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트레킹)/걷기 정보

문경새재

박연서원 2010. 7. 8. 11:25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문경새재

주흘관·책바위·수옥폭포… 굽이굽이 옛이야기 숨쉰다

바야흐로 걷기의 전성기다. 걷기여행, 등산, 트레킹 등 걷기를 기본으로 하는 여가 생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걷기 좋은 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나라 옛길의 대표격인 문경새재는 그야말로 길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가지듯, 문경새재 역시 오래된 길이 내뿜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하다.

▲ 새재를 넘어 충주 고사리에서 만난 수옥폭포. 깎아지른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울창한 숲이 장관이다.
진우석 여행전문작가

문경새재가 특별한 것은 다른 옛길과 달리 길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험준한 백두대간 사이로 뻗은 흙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 활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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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처럼 도로 닦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라에서 문경새재가 흙길로 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70년대 국토개발을 진두지휘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유독 이 고갯길만큼은 포장하지 말라고 지시해 천만다행으로 남은 흙길이다. 새재는 문경 쪽 주흘관(제1관문)에서 고갯마루의 조령관(제3관문)까지 6.5㎞가 비포장이고 반대편 충주 쪽은 포장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문경 쪽에서 시작해 조령관까지 갔다가 되돌아 내려오곤 한다. 하지만 새재의 전모를 살펴보려면 고갯마루를 넘어 고사리 수옥폭포에서 마무리하는 코스가 정석이다.

문경새재 주차장을 지나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란 간판을 만나면서 마음이 설렌다. 그 길을 따르면 왠지 하늘까지 올라갈 것 같은 기분이다. 옛길박물관을 지나면 돌로 쌓은 성문인 주흘관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진다. 주흘관은 그 뒤로 암봉이 두드러진 조령산(1025m),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1075m)과 어울려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물씬 풍긴다. 성문 앞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정겹다.

나는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는 뜻인 새재는 조선 태종 때에 새로 뚫린 길이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새재 외에도 죽령과 추풍령, 계립령(하늘재) 등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를 선호했다. 죽령은 너무 멀었고, 추풍령은 과거시험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의 선비들조차 멀고 먼 이 길을 휘휘 돌아갔다고 하니, 새재는 곧 소망의 길이란 믿음이 조선 팔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주흘관을 지나면 왼쪽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했던 KBS 세트장이 나온다. 마치 민속촌처럼 기와와 초가가 적당히 섞여 있는데, 입장료 2000원을 받는다. 다시 호젓한 길을 따르면 조령원터와 교구정이 차례로 나타난다. 조령원은 옛 관리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고 교구정은 경상도 감찰사 이취임식이 열리던 곳인데, 그 앞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일품이다. 교구정 앞에서는 잠시 계곡 구경을 하는 것이 좋다. 숨어 있는 용추약수에서 목을 축이고, 계곡을 좀 오르면 용추폭포에 닿는다. 팔왕폭포라고도 부르는 이 폭포는 암반이 발달해 계곡미가 수려하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다시 길을 나서 500m쯤 가면 훈민정음으로 쓴 ‘산불됴심’ 표석이 눈에 들어오고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조곡폭포가 나타난다. 이곳은 문경시에서 만든 인공폭포지만 여름철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폭포를 지나면 두번째 관문인 조곡관을 만나게 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미끈한 금강소나무들이 반기고 드문드문 물박달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큰애기 손질에 놀아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은 새재아리랑 비석 앞. 아리랑 가락에 발걸음을 맞추면 어깨춤이 절로 난다.

동화원휴게소를 지나 ‘장원급제길’이라는 소로로 접어들면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급제를 기원하던 ‘책바위’가 나온다. 돌을 책처럼 쌓아놓은 책바위는 선비들이 하나 둘 찾아와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고, 오늘날에도 해마다 입시철이면 학부모들이 찾아와 합격을 기원한다고 한다.

책바위를 지나면 조령관이 서 있는 새재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이곳은 제법 널찍한 공터로 조령산과 주흘산 일대가 시원하게 보인다. 관문을 지나면 이제 충주 땅인데, 제일 먼저 포장도로가 나타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팍팍한 도로를 좀 내려가면 조령산자연휴양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휴양림을 지나면 수려한 신선봉(967m)이 올려다보이는 고사리 마을에 이른다. 주차장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수옥폭포다. 계곡에 발을 담그며 약 20m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새재 걷기를 마무리한다. 주흘관∼고갯마루∼수옥폭포까지는 약 10㎞, 4시간쯤 걸린다.

●가는 길과 맛집

동서울터미널에서 문경 가는 버스는 오전 6시30분∼오후 8시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2시간쯤 걸린다. 문경새재 관문 앞의 ‘소문난집’(054-572-2255)은 청포묵조밥과 도토리묵조밥을 잘하고, 고사리에서 가까운 수안보의 투가리식당(043-846-0575)은 올갱이국밥이 소문난 집이다.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054)571-0809.

<여행전문작가>

 

[김화성 전문기자의 &joy]

과거길 선비도 임진년 왜군도 마음 졸이며 발 내딛던 벼랑길

문경새재 길 걷기(토끼비리∼제3관문)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 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다산 정약용의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에서>》

 

반들반들한 토끼비리길.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아 바닥이 빤질빤질하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비좁고 험한 ‘하늘길’. 강가 벼랑의 바위를 깎거나 파내 만들었다. 아차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토끼를 따라 길을 트면서 유래됐다.김시습 이황 이율곡 류성룡 김만중 정약용 등 수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아슬아슬 가슴 쓸어내리며 건넜다. 임진왜란 땐 왜군들이 이 길을 따라 쳐들어왔고, 조선통신사도 이 길을 따라 일본을 오갔다. 길은 민족의 발자취이다. 역사다. DNA다. 문경=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요, 물을 만나면 나루이다. 산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요,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 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 선생(1804?∼1866?)의 말이다.

그렇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가 주흘산(1106m)과 조령산(1026m)을 만나 이뤄진 고갯길이다. 높이는 642m. 한양에서 영남으로 내려갈 때 좌청룡 주흘산, 우백호 조령산 사이로 난 길이다. 새재 등마루는 조선시대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곳이다.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한순간에 운명이 바뀐다. 북쪽으로 가면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남쪽으로 가면 낙동강물이 된다.

문경새재길은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3, 4번 척추신경이나 같다. 나라의 출입문이다. 사람의 목구멍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이 막히면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 새재가 막히면 나라경제가 온통 동맥경화증에 걸린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 동래읍성에서 서울 숭례문에 이르는 길이다. 조선의 등뼈길이다. 보통 걸어서 보름 정도 걸렸다. 950여 리(380km) 길에 도중 거치는 읍이 68개나 됐다. 도로의 폭은 3∼10m 정도. 남한강과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졌다. 문경새재는 바로 남한강과 낙동강 들머리가 마주치는 곳이다. 으르렁대는 청룡(남한강)과 황룡(낙동강)이 서로 머리를 들이대어 우뚝 솟았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 때 넘는 고개는 문경새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잇는 죽령(696m)과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잇는 추풍령(221m)도 있었다. 과거길 선비들은 반드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을 오갔다.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聞慶(문경)’은 글자 뜻 그대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게 된다’는 믿음을 줬던 것이다. 오죽하면 호남 선비들조차 에둘러 이곳을 통해 한양에 올라갔을까.

과거시험은 어차피 낙방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며 새재 마루에서 속울음을 울었다. 안동선비 유우잠(1575∼1635)도 그랬다. 그는 낙방 하향길에 새재 마루에 올라 진한 아픔을 토해냈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새재는 왜 새재일까.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조령·鳥嶺)’여서일까? ‘(억)새 우거진 고개(초점·草岾)’라는 뜻일까. 아니면 ‘하늘재(계립령·계立嶺)와 이우리재(이화령·伊火嶺) 사이(새)에 있는 재’라는 뜻인가. 어떤 이는 하늘재(156년 열림)에 이어 ‘새(新)로 연 고개’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문경새재 제3관문 아래에 있는 책바위. 과거길 선비들이 급제를 빌던 곳이다. 요즘은 ‘합격, 취직, 건강, 사업번창’ 등을 비는 사람들로 붐빈다.

문경새재길은 사실상 토끼비리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결코 제1, 2, 3관문이 있는 새재골짜기만이 아니다. 토끼비리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가장 험한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허리에 실낱같이 이어진 벼랑길이다.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와 구미∼상주∼함창∼점촌을 거쳐 문경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다. 문경읍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거리이다.

왜 토끼비리길인가. 여기엔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관계가 있다. 왕건이 남쪽정벌을 하러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길이 끊겼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달려가는 게 보였다. 왕건은 즉시 토끼가 갔던 길을 따라 길을 텄다. 그때부터 이 길이 ‘토천(兎遷)’ ‘관갑천(串岬遷)’ ‘관갑잔도(串岬棧道)’로 불리게 됐다.

잔도(棧道)란 강가의 벼랑 부분에 선반처럼 대롱대롱 달아서 만든 하늘길을 말한다. 영남대로상에는 문경 토끼비리, 밀양 작천, 양산 황산천 등 5곳에 잔도가 있다. 토끼비리의 ‘비리’는 ‘벼루(벼랑)’의 문경 토박이말이다.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말한다. 한자로 ‘천(遷)’은 ‘벼랑’이다.

 

일제가 송진을 채취한 흔적. 늙은 소나무 줄기가 V자로 굵게 상처가 나 있다.

토끼비리길은 바위를 깎거나 파내 일부러 만든 벼랑길이다. 조선의 차마고도이다.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층암절벽을 깎아냈다. 1000여 년 동안 사람들 발길이 닿아 바닥이 반들반들하다. 개코같이 빤질빤질하다. 발을 내딛기 쉽게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낸 곳도 눈에 띈다. 폭은 0.3∼1m. 발 한번 삐끗하면 천길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죽었다. 과거길 선비들도 예외가 아니다. ‘가마꾼과 마차도 이 길을 오갔다’는 기록도 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좁아졌다. 흙과 바위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꼬불꼬불 양창자 같은 길이여/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키도 하여라/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

<서거정(1420∼1488)의 ‘관갑잔도’>

‘요새는 함곡관(函谷關)처럼 웅장하고/험한 길 촉도(蜀道)같이 기이하네/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다/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어변갑(1380∼1434)의 ‘관갑잔도’>

토끼비리길은 현재 2km 정도가 남아 있다. 이 중 1km는 통행금지 구간이다. 국가명승 제31호로 지정됐다. 통행허용 구간(1km)도 눈비가 오면 위험하다. 닳고 닳은 돌바닥(편마암)이 햇살에 빛난다. 몽돌 위로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토끼비리길은 석현성 안으로 이어진다. 석현성은 고모산성(姑母山城)의 날개성이다. 고모산성 남문과 연결돼 있다. 고모산성에선 ‘경북제일경치’라고 불리는 진남교반(鎭南橋畔)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교반은 ‘다리 주변’이라는 뜻이다. 오정산-영강-길(국도 3호선)이 태극 모양처럼 굽이굽이 친다. 황홀하다. 산태극 물태극 길태극의 삼태극이다.

 

조선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조심비. 높이 1.83m, 폭 0.75m 크기. 옛 한글 ‘됴심(조심)’이란 글자가 애틋하다.

석현성 돌고개 부근엔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었던 예천 삼강주막과 문경 영순주막이 복원돼 있다. 돌고개 성황당 앞엔 불에 탄 ‘반쪽 느티나무’가 있다. 1896년 의병장 이강년 선생(1858∼1908)이 왜군과 싸운 흔적이다. 성황당 상량문엔 ‘새재의 험준함 남쪽 왜적 막았도다. 평평한 들판이 마을에 잇닿았고, 이정표 사이로 시냇물 감아 돈다. 나그네는 나무 아래서 쉬어가고…’라고 적혀 있다.

문경새재 골짜기엔 3개의 관문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4년 제2관문(조곡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고, 제1관문(주흘관)과 제3관문(조령관)은 1708년 완성됐다. 제1, 3관문 현판 글씨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1906∼1989)이 쓴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병사 1만8500명을 이끌고 이 고개를 넘었다. 4월 26일 상주가 함락되고 4월 27일 문경성이 무너졌다. 왜군은 4월 28일 충주까지 진출했다. 조선 팔도대원수 신립 장군(1546∼1592)은 ‘바다의 울돌목’ 같은 이곳을 스스로 버렸다. 충주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는 바람에 병사 8000명과 함께 떼죽음을 당했다.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이룬 호리병같이 좁은 해역이다.

새재골짜기엔 일제 만행의 흔적이 많다. 용머리모양의 혈을 자르고 쇠말뚝을 박은 자리가 뚜렷이 남아 있다. 줄기에 V자 형으로 상처 난 노송도 곳곳에 눈에 띈다. 송진을 받아낸 흔적이다.

엄동설한 새재골짜기는 적막강산이다. 가끔 고갯마루 부근의 책바위에 발길이 닿는다. 과거길 선비들이 급제를 빌던 바위이다. 요즘은 ‘대학입시 대박’을 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와 비슷하다. ‘임용합격기원’ ‘만사형통’ ‘사랑하는 아들 합격’ ‘사업번창’ ‘수능대박’ ‘우리 딸 좋은 짝 만나게’ ‘자기야 살 빼서 근육 보게 해주라’ ‘백살 살자’ ‘애기 점지해 주세요’ 등의 리본이 주렁주렁하다. 예나 지금이나 한세상 살기 험하다. 하기야 나라가 언제 제대로 백성들 생각한 적 있었던가. 밥은 하늘이요 생명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가는 길


▼교통=문경은 문경시(점촌과 통합)와 2개읍(문경읍, 가은읍)으로 돼 있다. 문경새재는 문경읍에서 가깝다. 문경시까지 가면 다시 돌아나오게 된다.

▽승용차=서울→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나들목→문경읍→제1관문

▽버스=동서울터미널→문경읍(2시간 소요, 배차간격 30분), 강남터미널→문경읍(배차간격 40분)

▼토끼비리길=토끼비리길은 문경읍에서 문경시 방향으로 12km 떨어진 곳이다. 승용차라면 진남휴게소(054-572-1211)에 주차해 놓고 그 뒤쪽으로 걸어가면 나온다. 문경읍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도 진남휴게소까지 가면 된다.

▼먹을거리
▽약돌돼지양념구이=문경은 약돌(게르마늄 셀레늄 세륨 홀뮴 성분을 함유한 거정석)을 갈아 먹여 키운 약돌돼지가 유명. 새재할매집(054-571-5600), 광성식당(054-572-3466). 정육점에서 약돌돼지고기를 사서 가지고 가면 요리(1인당 6000원)해주는 식당도 있다. 문경읍 버스터미널 앞 돼지네막창(054-571-0703). 정육점은 식당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문경새재 주변=제3관문휴게소(054-571-5858)의 산채전이 유명. 산채전(사진)은 두릅, 취나물, 참나물, 방풍취 등 18가지 나물을 도토리가루 밀가루로 부쳐낸다. 1만 원. 솔잎 인삼 더덕을 섞은 더덕동동주(6000원)와 토종닭 백숙(1관문에서 출발할 때 예약 필수)도 이름났다. 제3관문까지 가기 힘든 사람들은 제2관문 못 미쳐 여궁폭포휴게소 소요산방(054-572-2247)을 찾는다. 시인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부부의 색소폰 실력이 빼어나다. 시와 차, 음악이 흐르는 낭만찻집.

▼온천=문경기능성온천(054-572-3333), 문경종합온천(054-571-2002)

▼특산물=문경은 오미자(전국 45% 생산)의 고장. 문경농특산물직판장(054-571-9600). 택배 가능.

▼“신라 고모산성 엉터리 복원” 이창근 씨 지적에 공사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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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산성은 신라가 5세기경 쌓은 산성이다. 신라의 한강유역 전진기지이자 고구려 백제로부터의 방어용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300m. 새재와 가은에서 흘러드는 두 개의 하천(조령천과 가은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어 영강이 된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이며 영강의 들머리인 셈이다. 한눈에 봐도 군사요충지이다.

현재 고모산성은 1300m 중 800m가 복원돼 있다. 문제는 복원된 800m 성곽이 정체불명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산성이 아니라 고려나 조선시대 산성 같은 느낌이다. 문경시가 제대로 된 고증 없이 마구잡이로 복원공사를 한 탓이다. 결국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던 남문이 사라져버렸다. 무너져 내린 성벽도 마구 걷어내는 바람에, 곳곳에 남아 있던 신라시대 흔적이 깡그리 지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 엉뚱한 성곽이 들어섰다.

그나마 500m 구간이 보존된 것은 향토사가 이창근 씨(66·사진)의 노력 덕분이다. 이 씨는 2008년 10월부터 ‘엉터리 복원공사’ 중지를 외치며 끈질기게 관계기관에 호소했다. 결국 문화재청으로부터 ‘정비하지 않은 기존 성벽 구간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시공회사 시공자 문경시 공사 관계자 등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제재 조치를 받았다.

이 씨는 문경토박이로 문경문화재의 ‘열혈 파수꾼’이다. 요즘도 문경지역 문화해설사로 활약하며 틈틈이 지게, 다듬이, 등잔 등 옛날 생활도구를 수집한다. 이 씨는 안방 구석에 ‘조총과 일본도를 쇠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 있을 정도로 피가 뜨겁다. 일제 만행을 한시라도 잊지 말자는 다짐의 표시인 것이다.

“문화재는 원래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굳이 손을 대려면 표시 안 나게 감쪽같이 해야 한다. 100억 원 가까이 든 돈도 돈이지만, 한 번 사라진 신라 천년고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고모산성에 오는 사람들은 ‘엉터리로 복원된 성곽과 남아 있는 옛 신라 성곽을 비교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역사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입에서 입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문경아리랑 같은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내가 문경아리랑 한 자락 불러 보겠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솔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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