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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르누아르 작품

박연서원 2020. 5. 15. 10:21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작품 소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첫번째 직업은 도자기에 무늬를 그려 넣는 일이다. 그렇게 도자기에 무늬를 넣어 받은 월급으로 미술 교습을 받은 만큼 미술에 대한 학구열 또한 뛰어났다. 그렇게 미술 교습을 받으면서, 클로드 모네 ,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나게 되었고, 파리 살롱전에 전시를 하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작품을 파괴해버려서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1867년 그 당시 애인을 그린 <양산을 든 리즈>가 살롱전에 통과하게 되면서, 작업실이 아닌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라는 것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풍경화인 외광회화로 유명해졌고 양산을 든 리즈에도 외광회화에 일조하기도 했다.

 

양산을 든 리즈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슬픈 그림은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이다. 대체적으로 낙천적이였던 그는 자신의 애인을 그리거나, 어릴 적부터 커피잔과 숙녀용 부채를 장식해주고 돈을 벌었기도 했고, 르누아르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라서, 그림에 대한 토론보다는 그리는 행위를 즐기기도 해서, 그의 감성이 그대로 그림으로 묻어 나, 이쁜 그림이 대체적으로 많다. 귀여운 동물들, 사랑스런 소녀, 아름다운 여인, 꽃 이러한 부분이 르누아르 그림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르누아르 작품들

 

고양이를 안은 소녀

 

흰 원피스 차림의 소녀가 고양이를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는 행복한듯 미소를 짓기도 하고, 고양의 색감과 소녀의 머리색이 같아서 마치 통일감을 주는 모습 또한 연상케 한다.  이 소녀는 화가 에두아르 마네 동생 외젠 마네와 모리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한다.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주문했고, 고양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선택했다고 한다.
르누아르는 늘 낙천적이고 사랑스러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였기에, 고양이처럼 미소짓고 있는 그림은 드물다는 평도 있었을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행복해지고, 그런 행복을 전하고자 했던게 그의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소년과 고양이

 

등을 돌린채 고양이를 쓰담는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소년이라고 한다. 이 소년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정보가 전혀 없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모델로 고용한 소년이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르누아르가 남자를 모델로 삼은 유일한 누드화이기도 하고, 당시 남자 소년의 뒷모습 누드화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트파티에서의 오찬

 

1880년 여름, 살롱 전시의 리뷰에서 에밀졸라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사실적인 현대 생활을 주제로 대형 작품을 그려볼 것을 권유하게 되고, 르누아르는 에밀졸라의 말을 실현이라도 하듯이, <보트파티에서 오찬>을 그려낸 것이다. <보트파티에서 오찬>은 르누아르와 친구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뱃놀이를 하던 센 강변의 한 식당에 모여있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거라고 한다. 

르누아르의 그림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이 그림에서도 르누아르처럼 밝고 쾌할한 모습의 친구들이 보인다. 마치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떠는 장면이 연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 자신의 친구들과 측근들을 그려 넣었는데, 맨 왼쪽 작은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가 르누아르 여자친구 알린느 샤리고라고 한다. 훗날 르누아르의 아내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정확하게 인물들을 묘사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한층 자유로운 붓터치와 색상 색조 그리고 밝은 노란색, 빨간색을 사용하면서 밝은 이미지를 끌어내려고 노력한것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술병과 유리잔 과일에 반사되는 빛과 대조되기도 하고, 차가운색과 어두운 톤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전반적으로는 밝고 산뜻하지만 따뜻하고 그들만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풍요로운 분위기도 자아낸다.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

 

르누아르의 최고의 걸작이라 손꼽히는 <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 > 시끌벅적하고 가벼운 보헤미안 분위기의 댄스 홀 풍경을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1877년 제 1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비평가에게 극찬을 받으며 최고의 걸작으로 칭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몽마르뜨 언덕 풍차 근처 작은 정원에서 열린 무도회에 따스한 햇빛이 내려쬐고 있고, 금발머리의 연인들은 모두 웃음을 띄고 남성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추면서 매우 흥미롭고 따스한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들이 쓴 베레모와 모자 색을 강조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표현한 점도 특이하다.

몽마르뜨 언덕의 댄스홀에서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보통 두명의 인물을 주로 그렸던 르누아르는 < 물랭 드 라 갈래트의 무도회>를 제작하기까지 춤추는 사람들을 빠른 스케치로 그리고 색을 입혔다고 한다. 화면 앞에 있는 사람들부터 화면 뒤에 작게 보이는 사람까지 균형감 있게 빠르게 그려낸 작품으로, 햇빛에 반사된 잎사귀까지 표현하면서 최고의 걸작이라 칭할 수 있다.

 

책읽는 소녀

 

르누아르는 알린느 샤리고와 결혼 후부터 그림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어른들의 모습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헝크러진 금빛 머리카락, 레이스 목장식, 머리끈 턱을 괴고 책을 보는 모습, 포동포동한 피부 등 어린아이게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을 그대로 그려내기도 했다. 르누아르의 작품 <피아노치는 소녀들> 과 <책읽는 소녀>는 동일한 모델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아함과 순진함을 고정시키는 작품이기도 하고, 르우아르가 가정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화가라 불리울 만큼그의 그림은 밝고 화사하며 아름다운 그림들 뿐이며, 따뜻한 색을 즐겨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따뜻한 느낌이 느껴지게 한다.
너무나 가난했지만 희망을 그렸고, 아름다운 빛을 묘사했으며 특히 검정색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결국 르느와르의 그림은 삶의 환희와 기쁨이 묻어나는 빛과 색채의 예술임에 틀림이 없다.

 

르느와르처럼 신화로 남은 화가는 많지만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낙천적으로 살았던 화가는 없는 것같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못했으나 지금은 범작마저 몇백억원에 팔리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고, "영광을 막 잡으려는 순간에 죽다"라는 묘비명처럼 서른여섯에 요절한 모딜리아니도 그렇다.
물랭루즈의 꼽추 화가 툴루즈 로트렉, 멀고 먼 남태평양 타이티까지 흘러갔던 고갱, 살아 생전에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성공과 명예, 부를 다 얻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다가지 못한 피카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 되어야 한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풍경일 때는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그림, 여체를 그린 그림일 때는 그들을 껴안고 싶어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철학으로 삶의 기쁨과 환희를 현란한 빛과 색채의 융합을 통해 무려 5,000 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젊은 시절 가난했던 이유로 모델을 구하지 못해 인물화를 그리지 못했던 르느와르는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전기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결국 40세 즈음에 르느와르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 Aline이란 여성이었다.

1890년대 말엽에 이르러서는 지병인 관절염이 점점 악화되어 손에 붓을 묶어 놓고 그릴 정도로 부자유스러운 몸이 되었지만 누드화를 비롯해 왕성한 작품활동은 계속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들은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차라리 작품활동을 하지않은 편이 좋았을지 모르겠다.
은퇴할 시기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도 멋진 일이기 때문이다.

 

후기에는 그의 부인 Aline(1860~1915)을 비롯해 Aline의 먼 친척이었던 가브리엘(1878~1959)과 데데라는 별명을 지닌 앙드레 외슐렝이 르느와르(1841~1919)의 모델 역활을 나누어 맡았다.

가브리엘은 둘째 아들 장이 태어나던 1894년 보모로서 르누와르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은 후 1914년 미국인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20년간 르느와르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주된 모델이었다.

르느와르가 아무리 전문모델을 싫어했다지만 아내와 사촌지간이었던 가브리엘에게 누드 모델 노릇까지 요구한 것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하지만 소위 예술을 위해 헌신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르느와르의 아내 Aline의 질투로 르느와르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앙드레 외슐렝도 르느와르의 마지막 누드 모델이었지만 르느와르가 세상을 떠난 후 둘째아들 장과 결혼을 하여 르느와르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아이러니한 일도 생긴다.
하지만 두 모델 모두 르느와르와 사랑하는 관계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림이란 건 그렇지 않은가, 벽을 장식하려고 있는 거야. 그래서 가능한 한 화려해야 해.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이라네. 그렇지, 예쁜 것...
그림이 위대한 동시에 즐거울 수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평범한 미술품 수집가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 같은 이 말은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가 했다.
그는 말 값을 하듯 평생 아름답고 즐거운 장면만을 그렸다.
슬픔이나 고단한 삶의 찌꺼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의 그림들을 보자면 화가의 일생도 그림처럼 행복했거니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느와르 자신은 가난에 쫓기고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을 살았다.

 

삶이 고단해서였을까? 그의 그림은 누구보다도 밝고 아름답다.
여인들은 터질 듯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며 농염한 살내음을 풍기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과일은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먹고 마시고 떠드는 유쾌함은 다른 어느 인상주의자의 그림보다도 실감난다.
인생에 괴로운 것이 많다면 그림까지 그럴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의 좌우명대로 르느와르는 아름다운 것에 설레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냈다. 화가가 남긴 말은 솔직하다.

 

"아! 저 젖가슴! 얼마나 부드럽고 중량감 있는가!
금빛 색채를 띠며 밑으로 처진 저 아름다운 기복...
만일 젖가슴이 없다면 내가 과연 인물들을 그렸을까 의심스러워..."

 

르느와르가 여성의 누드화를 자주 그렸던 탓에 그가 여성을 존중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여성의 육체적인 면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초상화 작품들을 보면 그가 모델들에게 진심어린 찬사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녀들의 시선, 태도, 미소는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꿈에서도 가질 수 없는 능력, 즉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네"라고 르느와르는 말했다. 그러나 르느와르는 이러한 말을 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과 초상화를 통해 이 사실을 직접 증명해보였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의 초기 작품들은 반짝이는 색채와 빛으로 가득 차있는 현실생활의 단편을 그린 전형적인 인상파 그림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 중엽부터는 인상파와 결별하고 초상화와 인물, 특히 여인상(예를 들면〈목욕하는 여인들 Bathers〉, 1884~87)에 좀더 엄격하고 형식적인 기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는 만성류머티즘으로 결국 붓을 손가락에 묶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프랑스의 화가

 

자화상(1899) / 캔버스에 유화 / 41.3×33.7cm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젊은시절

르누아르는 장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7명의 자식을 거느린 양복장이였던 아버지는 1845년경 가족을 데리고 파리로 이주했다. 르누아르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13세 때 도자기 공장에 보내어 훈련을 시켰다. 이곳에서 그는 접시에 꽃다발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뒤에는 부채에 그림을 그렸고, 그 다음에는 교회에 걸 헝겊 패널에 종교적 주제를 다룬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솜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릴 때면 커다란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돈을 모은 그는 1862년 에콜 데 보자르의 야간부에서 소묘 및 해부학 강의를 듣는 한편, 19세기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제자였던 스위스의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 교습을 받게 되었다. 스승의 전통적 화풍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화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얻기 위해 그는 아카데미 예술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르누아르는 몇 달 뒤 화실에 들어온 세 학생, 즉 알프레 시슬레와 클로드 모네 및 프레데리크 바지유에게 훨씬 더 친밀감을 느꼈다.

이들은 모두 현실생활에 좀더 충실하고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을 꿈꾸고 있었다. 네 젊은이의 공통된 이상은 곧 강한 우정으로 이어졌다. 같은 무렵, 스위스 아카데미의 또다른 실기실에서는 폴 세잔과 카미유 피사로라는 젊은 화가들이 똑같은 문제에 몰두해 있었다. 바지유의 소개로 두 그룹은 서로 자주 만났다.

 

인상파 화가들과 제휴

르누아르는 이런 상황에 용기를 얻어 표현 양식에서 새로운 자유와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했다.

그림을 심지어는 풍경화까지도 화실에서 그리는 것이 그 당시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1864년 봄 글레르의 제자 4명은 퐁텐블로 숲으로 거처를 옮겨,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풍경화외 광회화, 퐁텐블로 숲은 전에도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같은 화가들을 매혹시켰는데, 이들은 예술이 일상 생활의 현실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전통적 표현 양식의 제약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훨씬 더 대담한 방법을 택했다.

〈풀밭 위의 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라는 그의 그림은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 그림의 주제와 기법은 현실 관찰을 통한 그림의 부활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담성으로 인해 젊은 예술가들은 마네를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운 회화 언어가 탄생할 수 있는 상황이 무르익자 갑자기 나타난 이 인상주의는 1874년 살롱전과는 별도로 열린 첫번째 인상파 전시회에서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의 명확한 형식과 독자적인 시각, 독특한 통찰력을 얻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근대 예술이 낳은 이 인상파 운동의 출발점은 1874년이라고 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구상과 기법에서 이 새로운 접근 방식을 완벽하게 나타내 보이는 한 예이다. 그는 공기의 진동, 잎사귀의 반짝이는 효과, 그리고 특히 야외에서 빛을 받은 젊은 여인의 살갗을 섬세하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훌륭하게 묘사했다. 르누아르와 그의 동료들은 검은색을 배제한 밝은 색깔의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들은 숱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그림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림을 팔기도 무척 어려웠다. 반면에 일부 인상파 화가들은 계속 비난을 받으면서도, 비평가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한테도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르누아르는 인체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풍경에 더 매혹되어 있는 다른 화가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얼마 후 그는 초상화를 몇 점 주문받았고 출판업자인 조르주 샤르팡티에게서 중상류층 사람들을 소개받아, 그 계층에 속하는 여자와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르누아르는 점차 자신의 기술에 숙달되었고,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생기에 가득 찬 그림을 그렸다.

 

〈풀밭 깊숙한 곳의 길〉캔버스에 유채 / 60×74㎝ / 1875년경 제작

 

〈모네의 초상화〉캔버스에 유채 / 85×60.5㎝ / 1875년 제작

 

〈그네〉캔버스에 유채 / 92×73㎝ / 1876년 제작

 

〈도시의 무도회〉캔버스에 유채 / 180×90㎝ / 1883년 제작

 

〈머리를 땋는 소녀(쉬잔 발라동)〉캔버스에 유채 / 56×47㎝ / 1885년 제작

 

〈햇빛 속의 누드〉캔버스에 유채 / 81×65㎝ / 1875~1876년 제작

 

〈목욕하는 여인들〉캔버스에 유채 / 110×160㎝ / 1918~1919년 제작

 

〈극장에서(첫 외출)〉캔버스에 유채 / 65×50cm / 1876년경 제작

 

〈우산을 쓴 여자들〉캔버스에 유채 / 180×115cm / 1883년경 제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장", 1876)

사교 모임에 참석한 여인들의 우아함과 삶의 행복을그대로 화폭에 담은 르누아르 최대의 걸작이다.

 

그의 걸작 가운데〈객석 La Loge〉·〈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뱃놀이에서의 점심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Mme Charpentier and Her Children〉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샤르팡티에는 1879년 '현대생활'(La Vie Moderne)이라는 화랑에서 르누아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뱃놀이에서의 점심(Le déjeuner des canotiers), 1880~1881년

 

객석(La Loge), 1874년

 

인상파와의 결별

1881년과 1882년 르누아르는 알제리와 이탈리아 및 프로방스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는데, 이 여행은 결국 그의 예술과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상주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조되는 색채들을 섬세한 붓놀림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법으로는 매끄럽고 윤이 나는 살갗의 인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그가 검은색을 사용한 것을 비난했지만, 르누아르는 검은색의 사용이 그런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상적인 효과를 낼 뿐만 아니라 주변의 색채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그는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보았고 거기에서 고전주의의 매력, 즉 소묘의 아름다움, 형태를 규정짓는 또렷한 윤곽의 순수함, 인체의 유연함과 입체감을 더해주는 부드러운 채색의 표현력을 배웠다. 이무렵 그는 우연히 첸니노 첸니니가 쓴〈회화론 Il libro dell'arte〉(1437, 1844 A Treatise on Painting으로 영역)을 읽게 되었는데, 이 논문은 그의 새로운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그가 이들을 통해 배운 것은 너무나 강력하고 대담하며 예기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이미 의문을 품기 시작한 인상파와 결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1883~84년에 그가 제작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규칙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예술사가들은 앵그르의 기법과 막연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작품들을 '앵그르 시대'라는 이름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인상주의적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의 팔레트는 여전히 여러가지 색채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그의 강한 반발은 189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엑스앙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및 마르티그 같은 프랑스 남부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다. 햇빛 찬란한 이 지역의 자연은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는 인상주의를 센 강 유역의 풍경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남부 프랑스는 색채와 관능으로 가득 찬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에서 떠나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그리고픈 욕망을 불어넣었다. 남부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의 예술은 타고난 참신함을 되찾았다. 그는 목욕하는 여인들을 마치 꽃다발을 그릴 때처럼 건강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의 경제 사정은 상당히 좋아졌다.

1890년 알리스 샤리고와 결혼했고, 1892년 뒤랑 뤼엘이 열어준 개인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미래는 보장되었고, 이 시기에 그린 작품에서는 새로 찾은 안정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보여주었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Jeune Fille au Piano)〉

 

〈풍경 속의 나체 여인(Femme nue dans un paysage)〉

 

〈화병에 담긴 꽃(Fleurs dans un Vage)〉

 

〈머리가 긴 목욕하는 여인(Baigneuse aux Chevelus)〉

 

〈끌로드 르누아르(Claude Renoir)〉

 

〈나체로 누워 있는 여인(Femme nue couchée)〉

 

〈가브리엘과 요한(Gabrielle et Jean)〉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16×90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미스 로멘 라코〉, 1864년, 캔버스에 유채, 81×65cm,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미술관

 

르누아르,〈목욕하는 여인〉, 1888년, 캔버스에 유채, 115×170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끊임없이 새로움을 모색했던 르누아르는, 이 작품에서 세 소녀를 부자연스러운 삼각형 구도로 묘사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책 읽는 소녀〉1876년,

르누아르는 자신의 그림 세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그림 속의 모델이 죽자 직접 장례비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책 읽는 소녀〉환한 빛으로 가득 찬 소녀의 아름다움

 

후기

그로부터 2년 뒤, 르누아르는 첫번째 류머티즘 발작을 일으켰고, 발작이 점점 잦아질수록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곳의 날씨가 건강에 더 좋았기 때문이다. 1899년경 그는 카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1907년 레콜레트라는 영지를 사들여 카뉴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0년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몸의 자유를 구속하는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자 손에 붓을 묶은 채 그림을 그렸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여전히 삶에 대해 쾌활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파리 부르주아지의 미소띤 초상화에 만족하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하녀인 가브리엘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그를 위해 자주 나체로 포즈를 취해주곤 했다. 그의 정물화는 정원에서 따온 꽃과 과일로 이루어졌으며, 풍경화는 주변 경치를 그린 것이 많다. 특히 누드화는 그가 평생 동안 일하는 즐거움에서 찾아낸 평온함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리샤르 기노의 도움을 얻어, 여성의 육체에 대한 찬미를 조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무렵 르누아르는 손수 조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13년경 기노를 조수로 삼았다. 기노는 르누아르의 지시를 기꺼이 따르는 솜씨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는 르누아르의 개성 앞에 굴복했고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그가 조각한 작품들은 르누아르의 표현 양식이 갖고 있는 특성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르누아르의 아내는 1915년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아들 장을 만나러 제라르메르에 갔다가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다.

르누아르는 아내보다 4년 더 살았는데, 죽기 몇 달 전 국가가 구입한〈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me Georges Charpentier〉이라는 자신의 그림을 보러 파리에 갈 수 있었다. 그때 몇몇 친구들은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데려가, 그가 평생 존경해왔던 걸작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 (참고문헌:〈한눈에 반한 서양미술관(도서출판 거인), Daum 백과, Naver 백과〉/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르누아르' 중년시절의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