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에 나누고 싶은 좋은 글]
지난 달 28일은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였습니다.
한 해의 첫번째 국가 공휴일이기도 하지요.
전국적으로 전몰장병을 위한 추모식과 아울러 재향군인들의 퍼레이드도 있었습니다.
워싱턴 DC의 알링턴 국립묘지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헌화를 하는 엄숙한 행사도 있었습니다.
그날 CNN 뉴스를 보다가 가슴 뭉클한 사진 한 장을 보았는데 잠시 그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애틀란타의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브레이브스 구장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메모리얼 데이에 애틀란타에는 비가 내렸나봅니다.
야구장에 있는 돌아오지 못한 장병을 위한 빈의자 옆에 ROTC 정복을 입은 한 흑인 학생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야구 구경을 온 관중인 한 백인 중년 남성이 우산을 펴서 그 학생 머리 위에 씌워주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 정복을 입은 ROTC 학생이 젖지 않도록 우산을 펴들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 한 장이 내재적인 미국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운동 경기장에는 빈의자를 하나 남겨두고 거기에 돌아오지 못한 장병을 위한 의자라고 팻말을 붙여놓았습니다.
영어로 POW - MIA 라고 합니다.
POW는 전쟁포로(Prisoner of War)의 약자이고, MIA(Missing in Action)는 전장에서 실종된 장병의 약자 입니다.
미국인들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장병 뿐만아니라 전쟁포로와 실종된 군인들까지 잊지않고 챙깁니다.
그들의 국가를 위한 봉사를 잊지말자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경기장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빈의자를 마련하여 놓습니다.
돌아와서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는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메모리얼 데이에 애틀란타 브레이브즈 구장에 있는 그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빈 의자를 찾아와
선배(?) 병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 ROTC 학생의 경건한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민간인인 중년 남성이 ROTC 학생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이 모습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나라를 위한 마음은 한결같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었습니다.
미국에 살다보면 자기 집에 국기를 항상 게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검은 색갈의 POW-MIA 깃발을 게양하고 있는 집들도 심심찮게 발견합니다.
공항에서 탑승할 때, 임신부와 장애 그리고 군인을 제일 먼저 탑승시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존경하는 미국인의 모습과 군인이 무시 당하는 한국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 착잡함을 느낍니다.
6. 25 당시 중공군의 침략으로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군의 전쟁사에 가장 험악한 전투로 기록되는 이 전투에서 미군 1029명이 전사하고 4893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이 장진호 전투는 흥남철수로 이어집니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들이 거의 90세가 되었습니다.
시카고지역 생존자들의 증언은 가슴을 도려내듯 아픕니다.
몇 개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1) 너무나 추운 날씨에 거의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한 병사가 더 걸을 수 없어서 주저앉아 군화를 벗으니 군화와 함께 발가락이 쑥 빠져 버렸다.
2) 네이팜탄 파편이 바지에 떨어져 불이 붙었는데 따뜻한 것이 그리도 좋을 수 없었다.
3) 중공군의 총알이 다리를 관통하였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피가 얼어붙어 자연지혈이 되어 살아날 수 있었다.
4) 부상병을 데리고 나오는데 자신들 때문에 중공군의 추격을 받게되니 부상병들이 병사들의 등을
떠밀며 '너희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고 하소연 하여,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부상병들을 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이 자유를 지킬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모두 잊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이 수학여행 중 해난사고로 죽은 사람들보다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도 기억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놓고 살면서 학생들에게 그들의 헌신과 희생 때문에 이 나라가 보전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저으기 염려되는 때에 우리 국민 모두 현충일을 맞이하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오늘은 제71회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머리 숙여 호국영령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끝까지 지켜 달라고..."
출처:
캐나다 한국문인협회(KWAC)
글쓴이: 김혜진
■ 셈 워커 대위
하버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이야기를 썼다.
글이 나간 후 많은 분들이 "이런 분이 계신 줄 몰랐다", "너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 주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반응들이 내게는 조금 충격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밥을 먹으며 당연하게 누리는 이 나라의 평범한 일상이, 실은 남의 나라 청년들의 찢어지는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철저하게 잊고 살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먹먹한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 또 다른 기가 막힌 사연 하나를 더 써볼까 한다.
1950년 여름, 6.25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대한민국은 멸망 직전이었다. 임시 수도 부산이 지척인 낙동강 방어선.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후퇴를 입에 올리는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권총을 빼들며 그 유명한 명령을 내린다.
"Stand or Die (버티거나, 아니면 죽어라)."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바다로 쫓겨나 학살당할 것이다.
덩케르크는 없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그는 그 절망적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며 기어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살려냈다.
우리가 아는 서울 워커힐(Walkerhill) 호텔의 이름이 바로 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은 익히 알려진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시 그 끔찍한 전장에는 8군 사령관인 아버지 워커 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인 24세의 샘 워커(Sam S. Walker) 대위도 미 제24보병사단의 중대장으로 소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함께 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고의 장성이 자신의 귀한 외아들을 가장 위험한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비극은 1950년 12월 23일에 찾아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던 매서운 겨울, 전선을 시찰하러 이동하던 워커 장군의 지프차가 서울 도봉구 부근에서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전복되었다. '낙동강의 영웅' 워커 장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최전방에서 중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특별 지시를 내린다.
"부친의 유해를 모시고 당장 미국 본토로 귀환하라."
아버지가 전사했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 최고 사령관이 직접 귀국을 명령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24살의 청년 장교가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합당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참호 속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은 청년 장교는, 그 달콤하고도 합당한 생존의 동아줄을 단칼에 찢어 버린다.
샘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이렇게 타전했다.
"나의 부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중대장인 제가 어찌 부하들을 이곳에 버려두고, 나 혼자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차가운 관을 홀로 태평양 너머 알링턴 국립묘지로 돌려보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대신, 그는 다시 수류탄을 챙기고 눈 덮인 전방의 참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타국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고, 아들은 자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장례식마저 포기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모를 나라에 총과 대포만 보낸 것이 아니다.
미국 상류 사회의 가장 고결한 도덕과 핏값을 함께 보낸 것이다.
이것이 얄팍한 이념 장사꾼들이 틈만 나면 훼손하려 드는 '한미동맹'의 진짜 밑바닥에 흐르는 묵직한 본질이다.
화사한 봄꽃이 피어나는 출근길.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는 이 5월의 아침은 아버지의 관을 태운 비행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다시 총을 쥐었던 24세 이방인 청년의 그 거룩하고도 고독한 뒷모습 위에 세워진 기적이다.
위기가 닥치면 특권 뒤로 숨기 바쁜 비루한 시대에, 진짜 어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가슴을 서늘하게 짓누른다.
[기록]
"My men are fighting hard. I cannot leave them. I will stay here."
[해석]
내 부하들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1950년 12월, 부친상으로 인한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샘 워커 대위가 맥아더 장군에게 타전한 내용입니다..
◇박주현 변호사
■ 한국전 참전한 룩셈부르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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