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작품들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던 로렌초는 우연히 산 마르코 수도원 근처 '메디치 정원'을 산책하다가 조각연습을 하고 있던 한 소년을 만난다.
당시 로렌초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자신의 정원을 피렌체의 예술 지망생들에게 개방하여 마음껏 조각 수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종의 야외 미술 학교였던 셈.
그날, 소년 미켈란젤로는 사냥과 목축의 신 파우누스의 두상을 연습삼아 조각하고 있었다.
늙은 파우누스의 얼굴 치고는 가지런히 뻗은 흰색 치아가 돋보였다.
로렌초는 소년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이빨치고는 너무 가지런하지 않니?" 그 순간 미켈란젤로의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의미심장한 지적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조각 도구를 집어 들었다
다음날,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로렌초는 어제 우연히 만났던 소년이 조각해놓은 늙은 파누우스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빨이 송두리째 빠진 할아버지 조각이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렌초는 즉각 소년의 행방을 수소문 했고, 생부인 로도비코의 동의를 얻어, 아예 미켈란젤로를 입양해 버린다.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양자로 생활했다
어린 소년 미켈란젤로는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로렌초의 자녀들이 살고 있던 웅장한 메디치 저택에서 생활하며 당대 최고의 인문 학자들에게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운다.
로렌초는 장차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로 성장할 열다섯 살의 소년 미켈란젤로에게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아뇰로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서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미학을 배우게 했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탁월한 천재는 우연히 태어나지 않는다
1743년 2월, 메디치 가문은 문을 닫았다. 1397년부터 조반니 디 비치에서 시작된 메디치 가문의 화려했던 과거는 마지막 혈족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로 끝이 났다.
메디치 가문의 가계도
두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메디치 가문을 실질적으로 일으킨 인물은 은행가였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
이 가문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갈리레오를 후원하여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유명 저작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했다.
종합 예술의 꽃으로 부르는 오페라 (Opera)가 처음 탄생한 곳도 메디치 가문의 궁정이었고,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불리게 된 까닭도 메디치와 연관되어 있다.
스페인 메디치 은행의 세비야 지점에서 일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는
신대륙을 네 번 탐험하고, 그 결과를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행정부에 상세히 보고했다.
이 흥미진진한 탐험 보고서를 읽은 독일의 지도제작자 마르틴 발트세 뭘러가 이 메디치 은행의 직원 이름을 따서 자신의 지도에 아메리고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지금의 '아메리카'가 된 것.
플라톤은 살아 생전 글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를 후원해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토록 지원한다. 이는 서방 유럽 세계에 처음으로 플라톤 사상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메디치가의 시의(侍醫)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 철학,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C. de 메디체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손자 L. de 메디치의 가정교사가 되는 한편, 그리스 각지에서 사모은 귀중한 고전 원고류를 칼레지의 별저와 함께 위탁받았는데 이는 후에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플라톤 아카데미)>라고 하였다.
<브론치노가 그린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초상>
작은 규모의 은행을 은퇴하는 삼촌에게서 인수받은 조반니 디 비치는 본점을 피렌체로 옮겨 '메디치 은행'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어느날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가 찾아와 대출을 신청했는데 이는 후에 요한네스 23세란 법명을 사용하는 교황으로 선출된다.
말이 귀족이지, 발다사레 코사는 원래 해적질에도 개입한 적이 있는 뒤가 구린 사람이었다.
그는 돈으로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알려져 있던 볼로냐 대학의 법학박사 학위를 구매하고 이 기발한 가짜 박사가 추기경 직을 매입할 작정으로 로마의 메디치 은행에 대출을 신청한 것.
그와 8년간의 거래를 계속하던 중 141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카톨릭교회는 암울한 역사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쟁으로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되어 두명의 교황이 존재했다.
요한네스23세는 이 두명의 교황도 아닌 제3의 교황이었고 로마카톨릭교회의 교황이며 메디치 은행은 덕분에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었다.
(좌)좌파공의회 (우)대립교황 요한네스23세
1370~1419,작가미상 (출처:위키디피아)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기스문트 황제가 세 명의 교황을 강제 폐위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인 마르티누스5세(1417~1431재위)를 가톨릭 교황으로 임명해버렸던 것이다.
자기 은행의 고객인 교황 요한네스23세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코시모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를 만나
일련의 사태를 설명하고 3만5000플로린의 벌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사망할 것이라면서 25세의 청년 코시모는
아버지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요한네스23세의 벌금을 대출해 주자는 것.
아버니는 조용히 웃으며 대출을 승락했다. 갈 곳이 없던 요한네스는 메디치 가문에 손길을 내밀었다.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지급해달라는 요청까지 승락했던 것이다.
그는 석방된 다음 해에 피렌체에서 임종했는데 메디치 가문은 다시 자선을 베풀어 폐위당한 전임 교황의 영묘를 아름답게 제작해준 것이다.
미켈로초가 건축하고 도나텔로가 조각한 <교황 요한네스 23세의 영묘>피렌체, 세례자 성 요한 성당
또한 이 교황은 자신의 마지막 소지품을 메디치 가문에게 선물로 주고 임종했다.
갚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을 순순히 빌려 주었을 뿐 아니라, 감옥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도 끝까지 의리를 버리지 않았던 이 가문에 자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던 성물을 남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레자 요한의 손가락이다.
세례자 성 요한의 손가락.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례자 성 요한>1513~1516년
로마에서 제작추정, 유채, 69x57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수십 년이 지난 뒤, 그 가문의 첫번째 교황 레오 10세가 고향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시켜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을 그리게 한다. 메디치가문의 교황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을 보라! 우리 가문은 한번 맺은 인연은 절대로 변치 않는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이며, 또한 우리 가문의 정신이다!"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메디치 후원을 받았던 폴라이우올로는 메디치 가문의 이미지를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미지와 자주 비교했다.
이 작품 역시 거인 괴물과 싸운 아베라르도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베노초 고촐리가 메디치 저택의 가족 기도실 벽면에 그린 <동방박사의 행렬>중에서 동쪽벽의 서방 유럽을 대표하는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 (위의 그림)
아래쪽 그림은 서쪽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던 비잔틴 제국의 대표단의 모습이 있다.
동서방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던 코시모와, 그의 아들 피에로, 그리고 장차 '위대한 자'로서 서방 세계의 리더가 될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흰 말을 타고 행진하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 <코시모메달을 들고있는 남자의 초상>
1474~1475년쯤, 나무에 템페라,
44x57.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소장
산드로 보티첼리 La Primavera (Spring) 1485, Sandro Botticelli, Uffizi Gallery
Madonna of the Stairs 1492, Michelangelo, Casa Buonarroti, Florence
위의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첫 작품.
미켈란젤로 Pietà 1499, Michelangelo, St Peter's Basilica, Vatican City
Sistine Chapel Ceiling (Entrance) 1512, Michelangelo, Vatican Museum
메디치 현재 도서관의 모습.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건축된 이 도서관은 코시모가 설립한 초기 메디치 도서관의 희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메디치 가문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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