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먹거리 자료

추억의 국수 우동 (인천)

박연서원 2010. 8. 27. 00:06

칼국수에 담긴 추억들
[인천in 칼럼]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문학평론가)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2학년 선배들 몇몇이 새로 뽑힌 1학년 학생회 간부들을 학교가 파하고 난 뒤 불러냈다. 그들은 별말 없이 우리를 자유공원 넘어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길 안쪽의 칼국수 집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우리가 간 곳이 칼국수 집이었는지도 잘 몰랐다. 일반 가정집 같은 곳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남녀들이 방방의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고픈 배를 쥐고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아직 어렸던 때라 여기저기 식당을 다닌 적도 없었고, 가족끼리 이따금 외식하는 일이 집 밖에서 먹는 음식의 전부였던 때였다. 중학교 때는 기껏해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는 우무나 라면을 최고의 음식으로 알던 때여서 칼국수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릴 때 집에서 만들어 주던 칼국수는 비위가 약했던 내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멸치 국물의 비린 맛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 안에 있는 칼국수는 그 맛의 차원이 달랐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게 손칼국수는 아니었다. 기계로 뽑은 밀가루 국수를 육수와 함께 삶고 고명을 얹은 것이었는데, 육수 맛이나 그 육수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튀김 고명(이 튀김 고명은 아마 신포시장의 튀김집에서 나온 것인 듯했다)과 다진 양념(일본어투로 말해서 다대기)이 국수의 맛을 내는 비결인 듯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어른들이 드나드는 식당에 선배들과 함께라지만 우리끼리 간 것도 드문 경험이었고, 신포시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화려한 쇼핑가는 우리를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엄마 손 잡고 가는 신포시장이 아닌, 우리끼리의 신포시장이 비로소 고등학생이 된 우리들에게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요컨대 신포동의 시장과 유흥가가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신포동의 그 칼국수집을 원조로 구석진 골목에 칼국수집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곳은 칼국수 골목이 되었다. 값도 쌌고(보통 300원 곱빼기 500원, 당시 분식집 라면 값과 같았다) 맛이 있었던 그 집을 모방한 곳들이 늘어났는데,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늘어난 그 칼국수집들도 모두 성업을 이루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시절, 300원짜리 칼국수를 먹고 400원짜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냈다. 신포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신포동 칼국수 골목(때로는 칼레스토랑이라고도 불렸다)은 비디오 재생기가 귀하던 때, 칼국수를 먹으며 비디오 시청도 가능했던 공간이었다. 한참 히트하던 블록버스터 급 헐리우드 영화를 그곳에 가면 틀어주곤 했다. 음성적으로 비디오를 복사해서 손님을 끌기 위해 틀어주었던 것이라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칼국수를 기다리며 눈요기까지 덤으로 얻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이따금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어김없이 나는 친구들을 그 칼국수 골목으로 데려갔다. 푸짐한 양과 좋은 맛, 싼 값은 친구들을 부담없이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신포동에는 게다가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나눌 커피숍이 정말 많았다. 칼국수를 먹고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어스름이면 애관극장 뒤편 이모집이나 고모집, 누나집 등에서 빈대떡과 삼치를 앞에 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들이켰다. 신포동은 젊은 우리들의 욕망과 지향 없는 열정을 풀어주던 곳이었다. 젊었을 때 신포동을 배회하다 가끔씩 '밤새 걸어도 이런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만이 계속되는 곳은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차피 도시의 아들과 딸들이었던 우리에게 밤은 너무 짧고 신포동은 너무 작았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어 머리가 커지고 음식 맛도 볼 줄 알면서 신포동 칼국수의 얕은맛에 조금씩 싫증이 날 무렵, 내 눈에 띄었던 곳이 신포동 횟집 골목에 있던 '부영식당'이다. 멸치국물에 다진 양념을 얹고 계란을 풀어내던 칼국수와 수제비는 어렸을 때 추억을 간직했으면서도 맛은 더 좋았다. 대학원 다닐 때 연애시절 아내와 처음 간 그곳을 지금도 가끔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들이 부러 외식하러 가곤 한다. 칼국수 골목은 신포시장의 퇴락과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하시던 부영식당 주인 할머니는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따라 맛도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럴 때면 부영식당 맞은편의 '엄마분식'을 간다. 그곳은 칼국수에 질려 이따금 잔치국수를 먹으러 간 곳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주인아주머니가 변함없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요즘 새로 생긴 잔치국수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푸짐한 양에, 내게는 연애시절의 추억도 간직한 곳이라 더욱 반갑다. 20년 전의 맛을 간직한 그곳에 이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손을 잡고 그곳에 가서 우리 내외는 잔치국수를 먹는 것이다.

칼국수 맛있는 집은 이곳 말고도 많다. 부평 용갈비 옆 '시골손칼국수'는 늙은 호박을 육수에 섞어 국물 맛이 부드럽고, 경인교대 정문에서 계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사골 칼국수 집도 맛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골국물이 구수하다. 시티은행 인천 본부 빌딩에서 동양장 사거리로 내려오는 대로변의 '손칼국수' 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점심때만 하는데, 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갈 때면 항상 식당 문 닫을 때쯤 혼자 몰래 가서 먹고 오곤 한다. 구월동 로데오 거리 롯데 백화점 뒤편의 '가리비 칼국수' 집도 조개국물이 일품이다. 연수구 영남스포렉스 문화공원 앞에 있는 '최고집' 역시 해물 칼국수와 바지락 칼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국물이 시원하고 면발이 쫄깃하다. 바지락 칼국수에 들어가는 바지락 양이 엄청나게 많다. 중구청 근처 해안동의 '해안 칼국수'는 정말 집에서 만든 칼국수 그대로이다. 멸치 국물의 맛이 어린 시절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맛의 기억을 되살리다"
[인천in 칼럼] 이현식 /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문학평론가)

어떤 음식들은 특정한 시기와 공간, 혹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 세대에게는 자장면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생일이나 졸업식 때 먹었던 자장면 혹은 탕수육 같은 것을 생각하면 여러 느낌과 추억이 되살아난다. 우동 역시 내게는 마찬가지이다.

축현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동인천이 놀이터였다. 지금은 학생교육문화회관으로 바뀌고 학교는 송도에 있는 시립박물관 옆으로 이사해서 옛 자취는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 ‘축현국민학교’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 학교였다가 해방되면서 ‘축현국민학교’로 재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였다. 교사(校舍)도 고풍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건물을 잘 보존하면서 취지에 맞게 활용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거나 그 시절 축현초등학교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곳 4거리에서 내리교회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 끝, 용동 마루턱과 만나는 곳에 명물당이라는 우동집이 있었다. 풀빵과 우동을 파는 그 집에서 먹은 우동이 내게는 유독 기억에 남아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청년 두셋이 가게를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 느낌에도 우동집이나 풀빵을 할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두터운 뿔테 안경을 끼고 뭔가 대학생 풍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목소리도 낭랑하고 맑았다는 기억이 있다. 국민학생이 그런 우동집에 갈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 자주 이용하지는 못했다. 그 집 우동은 얇은 어묵 몇 개가 들어있고 튀김가루를 얹은 것이었는데 국물 맛이 좋았다.

5학년 때인가 학교 앞에 ‘해태의 집’이라는 분식점이 생겼다. ‘해태의 집’은 1970년대 ‘퍼모스트의 집’, ‘삼강하우스’ 등과 함께 여름철 빙과류를 중심으로 음식을 파는 일종의 체인점이었다. 1974년 4월 20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보면 ‘해태의 집’ 체인점이 전국적으로 107개인데 이를 배로 늘리겠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 ‘해태의 집’에서는 우동을 50원에 팔았다. 1976~77년 경이었고 신제품으로 나온 ‘누가바’가 20원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그 ‘해태의 집’에 들어갈 때의 가슴 설렘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향긋한 아이스크림 냄새와 튀김 냄새가 어우러지는 그 곳이 어린 내게는 별천지였던 셈이다. 식탁 곳곳에는 교복을 입고 있는 누나 형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 누나 형들과 같은 부류가 된 듯한 우쭐거림이 있었다. 그 ‘해태의 집’에서 튀김 가루가 얹어진 우동을 먹으며 마냥 행복해 했던 게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번 칼국수 얘기를 했을 때 주변의 어른들께서 왜 ‘신신옥’ 우동은 안 쓰느냐는 말씀들이 있었다. 사실 우리 세대에게 ‘신신옥’ 우동은 기억에 없다. 아마 그때는 영업을 하지 않았거나 아직 어렸던 우리가 들어가기 어려운 집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러 얼마 전에 아드님이 운영하는 ‘신신옥’ 우동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우동을 먹으면서 왜 어른들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신신옥’ 우동은 바로 ‘명물당’이나 ‘해태의 집’ 우동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밀가루 면발에 튀김을 고명으로 얹은 우동은 어린 시절 내가 먹던 우동 맛과 비슷했다. 고명이 많지 않은 것도 그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주안 시민회관(옛 시민회관 쉼터로 지금은 바뀌었다) 4거리에서 석바위 쪽으로 가다보면 경인상가를 지나 ‘청해김밥’이라는 곳이 있다. 맞은편에는 백악관이라는 오래된 나이트클럽이 있다. 그 ‘청해김밥’의 우동이 바로 예전의 우동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청해김밥’의 우동은 우동의 고전적 맛(?)을 간직하고 있다. 어묵이 몇 개 들어가 있고 우동의 면도 ‘명물당’ 우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아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명물당’ 우동이 그립다면 ‘청해김밥’ 우동을 드셔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학원 다닐 때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 배가 출출하곤 했다. 그때 자주 가던 곳이 경인고속도로 부평 인터체인지를 나와 청해부페 4거리에 있는 포장마차 우동집이었다. 그때는 아직 4거리가 개통하기 전이어서 길 구석으로 꽤 큰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밤늦게 포장마차가 영업을 했는데 그곳은 김밥과 기계우동, 짜장면만을 팔았다. 면을 뽑는 기계를 놓고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면을 뽑아 삶고 육수와 고명을 얹어 우동을 내놓았다. 고명으로는 튀김과 파, 쑥갓과 김, 고춧가루를 얹었다. 국물은 멸치국물인데 국물맛이 시원하고 구수해서 항상 성업중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장소에서 주인은 바뀐 채 포장마차가 아닌 실내에서 영업중이다.

그런 데가 인천에는 몇 곳 더 있다. 인천대 제물포 캠퍼스 본관 쪽 대로변에 있는 ‘오목골’ 역시 그런 기계우동 집인데 이곳은 사골국물로 우동 육수를 쓴다. 맞은 편 블록, 그러니까 인천체육관 쪽에서 도화 5거리 방향으로 오다보면 ‘초가야식’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기계우동 집이다. 이곳은 항상 맛있는 열무김치가 준비되어 있는데 육수는 멸치 육수이다. 나는 주로 ‘초가야식’을 간다. 간단하게 요기하기 편하고 값도 싸고 맛이 좋아 노동에 지친 운전기사들이 많이 찾는다. 유흥가 주변에 취객들이 속 풀기 좋게 기계우동을 하는 곳도 있다. 간석동 ‘삼화정’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그런 기계우동집이 있고 만수 3지구에도 기계우동집이 있다. 이런 우동집은 대부분 면을 즉석에서 뽑아 삶아서 멸치 육수와 튀김 고명, 김을 얹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동은 일본 국수인데 이제 우리 먹을거리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요즘은 일본의 정통 우동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시내 중심가에 체인 형태로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먹던 우동이나 기계 우동집들은 싸고 간편하게 먹던 음식들이다.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배도 채우고 쉬어가는 곳이 기계우동집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그런 집들을 아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찾아간다. 먼 후일 아버지가 사준 우동 맛과 인천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건데 그 뜻을 알려나 모르겠다.


이현식 :
1966년 인천생, 연세대 영문과 졸, 연세대 대학원 졸(문학박사). 
1997년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간) 추천으로 등단. 
문학평론가,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으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