 가장 성공한 부동산 투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금호종금 컨소시엄의 AIG 본사 건물 인수도 영우&어소시에츠의 작품이다. 1932년 세워진 월가에서 가장 높은 66층짜리 빌딩을 제곱피트당 1달러에 사들인 이 거래는 뉴욕 부동산업계의 2009년 '올해의 딜(deal)'로 선정됐다.

 

[6] 美육사출신 40代 헤지펀드 대표 대니얼 윤

 

 월街도 놀랐다 10억달러 굴려 40% 수익낸 남자
웨스트포인트서…“시간 너무 느리게 간다”용산서 3년 복무후 월가로 금융위기때 대체투자 적중
펀드매니저로…세계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 공무원퇴직연금 한국 사학·군인 연금도 고객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대표적인 금융빌딩 '1330 아메리카 애비뉴(Avenue)'.

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10명의 금융 전문가가 일하는 790㎡ 크기의 벨스타그룹 사무실이 펼쳐진다. 그룹 대표인 재미교포 1.5세 대니얼 윤(44)이 두툼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는 월가의 한국계 금융인 중 젊은 대표주자로 정글 같은 헤지펀드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서 지난해 평균 10억달러의 자산을 굴렸고, 40%의 수익을 냈다.

벨스타그룹 금융 전문가들은 월가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엘리트들이다. 시미나 파카슈(50) 최고투자책임자(CIO)의 경우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프린스턴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런던대 박사, JP모간과 베어스턴스의 수석 매니징디렉터(MD), 실버백자산운용의 최고 포트폴리오전략가를 역임했다.

금융위기 이후 다른 헤지펀드들이 반 토막 손실을 낼 때 그의 회사가 꽤 좋은 수익을 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계 최대 연·기금인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과 한국의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이 돈을 맡겼다. 7000여개 헤지펀드가 난립하는 월가에서 벨스타그룹은 1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100위권 회사로 성장했다.

 
미국 월가의 헤지펀드 벨스타그룹의 대니얼 윤 대표가 지난달 뉴욕 사무실과 서울 파크하얏트 호텔에서 본지 기자를 만났다. 그는 “내가 떠날 때 베트남보다도 못살던 ‘아버지의 나라’ 한국이 이렇게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사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미 육군 장교로

윤 대표는 여섯 살 때이던 1973년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의 1인당 소득이 베트남에도 못 미치던 시대였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던 순간 모든 게 크고 신기했다. 특히 에스컬레이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낯선 타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간판과 포스터를 그려 생활비를 벌었고, 어머니는 야간 간호사로 일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버지다.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고,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평소 대화라고 해봐야 '이거 해라', '저거 하지마' 정도였지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는 차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긴 대화를 나눴어요. 아버지는 '내 꿈을 이뤄준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높이 날 수 있도록 내가 작은 공항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어요. 나 같은 교포 1.5세들은 부모들이 참 많은 희생을 했죠." 아버지 얘기를 꺼낼 때마다 이 건장한 중년 남자의 눈시울이 자주 붉어졌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부터 3년간 용산 미군기지에서 군 복무를 한 뒤 의무 복무기간을 채우자마자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그는 "훈련받는 것은 즐거웠지만 군대에서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고 했다. 마침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MBA 출신들 외에 다양한 경력과 전공을 가진 이들을 찾는 중이었다. 골드만삭스에서 1년을 근무한 뒤 리먼 브러더스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까지 오른 그는 1998년 보이저(Voyager)라는 작은 헤지펀드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지난해 2월부터 벨스타그룹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애슐리 호멜씨. 그는 “(여기는) 팀워크를 강조하는 좋은 직장”이라고 말했다. /뉴욕=박종세 특파원
월가 정글에 뛰어들다

낯선 헤지펀드시장에서 처음부터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해 대형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하면서 헤지펀드시장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모아 왔던 전 재산을 사업에 쏟아 부으며 벼랑 끝까지 몰린 적도 있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카드 잔고가 부족해 샀던 물건을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200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6개월간 휴식을 취하면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소수 개인 투자자의 자금을 운용하는 보이저 대신 연·기금 같은 기관 자금을 운용하는 벨스타그룹을 세웠다. 공개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많은 헤지펀드를 도산으로 몰아넣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됐다. 주식이나 파생상품 같은 위험자산 대신 자산유동화증권(ABS) 같은 대체 투자에 주력한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한국 고맙고 자랑스러워"

'할아버지의 나라'를 잊지 않게 하려고 그는 일곱 살, 다섯 살 된 아이들에게 한국어 개인 교습을 시킨다.

윤 대표는 2008년 한국계 금융인을 대표해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한국이 아니었다면 그의 회사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벨스타그룹이 운용하는 자금 중 절반 정도가 한국의 연·기금들이 맡긴 돈이다. 그는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가 이렇게 빨리 성장해 전 세계에 투자할 만큼 부자 나라가 됐다는 게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금융위기 때도 돈 잃지 않는 게 진정한 프로다"

 

 금융은 역시 사람장사다.

이곳의 파트너들은 대니얼 윤 대표를 제외하곤 모두 미국 동부의 명문 출신이다. 매니징 파트너인 스콧 존스톤(51)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뱅커스트러스트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살로먼브러더스 부사장, 피코닉펀드 최고경영자(CEO)를 11년간 지냈다. 카네기멜론대를 나온 제프리 모제스(50)는 HSBC 미국법인 및 베어스턴스 매니징 디렉터 출신이고, 봅 하사이머(58)는 와튼스쿨 MBA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디렉터를 역임하며 200개 부실은행 매각을 관장했다. 시카고대 MBA인 토머스 드렐레스(51) 역시 리먼브러더스 수석 부사장, HSBC 매니징 디렉터 등을 역임했다.

"제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뽑는 겁니다. 금융 기술은 제가 가르칠 수 있지만 판단력과 지혜는 가르칠 수 없죠. 충분한 경험이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윤 대표는 돈으로는 좋은 사람을 뽑는 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오히려 최고경영자가 이익을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신뢰를 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벨스타 그룹의 연봉은 월가 평균의 절반 이하, 수익금 분배율은 월가 평균의 2배 이상이라고 윤 대표는 공개했다.

윤 대표는 가장 중요한 투자원칙에 대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시장이 나쁠때 판가름 난다"며 "하락장에서 돈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