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2학년 선배들 몇몇이 새로 뽑힌 1학년 학생회 간부들을 학교가 파하고 난 뒤 불러냈다. 그들은 별말 없이 우리를 자유공원 넘어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길 안쪽의 칼국수 집으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우리가 간 곳이 칼국수 집이었는지도 잘 몰랐다. 일반 가정집 같은 곳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남녀들이 방방의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고픈 배를 쥐고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아직 어렸던 때라 여기저기 식당을 다닌 적도 없었고, 가족끼리 이따금 외식하는 일이 집 밖에서 먹는 음식의 전부였던 때였다. 중학교 때는 기껏해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는 우무나 라면을 최고의 음식으로 알던 때여서 칼국수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릴 때 집에서 만들어 주던 칼국수는 비위가 약했던 내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멸치 국물의 비린 맛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포시장 구석진 골목 안에 있는 칼국수는 그 맛의 차원이 달랐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게 손칼국수는 아니었다. 기계로 뽑은 밀가루 국수를 육수와 함께 삶고 고명을 얹은 것이었는데, 육수 맛이나 그 육수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튀김 고명(이 튀김 고명은 아마 신포시장의 튀김집에서 나온 것인 듯했다)과 다진 양념(일본어투로 말해서 다대기)이 국수의 맛을 내는 비결인 듯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들에게 어른들이 드나드는 식당에 선배들과 함께라지만 우리끼리 간 것도 드문 경험이었고, 신포시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화려한 쇼핑가는 우리를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엄마 손 잡고 가는 신포시장이 아닌, 우리끼리의 신포시장이 비로소 고등학생이 된 우리들에게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요컨대 신포동의 시장과 유흥가가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신포동의 그 칼국수집을 원조로 구석진 골목에 칼국수집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곳은 칼국수 골목이 되었다. 값도 쌌고(보통 300원 곱빼기 500원, 당시 분식집 라면 값과 같았다) 맛이 있었던 그 집을 모방한 곳들이 늘어났는데,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늘어난 그 칼국수집들도 모두 성업을 이루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시절, 300원짜리 칼국수를 먹고 400원짜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냈다. 신포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의 사랑방이었다. 신포동 칼국수 골목(때로는 칼레스토랑이라고도 불렸다)은 비디오 재생기가 귀하던 때, 칼국수를 먹으며 비디오 시청도 가능했던 공간이었다. 한참 히트하던 블록버스터 급 헐리우드 영화를 그곳에 가면 틀어주곤 했다. 음성적으로 비디오를 복사해서 손님을 끌기 위해 틀어주었던 것이라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칼국수를 기다리며 눈요기까지 덤으로 얻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이따금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어김없이 나는 친구들을 그 칼국수 골목으로 데려갔다. 푸짐한 양과 좋은 맛, 싼 값은 친구들을 부담없이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신포동에는 게다가 젊은이들이 이야기를 나눌 커피숍이 정말 많았다. 칼국수를 먹고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어스름이면 애관극장 뒤편 이모집이나 고모집, 누나집 등에서 빈대떡과 삼치를 앞에 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들이켰다. 신포동은 젊은 우리들의 욕망과 지향 없는 열정을 풀어주던 곳이었다. 젊었을 때 신포동을 배회하다 가끔씩 '밤새 걸어도 이런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만이 계속되는 곳은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차피 도시의 아들과 딸들이었던 우리에게 밤은 너무 짧고 신포동은 너무 작았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어 머리가 커지고 음식 맛도 볼 줄 알면서 신포동 칼국수의 얕은맛에 조금씩 싫증이 날 무렵, 내 눈에 띄었던 곳이 신포동 횟집 골목에 있던 '부영식당'이다. 멸치국물에 다진 양념을 얹고 계란을 풀어내던 칼국수와 수제비는 어렸을 때 추억을 간직했으면서도 맛은 더 좋았다. 대학원 다닐 때 연애시절 아내와 처음 간 그곳을 지금도 가끔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들이 부러 외식하러 가곤 한다. 칼국수 골목은 신포시장의 퇴락과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건강하시던 부영식당 주인 할머니는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에 따라 맛도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럴 때면 부영식당 맞은편의 '엄마분식'을 간다. 그곳은 칼국수에 질려 이따금 잔치국수를 먹으러 간 곳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주인아주머니가 변함없이 우리를 맞이해준다. 요즘 새로 생긴 잔치국수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푸짐한 양에, 내게는 연애시절의 추억도 간직한 곳이라 더욱 반갑다. 20년 전의 맛을 간직한 그곳에 이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 손을 잡고 그곳에 가서 우리 내외는 잔치국수를 먹는 것이다.
칼국수 맛있는 집은 이곳 말고도 많다. 부평 용갈비 옆 '시골손칼국수'는 늙은 호박을 육수에 섞어 국물 맛이 부드럽고, 경인교대 정문에서 계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사골 칼국수 집도 맛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골국물이 구수하다. 시티은행 인천 본부 빌딩에서 동양장 사거리로 내려오는 대로변의 '손칼국수' 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점심때만 하는데, 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갈 때면 항상 식당 문 닫을 때쯤 혼자 몰래 가서 먹고 오곤 한다. 구월동 로데오 거리 롯데 백화점 뒤편의 '가리비 칼국수' 집도 조개국물이 일품이다. 연수구 영남스포렉스 문화공원 앞에 있는 '최고집' 역시 해물 칼국수와 바지락 칼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국물이 시원하고 면발이 쫄깃하다. 바지락 칼국수에 들어가는 바지락 양이 엄청나게 많다. 중구청 근처 해안동의 '해안 칼국수'는 정말 집에서 만든 칼국수 그대로이다. 멸치 국물의 맛이 어린 시절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