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트레킹)/걷기 정보

배롱나무꽃 기행

박연서원 2010. 12. 26. 16:48

배롱나무꽃 기행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전문》

무욕의 알몸으로, 폭죽처럼 피워낸 ‘화엄세상’


 

 

 

 

 

 

 

 

 

 

 

 

 

 

 

 

 

 

 

 

 

 

 

 

 

 

 

 

 

 

 

 

 

 

 

 

여름이 여물고 있다. 개망초꽃이 지천이다. 가운데 노른자에, 둘레가 흰자로 된 ‘계란프라이 꽃’. 산과 들 아무데나 우르르 피었다. 미군 군수물자와 함께 묻어온 무허가 들꽃. 근본이 없기로서니, 오죽하면 이름에 ‘개∼’자까지 붙었을까. 낮엔 이마가 하얀 개망초꽃 천지, 밤엔 남미 원산의 노란 달맞이꽃 세상. 한들한들 껑충 큰 키. 작은 풀꽃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언뜻 연보라 패랭이꽃이 저만치 수줍게 서 있다. 시골 처녀처럼 순박한 토종 꽃. 개망초와 달맞이꽃 그늘 아래 가만히 숨어 있다. 꽃받침이 옛 보부상 대나무 모자 패랭이를 빼닮았다, 듬성듬성 작은 댓잎에 빼빼마른 대마디 줄기. 옛 선비들은 ‘바위에 핀 대나무꽃’이라 하여 석죽화()라고 불렀다. 장돌뱅이 깡마른 다리에 파랗게 돋은, 힘줄 같은 꽃. 주먹밥 먹으며, 미련스럽게 일하는 머슴 같은 꽃.

어딜 가나 도심 길가 꽃 상자엔 하나같이 샛노란 금계국()꽃이 웃고 있다. 한국 공무원들은 어쩌면 좋아하는 꽃이 그리도 똑같을까. 이 꽃도 북아메리카에서 귀화한 식물이다. 한들한들 ‘여름 코스모스’라고도 불린다. 진한 향기가 코를 찔러, 벌 나비가 쉬지 않고 드나든다.

한낮 매미울음이 꼭 호루라기 소리 같다. 언뜻 개구리울음소리로도 들린다. 들판의 작은 방죽마다 분홍 연꽃들이 화르르 눈을 떴다. 비릿한 물 냄새를 씻어주는 그윽한 향기. 넓적한 연잎 그늘엔 청개구리가 낮잠을 자고, 물잠자리는 퉁방울눈을 굴리며 경을 외우고 있다. 마당귀퉁이 납작 엎드려 옹기종기 핀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꽃. 뒤꼍 울 안 쏴아! 쏴아! 맑은 대숲바람 소리. 소나기가 지나간 뒤 담배연기처럼 피어오른 뭉게구름.

여름 꽃은 헌걸차다. 색깔과 향기가 기세등등하다. 봄꽃은 바람에 한번 지면 그만이지만 여름 꽃은 자꾸만 새 꽃이 돋아난다. 우우우! 생명의 기운이 철철 넘친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거나 스러질지언정 스스로 눕지 않는다.

● 조선 선비들 ‘나무 백일홍’-향나무 나란히 심어




붉은 배롱나무꽃은 열꽃이다. 피가 펄펄 끓어 돋은 ‘화엄 자국’이다. 여름은 배롱나무꽃과 함께 시작된다. 석 달 열흘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나무 백일홍() 꽃. 조선 선비들은 앞마당에 배롱나무와 향나무를 심어놓고, 꼿꼿한 지조와 강직한 삶을 꿈꿨다. 요즘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054-853-2172)엔 390살이나 된 배롱나무 예닐곱 그루가 앞 다퉈 붉디붉은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임금을 향한 붉은 마음. 만고충신 성삼문(1418∼1456)이 배롱나무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오늘 아침에 꽃 한 송이 피어/서로 100일 동안 바라보니/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 하리라( )’

조선 숙종 때 선비 명재 윤증( ·1629∼1714)은 재야의 백의정승이었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이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곁눈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1607∼1689)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은 그의 한때 스승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041-735-1215) 앞마당엔 늙은 배롱나무꽃이 피를 토하듯이 피었다. 다발로 핀 붉은 꽃마다 꿀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가 따갑다. 바닥엔 벌써 붉은 꽃잎들이 질펀하게 누워있다. 하지만 앞마당 연못가의 늙은 배롱나무는 꽃이 듬성듬성 피었다. 지난해 폭죽 터뜨리듯 피워대더니 올해는 아무래도 해갈이를 하는가 보다. 달 밝은 밤, 연못에 잠긴 황홀한 붉은 꽃들을 볼 수 없다니. 못내 안타깝다.

명재고택은 고졸하고 단아하다. 울타리도 없다. 나무와 숲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한다. 왼쪽 장독대 항아리 뒤쪽으로 늙은 느티나무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앞쪽 저 멀리 마을 건너편엔 계룡산이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앉아 있다. 명재고택은 그의 제자들이 지어준 집. 하지만 명재는 생전에 “과분하다”며 그가 살던 초가집을 떠나지 않았다.

절집 앞마당에도 대부분 늙은 배롱나무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전남 강진군 백련사 앞뜰엔 호랑가시나무와 나란히 명상에 잠겨 있다. 전북 남원군 선국사(063-625-7222) 500살 배롱나무는 7층 석탑과 마주보며 붉은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다.

배롱나무 줄기는 알몸이다. 발가벗은 몸에 간지럼 태우면 까르르 꽃들이 웃는다. 그래서 ‘간지럼나무’다. 하지만 절집에서는 무욕을 뜻한다. 속세의 때를 훨훨 벗어 버려, 한 점 욕심이나 집착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절집의 배롱나무는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뒤틀려 있다. 그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붉은 사리 꽃’을 끝없이 토해낸다. 맨발 탁발의 깡마른 부처가 설법을 뿜어내는 것 같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우리 인생…’.

● 서울 세종로 교보문고 앞 비각 뜰에서도 볼 수 있어

배롱나무는 정자나 무덤 옆에도 심었다. 전남 담양군 명옥헌 연못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배롱나무는 시골선비 오명중이 1652년 심은 걸로 전해진다.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배롱나무는 800살이나 되는 천연기념물이다. 동래 정씨() 시조 묘 옆에 서 있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후손의 번영을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서울 교보문고 앞 비각 뜰에는 어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무심하게 붉은 꽃을 달고 있다. 도심 고층빌딩 정원에 붉은 꽃이 보이면 그건 십중팔구 배롱나무다. 아예 국도나 고속도로 갓길엔 붉은 터널을 이룬 곳도 있다.

꽃은 한 번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건 금방이다. 열흘 가는 꽃은 드물다. 아무리 새 꽃을 피워 올려도 ‘백일 붉은 꽃’이 한계다. 꽃이 활짝 피면 ‘금세 질까’ 두렵다. 봉오리가 막 벙글 때의 꽃이 훨씬 예쁘고, 적이 안심된다.

배롱나무꽃이 지면 가을이 온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꽃잎이 지기 시작한다. 땅바닥엔 피처럼 붉은 카펫이 깔린다.

사람도 저마다 꽃을 피웠다가 진다. 배롱나무 꽃처럼 황홀하게 지는 사람이 있다. 봄날 백목련 꽃잎처럼 검버섯 몸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지는 사람이 있다. 무화과처럼 ‘열매 속의 속 꽃’을 피웠다가 담담하게 지는 사람도 있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가 볼 만한 배롱나무꽃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150여 년)

○ 전북 남원군 교룡산성 선국사(500년)

○ 전남 강진군 백련사(200년)

○ 전남 담양군 명옥헌(350년)

○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동래 정씨 시조 묘(800년)

○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390년)

*괄호는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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