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Andante con moto
Pascal Rogé, piano
Charles Dutoit, cond.
Philharmonia Orchestra
2. Andante con moto
Jean-Bernard Pommier, piano
Richard Hickox, cond.
The City of London Sinfonia
3. Rondeau à la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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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legie : Paisiblement
1. Elegie : Paisiblement
Rolf Koenen, piano
Hansjörg Schellenberger, oboe
2. Scherzo : Tres anime
2. Scherzo : Tres anime
Rolf Koenen, piano
Hansjörg Schellenberger, oboe
3. Deploration : Tres calme
3. Deploration : Tres calme
Rolf Koenen, piano
Hansjörg Schellenberger, oboe
I. Elégie (paisiblement)
II. Scherzo (très animé) [5:08]
III. Déploration (très calme) [9:05]
Maurice Bourgue, oboe
Jacques Février, piano
I. Elégie
II. Scherzo 5:12
III. Déploration 9:25
Eva Steinaa, oboe
Galya Kolarova, piano
Charles Dutoit (샤를르 뒤트와 1936~ )
현대음악 해석에 일가견을 보이는 샤를르 뒤투아는 스위스의 로잔에서 태어났다. 로잔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음악 이론, 지휘법 등을 배운 그는 이어서 주네브 음악원에서 비올라와 악기법을 공부하였다. 그가 지휘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갈리에라 휘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리곤 1959년 탱글우드에서 샤를르 뮌슈로부터 지휘의 또다른 세계를 전수받았다. 그는 이미 이즈음부터 지휘봉을 잡으며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기에 이르는데, 1959년의 로잔 대학 합창단을 필두로 1963년의 로잔 바흐 합창단 지휘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1964년 베른 교향악단의 제2지휘자가 되었고, 1967년에는 저 유명한 파울 클레츠키의 후임으로서 수석 지휘자로 승진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부인이기도 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유럽 및 남아메리카 연주 여행을 다니며 명성을 다졌다. 하지만 둘 사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 3월 일본에 갔을 때 이들은 심하게 다투고 아르헤리치는 무작정 일본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이들은 이혼했다. 샤를르 뒤투아는 1978년에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악단을 맡으며 그는 비로소 크게 명성을 쌓기에 이른다. 주지하다시피 캐나다의 몬트리올 시는 캐나다의 프랑스어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샤를르 뒤투아에게는 더할 수 없는 좋은 궁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89년 11월 몬트리올 교향악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전곡을 국내 초연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현대적인 감성이 강한 지휘자답게 샤를르 뒤트와는 ‘페트루슈카’ 등을 위시해서 이골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서 뛰어난 지휘 테크닉을 보여준다. 몬트리올 교향악단과의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전곡도 이 작품의 첫 번째 디지털 녹음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Francis Poulenc (프랑시스 풀랑크), 1899~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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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곡가ㆍ피아니스트. 파리 출생. 일찍부터 R.비녜스에게 피아노를, C.케클랭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916년 이래 A.E.사티를 중심으로 한 그룹 ‘새 젊은이’의 멤버가 되었는데 이것이 1920년부터 ‘6인조’로 불린 그룹으로 발전, 바그너적 독일 낭만주의 및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반기를 들고 형식과 선율에의 명확성과 단순성, 대위법의 부활 등 프랑스 고전에의 복귀를 주장하여 신고전적 스타일을 취하였다.
1935년 이후는 가수 P.베르나크와의 콤비로 해마다 베르나크-뿔랑 연주회를 열어 피아노 반주자 겸 독주자로서도 각계에서 활약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독지하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신고전적인 것이지만 거기에 프랑스적인 세련 ·우아 ·섬세함이 일체가 되어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발레곡 《암사슴》(1924) 《나젤의 밤》(1936) 《미사곡 E단조》(1937), 가곡 《평화의 기도》(1938), 기악곡 《오르간협주곡》(1939), 오페라 《틸레지아스의 유방(乳房)》(1947) 《카르멜수녀의 대화》(1957), 모놀로그 《인간의 소리》(1958) 등이 있다.
풀랑크의 걸작은 대부분이 성악 분야 합창곡 서정곡 멜로디이다. 그는 프랑스어 수사법에 비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학작품에 감동을 받았을 때 영감이 일어났다. 그의 음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선율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능은 문학작품의 표현을 더욱 살려내도록 작곡하였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시를 음악적으로 작곡하는것은 결코 편의상 타협이 아닌 사랑의 행위여야 한다. 나는 지성으로 시적인 문제를 음악적으로 해결하려 하지않는다. 마음과 본능으로 노래하는것이 훨씬 더 믿을만하다.”
풀랑크은 멜로디를 146곡이나 작곡하였다. 그 곡들은 매우 광적인 익살로부터 가장 진지한 서정주의에 이르기까지, 아주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실랄할 정도로 진지한 것까지 다양하며 그의 개성은 뚜렷이 표출되었다. 그의 곡은 리듬은 어렵지 않지만,꼭 같은 길이의 음을 엄격하게 지켜야하고, 약한 음절에서도 단축이 없다. 그의 악보에는 섬세하고 규칙적인 지시가 많은데, 템포에 대한 지시는 확실히 지켜져야한다.
Poulenc의 시기별 경향
제1기 1917~1925
Les Six에서 활동하던 시기로 독자적인 작품세계가 확립하지 못한 시기이다. Satie의 영향을 받아 서정적이고 간결한것이 이때의 특징이다.
제2기 1926~1935
Les Six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Apollinaire, Breton, Eluard, Picasso등 과 친분을 쌓으며 본격적으로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선법적인 리듬보다 선율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간결하고 해학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제3기 1936~1945
친구의 죽음으로 종교곡을 많이 작곡한 시기이다. 합창곡이 주를 이루고 그의 첫 오페라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제4기 1945~1959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간 내면의 노래에 관심이 간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나머지 두 오페라가 작곡되었는데 음악적깊이가 더하고 심각한 내용을 다루면서 종교적 색채가 더욱 짙어졌다.
제5기 1960~1963
그의 마지막 가곡 La courte paille가 작곡되었다. 그리 활발한 작곡활동이 있지는 않았으나 초기의 단순하고 밝은 분위기의 곡들이 작곡되었다.
프란시스 풀랑크의 음악적 삶
프란시스 풀랑크는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피아노 수업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풀랑크는 이후 작곡가로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을 양산하였다. 그는 "세속음악"과 "순수음악" 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었고, 영화음악 작곡에 몰입하기도 했으며, 경음악과 종교음악을 동급으로 취급하여 병행하여 작곡한 인물이었다. 뿔랑은 마가렛 롱과 에디트 피아프에게 곡을 헌정하기도 하였고 화가인 피카소와 브라크 그리고 야콥, 아폴리네르, 엘리아르, 아르곤 등 당대 유명 시인들과 교류하였다. 자신의 전공분야 외에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관심과 소양을 과시하곤 하는 프랑스 인테리겐챠의 전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풀랑크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이며 의약품 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1899년 1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탁월한 피아니스트였으며, 그의 외숙부는 연극 애호가였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적 재능은 외가 쪽에서 전수된듯 여겨진다. 풀랑크는 5세 때부터 그의 모친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슈만의 음악을 공부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곧 바로 발휘되어 7살 때 이미 첫 작품, 을 필두로 하여 -지금은 전부 소실된- 다수의 작품을 작곡하게 된다. 8살 때부터 세자르 프랑크 (S. Frank)의 조카인 부테 드 몽벨에게서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받게된 풀랑크는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일찍이 결심하지만,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인문계 학교(Lyc e Condorcet)에 진학하여 졸업하게 된다. 하지만 피아노 수업은 계속할 수 있게 되어 그가 15살이 되던 해에 스페인 피아니스트로서 드뷔시, 라벨 작품의 최고 해석가로 명성을 날리던 리카르도 비네의 문하생이 된다. 비네와의 인연은 풀랑크의 음악 인생에서 매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풀랑크는 비네를 통해서 명료한 피아노 탄주법과 색채감을 강조하는 페달 사용법을 전수받게 되고 프랑스 음악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조언자이자 동반자가 된 오릭(G. Auric: 1899-1983)과 사티(E. Satie: 1866-1925)를 비롯하여 많은 음악가들을 알게 된다. 동년배였던 풀랑크와 오릭은 훗날 (1917년), 사티가 '디아길레프 발레단'을 위해 작곡한 '파라드'(Parade)를 발표한 이후, 더욱 사티의 작법에 끌리게 된다. 풀랑크는 훗날, "사티로부터 받은 직접 받은 여러 가지 영향은 정신적·음악적 양면에 걸쳐 지대하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들은 사티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삼고 다른 젊은 작곡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젊은이"(Les nouveaux jeunes)를 결성하게 되고, 이 그룹은 '6인조'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풀랑크는 1917년에 자신의 본격적인 첫 작품인 '흑인 랩소디'(Rhapsodie ngree)가 성공적으로 초연되면서 작곡가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성공은 당시 프랑스에 밀어닥친 '원시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도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풀랑크는 그 이듬해 (1918)에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 복무 기간에도 그의 작곡 활동은 계속되어 그는 동년 12월에 (그의 피아노 곡 중에서 널리 알려진) '3편의 無窮動'(Trois Movements Perpet tuels)을 작곡한다. 이 곡은 그의 스승 비네에 의해 1919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급속도로유행하게 된다(뿐만 아니라 비네는 풀랑크의 초기 피아노 곡 대부분을 초연해 준다). 1919년 2월에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텍스트로 한 가곡집 '동물시집'이 발간되었다. 1921년 10월, 군대를 제대한 풀랑크는 미요의 권유 하에 샤를르 케크랑(Ch. Koechlin)에게서 작곡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다. 바하의 코랄 분석부터 시작한 이 수업은 1924년까지 지속되며, 풀랑크는 '아카펠라' (A capella) 기법에 숙달하게 된다.
1918년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르'가 파리에서 초연되자 '6인조'는 쇤베르크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미요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빈에서 쇤베르크와 베베른, 베르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의 이태리 여행에서는 알프레도 카젤라를 비롯한 많은 이태리 작곡가를 만나고 로마, 나폴리, 시칠리 섬등을 방문한다.
이 여행에서 만들어진 곡이 피아노 모음곡 '나폴리'이다(이 곡은 1925년에 출판된다). 1924년은 그에게 결정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해였다. 한 해전에 작곡한 발레 모음곡 '암사슴'(Les Biches)이 디아길레프 발레단에 의해 1월에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고, 이 작품이 청중들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이다. 그 뒤로 피아노 곡과 가곡 작곡이 뒤이어 졌으며 1929년에는 당대 최고의 쳄발로 주자로 꼽히는 란돕스카(W. Landowska)의 권유로 쳄발로를 위한 '전원 협주곡'(Concert champetre)를 쓰기도 하였다. 1936년과 37년에는 '아카펠라 합창을 위한 7개의 샹송'과 무반주 '미사'가 차례로 발표되었다. 2차대전동안에 불란서가 독일 나치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그는 음악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저항'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 작곡된 두 편의 작품, Lorca를 기념한 바이올린 소나타 'C'와 폴 엘리아르(Paul Eduard)의 시를 텍스트로 하여 작곡한 무반주 이중 합창 모음곡, 이 바로 그것이다. 1944년에는 아폴리네르의 초현실주의적 드라마를 대본으로 하는 오페라 부파, "티레시아스의 유방"으로 무대 음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 작품은 1947년에 '오페라코미크좌'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다. 終戰 이후 죽을 때까지 그는 작곡에 몰두하면서 때로는 피아노 반주를 하거나 사티, 카브리에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레코딩하는데 소일하였다. 만년에는 주로 관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에 치중하였다.
그중에서 1962년에 작곡한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베니굿맨의 청탁에 의한 것이며, 1955년에 죽은 6인조(Les six)시절의 동료였던 아르튀르 오네게르를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다. 운명의 아이러니라 할까? 풀랑크는 이곡을 쓴 이듬해 1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 곡의 초연은 풀랑크 자신의 추모 연주회가 되어버렸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보냈지만,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조언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오릭을 비롯한 좋은 동료들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예술가들이 있었다.
풀랑크의 작품 및 음악적 특징
풀랑크의 작품은 매우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고 있다. 이미 어려서부터 피아노 음악을 비롯하여 140곡에 이르는 리트, (때로는 성악 성부가 동반된) 실내악 및 무대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1935년 이후부터는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고 1944년부터는 오페라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음악과 종교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풀랑크의 성악 작품은 노래 성부가 언제나 쉽게 이해되도록 쓰여졌으며, 그의 기악 작품의 악곡 구성은 매우 투명하고 세련되면서도 단순하였다. 이것은 사티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2차세계대전에 대한 느낌 하에 작곡한 무반주 이중합창곡, 은 그의 전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쇤베르크 주변 작곡가들과는 전혀 다른 기법으로 작곡되면서) 프랑스 합창음악 중에서도 그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1957년 1월 26일, 이태리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초연된 그의 두번째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의 대화'는 '펠레아스', '보쩩'을 잇는 최우수작으로 평가받으면서 20세기 오페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피아노 곡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무궁동'외에 20여편의 독주곡이 있으며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1949년)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는 1951년에 작곡한 '주제와 변주'(Theme vari)이다.
풀랑크 음악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 요소는 선율이라고 할수 있다. 풀랑크는 선율의 흐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음악의 형식을 결정짓는 요소로 삼았다. 그의 음악은 오케스트라 작품이던 또는 현악 작품이나 성악 작품이던 간에 언제나 성악적이었다. 한마디로 풀랑크는 포레, 드뷔시 그리고 라벨의 뒤를 이어 프랑스적 선율을 심화시킨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음절의 장단, 억양, 음조 등에 관한 운율론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느낌을 구사하였다. 즉 아주 소소하고 섬세한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매우 정확하게 운율을 다루었다는 말이다. 그의 탁월한 재능이 합창 음악에서 발휘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음악사에서 바르톡이 타고난 현악 작품의 작곡가로서 칭송되듯이, 풀랑크는 타고난 성악 작품 작곡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음악은 선의 투명함을 지니고 있고 거기에는 기품과 우아함이 깃들어있다. 풀랑크의 음악은 매우 세련되고 직접적이다. 드뷔시는 "음악은 겸허하게 기쁨을 줄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는데, 풀랑크는 이 격언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음향적 기쁨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에 깊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기품, 명료함, 음향에서의 감성적 기쁨 등이 느껴지지만, 그 배후에는 공포, 감정, 비극 등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풀랑크의 세속 음악과 실내악 작품은 기품과 멜랑콜리, 경쾌함과 진지함, 즉흥성과 세련됨이 어우러져 프랑스 음악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비록 풀랑크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지만, 프랑스 음악의 전통적 맥을 이어가면서 가장 현대적으로 재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풀랑크는 사티보다 더 자주 타인의 작품을 차용하기도 하고 혹은 연상시키는 수법을 구사하였다. 그의 작곡 경향에는 사티와 라벨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고전적인 화성과 리듬 그리고 비교적 규칙적인 주제 구성을 구사함으로써 "신고전주의"로 분류되곤 한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특유의 정서를 그려냄으로써 민족주의적 색채도 지니고 있다. 그가 존경하던 작곡가로는 스트라빈스키(I. Stravinsky), 비제(G. Bizet) 그리고 카브리에르(E. Chabrier)였다.
프랑스 6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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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조'(Groupe des Six 또는 Les Six)란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를 음악적·정신적 스승으로 하고 루이 뒤레(Louis Durey: 1888-1979), 조르즈 오릭(Georges Auric: 1899-1983), 아르튀르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 제르멘 타유페르 (Germaine Tailleferre: 1892-),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 그리고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의 불란서의 진보적인 젊은 작곡가로 구성되는 그룹을 일컫는 용어이다. 6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명 '6인조'로 일컬어졌다. 불란서의 저명 문필가인 장 콕또(Jean Cocteaus: 1889-1963)는 1918년에 '수탉과 아를르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이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음악적 이상, 즉 독일의 '바그너주의'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뷔시의 "인상주의"가 지니는 모호성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이들의 공동 목표는 인상주의의 모호성이나 상징주의의 암시성에서 벗어나 보다 간명한 선율과 대위법으로의 복귀, 구조적 정확함 등으로 특징지어 진다. '6인조'라는 명칭은 그후 1920년에 음악평론가인 앙뤼 콜레트(Henri Collet: 1879-1943)가 '코메디아'(Comoedia)라는 잡지에 러시아의 '5인조'에 빗대어 '6인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인조는 1920년에 각 1악장씩 작곡하여 함께 묶은 6악장의 조곡을 발표하여 신문의 문화면을 요란하게 장식하였다(그러나 곧 바로 뒤레의 이탈로 그룹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간다). 1921년에는 나머지 5명이 장 콕토와의 공동작업으로 발레곡, '에펠탑의 신혼부부'(Les mari s de la Tour Eiffel)를 작곡·발표하기도 하지만, 이들마저도 곧 바로 미학적 견해 차이로 인하여 그 결속력이 느슨하게 되며, 각기 제 갈 길을 가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혁명적 정신은 곧 잘 러시아의 '5인조'에 비유되며, 이들이 개척한 음악어법은 드뷔시, 라벨 이후의 오늘날의 프랑스 음악에 가장 크게 부상하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3개의 무궁동 Mouvements Perpetuels
풀랑크 최초의 (3개의 파스토랄)에 이어지는 아주 짧은 피아노곡이다. 1918년 12월 작곡 (1919년 출판, 1962년 교정 출판). 스승인 리카르토 비네스에 의하여 1919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제 1곡 충분히 억제하여서(Assez modere) ♩=144 (무궁동)은 대개 대단히 빠른 운동성을 가지며, 선회ㅎ며 상하로 움직이는 선율을 그리는 듯한 곡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글자 그대로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1곡에서는 오른손 선율의 조성적, 화성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왼손의 제1마디의 반주 음형이 정확하게 되풀이된다.
선율 자체도 많은 반복을 포함하고 있다. 이 선율은 간소하면서도 가끔 반주 음형이 보이는 Bb장조에서 벗어나서 반주음과 충돌하거나 왼손과 복조를 이룬다. 이 수법은 당시 스트라빈스키와 근접함을 보인 것이다. 마지막 마디에서 으뜸화음은 많은 변질 부가음을 띠고 ‘멋진 결말’을 맺는다.
♥제2곡 아주 억제되어서(Tres modere) ♩=92 여기에서는 오른손의 선율이 조금씩 변형되어 가기는 하지만, 매 마디의 ‘레’, ‘미’, ‘라’를 뼈대로 하여 지탱해간다. 반주형도 앞서의 곡처럼 분명한 것은 아닌데, 4개의 형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곡도 d단조를 고수하여 왔는데, 마지막 마디에서 낮은 C음 위에 최고 음역의 Ab, Bb을 부딪쳐서 의외성을 인식시킨다.
♥제3곡 활발하게(Alert!e) ♩=138 이 곡의 모토는 A와 Bb음이다. 전 3곡 중에서 가장 길며, 빠르고, 박자, 음량, 음형의 변화에 넘쳐서 전곡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A-B-A-C 코다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에 모토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