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風 流 監 司 - 節佳妓話 (절개있는 아름다운 기생이야기)

박연서원 2012. 6. 29. 14:54

 

 節佳妓話 (절개있는 아름다운 기생이야기)

風 流 監 司

 

평안감사 김시중(平安監司 金時仲)은

풍류(風流)을 즐기는 사람으로 그 당시에는 참으로 유명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풍류감사(風流監司)라고 불렀다.

그만치 그는 그 당시에 감사라고 하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독보적(獨步的)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채(異彩)로운 존재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벼슬만 하나 차지하기만 하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하는 것이 먹고 하는 일이었고

자기의 권위를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김시중은 자기의 벼슬을 한번도 뽐내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되지못한 벼슬아치들이 그 쥐꼬리만한 벼슬을

자랑하고 뽐내고 하는 것을 보면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그들을 경멸하고 멸시하였다.

그는 딱딱한 관리도(官吏道)보다도

그윽한 인생의 향기(香氣)를 좋아하였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필묵(筆墨)과 종이를 준비하였다가

좋은 시를 지어서 혼자 소리내어 읊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가 조정(朝廷)과 국사(國事)에 대해서

그 맡은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취미는 취미대로 살리면서 그가 맡은 일에는 지극히 충실하였다.

윗사람을 섬기되 결코 아첨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결코 무리하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되 오히려 공생부사(共生父師)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누구 하나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때 마침 김시중이 성천(成川)땅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지사(道知事)나 내무장관(內務長官, 현 행정안전부장관)이

 초도순시(初度巡視)의 길을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성천고을 원님 조경인(趙敬仁)을 선두로 온 고을 사람들은

감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성문 밖까지 나와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그 것은 그들이 그를 환영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시골서는 감사라는 말만 들었지 감사의 얼굴을

실제로 구경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먼 시골까지 소문이 자자한

풍류감사 김시중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해보자 하는 생각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수천 군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아가며

풍류감사 김시중은 성천 고을에 도착하였다.

이 날 밤 이 고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 고을이 생긴 이래 처음보는 큰 잔치가

풍류감사 김시중을 위하여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이 고을에서 제법 내노라고 하는

일류기생들이 총동원되여 모여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내가 제일 잘났노라고 뽐내고

건방지게 굴던 기생들도 이 자리에서만은 그 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다 제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 

노랫가락으로, 혹은 춤으로, 혹은 담소(談笑)로써

이 풍류감사의 흥을 돋구어주려고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기생들이 이렇게 극성을 다 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기생들의 출세는 벼슬 높은 사람의 소실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투어가면서 벼슬아치를 골라잡아

그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김시중이야 말로 그들이 일생을 통하여

다시 한번 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진짜 벼슬높은 사람이다.

거기다가 인물이 잘 났고 또한 풍류를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벼슬이 높겠다, 인물이 잘 났겠다, 또한 거기다가 풍류를 좋아하니

김시중이야말로 사나이가 가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골에 살던 기생들이 서로 다투어가면서

있는 재주, 없는 재주,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면서

김시중의 환심을 사보려고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온갖 유명한 노랫가락 소리가 들려오고

거문고와 장구 소리가 그 장단을 맞추어주건만

풍류감사는 그 멋들어진 음악소리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는 것같지 않다.

또한 내노라고 뽐내던 일류 무희(舞姬)들이

비장(秘藏)하였던 온갖 춤을 추면서

감사의 환심을 사보려고 노력하여 보았으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 좋은 노래와 춤이 그의 흥을 돋구어 주고

그의 환심을 사기에는 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많은 가수(歌手)들, 무희(舞姬)들은 이제 완전히 사기를 잃고 말았다.

(흥! 허수아비 노래에다가 허수아비 춤! 그런 유치스러운 것을 가지고

나의 귀를 속이고 나의 눈을 속이려고? 어림도 없는 노릇이지.)

김시중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실 김시중의 예술적 소양과 안목으로는

여인들이 노는 꼴이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이 여인들의 예술에는 전혀 뼈가 없고 감정이 결여(缺如)되어

그냥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看破)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등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시간은 부질없이 흘러가고 밤은 점점 깊어가건만 김시중의 얼굴에는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검은 구름만 돌고 있는 것이다.

흥이 났을 때 이 것을 감추기도 어려웁거니와

흥이 나지 않는데 억지로 흥을 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노릇이다.

여기서 제일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은 이 고을 원님 조경인이었다.

그는 이따금 김시중의 얼굴을 쳐다 보았으나 아무 흥미없어하는

그의 얼굴 표정을 볼 때마다 참으로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적으나마 이 고을 성주의 입장으로서

자기의 직접 상사요, 평안남북도를 도맡아 다스리고 계신

평안 감사라는 높고 귀하신 어른을 초대한 이 마당에서

그의 흥을 돋구어 주지 못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곤란한 문제였다.

관리로 볼 때에는 치명상(致命傷)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산골같은 데로 좌천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지금 바늘 방석에 앉은 거나 다름 없다.

(이 오라질 계집년들! 여태껏 먹고 배운 재주가 노래와 춤인데

그래 우리 김시중 대감의 비위 하날 맞추어 드리지 못해?)

조경인은 이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실력이 부족한 기생들을

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설사 책하였다 해서

없는 실력이 솟아 나올리도 만무할 일이었다.

그는 지금 울고 싶은 심정에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연상 감사의 눈치만 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 감사의 표정이 초저녁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눈썹 하나 가딱하지 않고 앉아 있는 김시중은

지금 자기가 이 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몸은 비록 이 자리에 있으되 정신은 지금 딴 세계에 가 있는 게 분명하다.

(무슨 기적이 나타나기 전에는 도리가 없어!

무슨 기적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지만 내 어찌 기적을 바랄 수 있을까---)

조경인은 이제 완전히 실심낙담(失心落膽)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고 흡사 실신(失神)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다.

 

바로 이 때였다. 저만치 먼 끄트머리 자리에서

나이 어린 기생 하나가 어슬렁 어슬렁 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가까이 오자 그가 부용(芙蓉)이라는 기생인 것을 원님은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부용이는 이 성천골 태생으로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불쌍한 소녀였다.

부용이는 기생으로 들어온 그 날부터 열심히 창(唱)과 무(舞)를 공부하였다.

이 여자는 태생이 겸손한지라 이 때까지 결코 내노라고 뽐내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노래와 춤을 공부하는 한편 또한 시를 좋아하여 시 짓는 것에 취미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에는 천재적 소질(天才的 素質)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을 이 시골 성천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고을 원님도 부용이를 이류(二流)나 삼류(三流) 기생정도로만 취급을 하였다.

그러나 부용이는 이 곳 시골에서는 비록 자기 재주를 몰라주지만

때가 오면 반드시 자기 재주를 인정받을 때가 오거니 하면서 꾸준히 공부하였던 것이다.

부용이는 오늘 저녁 이 잔치가 처음 시작하는 때부터

여러 기생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다.

또한 이 소위 명기(名妓)들이 짖고 까불고 하는 꼴을 보고

저 유명한 풍류감사 김시중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이 때까지 낱낱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옳지! 이 분이야말로 정말 풍류를 아시는 어른임에 틀림없어!

나의 예술을 심사(審査)하고 평가(評價)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이 어른이시로구나!

지금이야말로 나의 값어치를 재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부용이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원님 조경인의 앞으로 가까이 걸어갔던 것이다.

소첩이 하잘 것 없는 춤으로 대감의 객고를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수 있다면 다행일까 하나이다.

부용이는 원님에게 정중하게 큰 절을 한번 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 뜻대로 하여라'

원님 조경인은 내어뱉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날고 뛴다는 일류(一流) 기생들이 별 재주를 다 부려도

눈썹하나 까딱하시지 않던 대감께서 너까짓 게 춤을 춘다고 거들떠보기나 하실라구---)

조경인은 기실 부용이의 춤에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무용(舞踊) 예술에 대한 아무런 소양도 지식도 없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 인물이 절색(絶色)이니 혹시 너의 인물에 혹(惑)하신다면 몰라도---)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되어가는 대로 맡기기로 하였다.

부용의 춤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감사의 눈동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채

그의 시선은 딴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때까지 여러 차례

춤추는 것을 초저녁부터 보아 왔으나 별로 신통한 것을 못 보았던지라

이 번에도 그 꼴이 그 꼴이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부용은 춤을 추다 말고 감사가 앉아 있는 자리 가까이 와서 한 손으로 고름을 접더니만

고름을 바로 감사의 눈동자를 스칠 듯이 한 번 휘두르는 것이다.

그 것은 감사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을

이 여인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옳지! 되었다!) 생각하며 부용은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서

춤을 본격적으로 추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극히 섬세하고 느린 율동(律動)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굵은 것으로 또한 빠른 것으로 옮겨지고 있다.

(흠!) 감사는 한 손으로 턱을 고이며 이 여인의 춤을 점점 흥미있게 본다.

여자의 몸이 회전할 때마다 감사의 눈동자도 같이 회전(廻轉)하고

율동이 속도를 더하면 그의 눈동자도 같이 급속도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회전이 느리게 되면 그의 눈동자도 같이 느리게 돌아간다.

(동작속에 생명이 있고 감정이 살아있구나!)

감사는 하마터면 이렇게 중얼거릴 뻔하였다.

그는 이 여인의 춤을 보고 정말 놀랬다.

감사가 놀라는 것을 보고 또한 놀란 것은 원님이었다.

같이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 놀라는 내용은 전혀 달랐다.

감사는 이 여인의 춤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여기에 반하여

원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춤을 보고 감탄하는 감사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부용의 춤이 끝나자 감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박수를 쳤다.

이 때까지 우울해 앉아있던 감사가 몸을 일으키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바람에

원님을 비롯하여 모였던 청중도 일제히 박수를 친다.

이 때까지는 정말 침울하고 어두웠던 이 잔치가

순식간에 정말 명랑하고 밝은 잔치가 되어버렸다.

감사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부용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네 이름이 무어냐?' '부용이라 하옵니다'

'음! 부용이 이름이 좋구나, 네 춤속에는 생명이 살아 있고 감정이 용솟음을 친단 말야,

내 일찌기 수백 수천의 춤을 구경하였으되 오늘같이 훌륭한 춤은 처음 보았어!

오늘 저녁 수십명의 명기들이 왈 춤이라는 걸 췄으되

그건 춤이 아니라 허수아비의 기계적인 재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어,

하나 너의 춤이야 말로 내가 이 때까지 마음속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야,

참으로 반갑고 장하도다. 자- 어디 또 한번 네 재주를 구경시켜줄 수는 없을까?'

'황송하오이다. 보잘 것없는 소녀의 서투른 재주를 그처럼 칭찬해 주시고...

다시 한번 보고자 원하신다니 영광스럽고 즐거운 마음 금할 길이 없나이다.'

부용의 춤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감사는 한 가지가 끝나면 또 다른 것을 재청하였다.

다른 것이 나올 때마다 감사의 감격과 흥분은 점점 더 새로워지고 격렬(激烈)해진다.

오늘따라 부용의 태도 또한 심상치않다.

이 때까지는 그렇게 새침하고 조용하던 부용이가

오늘따라 어쩌면 그렇게도 용감하고 활발한지 모르겠다.

부용은 감사가 청하면 청하는 대로 계속 새로운 춤으로 응수(應酬)하였다.

하나가 끝나면 재청을 하고 재청을 하면 또한

새로운 춤을 더욱 멋들어지게 춘다.

부용이가 처음 춤을 추기 시작할 때에는 모였던 기생들이

멸시(蔑視)와 질투(嫉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계속 새로운 춤을 신나게 추는 것을 보자

모든 기생들은 이제 그 뛰어난 재주에 도취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가지 한가지 끝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를 던지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밤이 새고 새벽이 되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잔치가 끝났다.

오늘 저녁 잔치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잔치였다.

초저녁의 삼엄하던 공기는 이제 완전히 부드러워졌다.

연회가 대 성황리에 끝나게 되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원님 조경인이었다.

부용이가 만일 없었더라면 그는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있을 뻔하였다.

평상시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부용이가

오늘 저녁따라 그에게는 큰 구세주(救世主)만 같았다.

오늘 밤처럼 부용이가 고맙게 생각되는 때는 없었다.

 

'부용아' 잔치가 끝나자 감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네'

'네 춤은 과연 일가(一家)를 이루었도다. 너의 춤을 내일 새벽까지

보아도 시원치 않겠다만 그럴 수가 없는게 천추의 한이로다.'

'보잘 것없는 소녀의 춤을 그처럼 과분하게 칭찬하여 주시니 오히려

부끄럽사옵나이다.'

'아니다, 내 그냥 혀끝에서 나오는 칭찬이 아니라

너의 재주에는 내 진심으로 놀랬다. 그런데 부용아!' '네'

'네가 말하는 음성을 들어보니 쟁반에다가 구슬을 굴리는 것 같구나.'

'과분한 말씀'

'아니야, 네가 춤도 잘 추려니와 소리도 잘 할거야'

'대수롭지 않은 소리인가 하나이다'

'아니야 내 귀는 속이지 못하느니라.

내 욕심이 과한지는 모르나 너의 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어때? 이왕 내친 걸음이니 이 밤이 새기전에

너의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한번 들어 볼 수가 없겠느냐?'

'대감께서 소원이시라면 그까짓 것 어려울 것 없나이다'

'음! 고마워. 헌데 여기 딴 사람들은 피곤할테니 돌아가 자게하고

너와 둘이 나의 숙소에 가서 한 곡조 들려줌이 어떠할꼬?

'좋을대로 하사이다'

 

그 날 밤 부용은 감사를 따라 그의 숙소까지 동행하였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부용은 거문고에 맞추어 구슬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하는데

감사는 목침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듣는다.

(과연 명창이로구나. 춤만 잘 추는 줄 알았더니 소리도 잘 하는구나,

이런 시골에 두기는 참으로 아까운 인재로다!)

감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 곡조가 끝나면 또 한 곡조,

그 것이 끝나면 또 한 곡조, 이렇게 청하는 대로 부르다 보니 열 곡조도 더 불렀다.

이러는 동안에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대감!' 어지간히 음악이 끝났을 때 갑자기 부용은 감사를 부르는 것이다.

'음' '소녀가 춤과 노래 외에 또 한 가지 좋아하는 것이 있나이다'

'음, 그게 무엇인데?'

'듣자 하니 대감께서는 시를 좋아하시어

풍류대감이라는 별호까지 듣고 계신다 하는데

소녀도 시를 무척 좋아 하나이다'

'흠! 그것 참 기특한 일이로군!'

김시중은 이 여자에게서 또 하나의 뛰어난 재주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랬다.

춤을 잘 추고 소리도 잘 하려니와 이 여자의 작시(作詩) 재주에 무릎을 치면서 놀랬다.

그 날 밤이 새도록 그들은 서로 운자(韻字)를 주고 받으며

자연(自然)이며 풍물(風物)이며 동물(動物) 등등에 걸쳐서

여러가지 시를 짓고 읊느라 날이 새는 줄을 몰랐다.

피차 약속한 것도 아니나 취미와 감정이 서로 맞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저녁때만 되면

부용은 감사의 부름을 받아 그의 숙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여기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들은 서로 시를 짓고 읊고 하면서 실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닷새 째되는 날 저녁에 그들은 금슬(琴瑟)을 같이 하였다.

부용이 감사에게 몸을 바치게 된 것은 결코 보통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의 부귀영화나 혹은 벼슬에 혹하여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용은 그런 헛된 부귀나 영화나 또는 벼슬같은 것은 멸시하였다.

그보다도 김시중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그윽한 향기와 풍류에 마음이 움직였다.

벼슬을 하게 되면 더욱 더 높은 벼슬을 차지하려는 것이 범인들의 통념(通念)이거늘

이 벼슬을 초개(草介)와 같이 여기고 인생의 그윽한 향기를 찾고 있는

그의 드높은 정신에 부용은 감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후 며칠이 지났다. '부용아!' '네'

'재주가 많은 사람은 그 재주에 넘어 가기가 쉬우니라.

네 인물이 절색이고 노래를 잘 하고 춤을 잘 추고 시를 잘 짓고 하는 등

온갖 재주가 비범하다 보니 네 주위에서 뭇 사나이들로부터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치게 될지도 모른다.

여자는 이런 때 자기 몸 단속을 잘 하여야 하느니라.'

'알아 모시겠나이다. 소첩이 그 날 저녁 백년해로 하기로 굳게 맹세하던 일을

어찌 잠시라도 잊겠나이까. 백번 죽사와도 소녀는 대감의 소첩(小妾)이로소이다.'

'음! 장하도다. 내 너를 믿고 떠나니 갔다 돌아올 동안에 부디 몸 성히 잘 있거라'

'대감 그럼 속히 돌아오실 날 손꼽아 기다리겠나이다'

 

감사가 이웃 고을로 떠나는 날 부용은

그의 뒷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감사는 이웃 고을에 볼일이 있어 지금 가는 길이다.

거기서 며칠동안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성천 땅에 다시 들러

부용과 함께 평양까지 같이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금슬을 같이 한지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이 만한 여자라면 족히 백년을 해로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부용이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다.

며칠 후에 이웃 고을에서 볼일을 마치고 감사는 부리나케 성천땅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부용을 데리고 평양 땅으로 가서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하려는 꿈을 가슴 속 가득히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뜻하지 않던 큰 일이 생겼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부용이는 그가 며칠 동안 이웃 마을에 가있는 동안에

어느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서 매일 밤 그 사람을 자기 방에다가 재우고는

새벽녘에야 그 사람을 돌려 보낸다는 소문이 온 성천 고을에 퍼지고 있었다.

실로 청천 벽력같은 소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부용이가 내가 철석같이 믿었던 부용이가--- 마 그럴 리야 없겠지

세상에 뜬 소문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는 이렇게 선의로 해석하면서 사실을 부정해보았다.

그러나 가장 믿을만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이 추잡스러운 소문이

계속하여 들려 오는데는 도무지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계집을 냉큼 묶어 오너라! 더러운 계집같으니라구'

드디어 김시중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용의 입을 통하여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만일에 정부(情夫)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계집을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이윽고 부용은 노끈에 꽁꽁 묶여서 김시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혀졌다.

한 때는 그와 같이 원앙금침속에서 화려한 꿈을 같이 꾸던 부용이가

이제 한때 서방님이었던 김시중이 발앞에 꽁꽁 묶여서

꿇어 앉혀져 있는 꼴이란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다.

'부용아!' '네'

'네 그래 내 없는 동안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그를 밤마다 네 집에서 재워 보내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네, 사실이옵나이다' '뭣이?'

이 순간까지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또한 사실이드라도 부용이 입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듣길 바랬다.

그러나 이제 장본인의 입으로부터 모든 일이 사실이라는

자백을 들은 이상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예끼 이 망할 계집같으니라구!

너도 역시 하나의 미천한 화류계의 천기(賤妓)에 지나지 않았구나!

너같이 더러운 계집을 내가 철석같이 믿은 것이 잘못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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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을 당장 끌어내어 한 칼에 처참하여 버려라!'

평상시에는 그렇게 부드럽고 온순하던 김시중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실로 사자의 소리와 같이 크고 거칠었다.

'대감!'

사령들이 막 두 팔을 붙잡고 나가려는 순간

부용은 이 때까지 수그렸던 머리를 쳐들면서 나직하게 말하였다.

'소첩이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사오나 죽기 전에 한 가지 청이 있사오니

죽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시기 바라나이다.'

'그래! 무슨 청이냐? 어디 말해 봐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나 한 수 짓고 죽으면 원한이 없겠나이다'

'좋다. 산사람의 소원도 들어주겠거늘 죽는 사람의 소원이야 못들어

주겠느냐, 자 여기 필묵과 종이를 가져 오너라'

이윽고 부용의 앞에는 붓과 벼루와 종이 한 장이 놓였다.

'운자(韻字)는 대감께서 적어주기 바라나이다' '좋다'

김시중도 풍류객인지라 즉각 그 자리에서 붓을 잡더니

종이 위에다가 능(能)이라는 한자를 운자(韻字)로 커다랗게 썼다.

김시중이 종이에다가 운자를 쓰기 바쁘게 그의 붓을 받아 쥔 부용은

쏜살같은 속도로 다음과 같이 이십팔자(二十八字)의 시를 순식간에 지어서 적었다.

 

成川芙蓉 何所能 (성천부용 하소능)

能歌能舞 又詩能 (능가능무 우시능)

能之能中 又一能 (능지능중 우일능)

月明夜半 換夫能 (월명야반 환부능)

 

성천 부용이 무엇을 잘 하는 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고 또한 시를 잘 짓더라

잘 하고 잘 하는 중에 또 하나 잘 하는게 있으니

달 밝은 한 밤중에 지아비 바꾸기를 또한 잘 하도다.

 

부용이 지은 시를 읽어보자 김시중의 입 언저리에서는 가벼운 경련이 일어난다.

동시에 땅에 꿇어 업드려 있는 부용을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너의 소행(所行)을 보아서는 갈기 갈기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겠으

과연 너야말로 인생의 향기를 아는 멋있는 계집이로다.

너의 육신(肉身)은 미우되 너의 재주가 아깝구나.

너까짓 것 하나 죽이면 무엇할꼬, 자 그 노끈을 풀어주어라.'

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람에

사령들은 어쩔 줄을 모르면서 비끌어 매었던 노끈을 풀어주었다.

꽁꽁 묶였다가 자유로운 몸이 되자

부용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고 김시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눈동자는 샛별처럼 반짝이는데 눈 가장자리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환희(歡喜)와 만족의 눈물이었다.

 

'대감!' '음!'

'소첩의 지나친 연극을 과히 책하지 말아 소서. 

이 때까짓 것은 모두가 소첩이 꾸며 만든 연극이었나이다.'

'뭣이? 연극이라니?'

'이 세상 사나이들이란 하두 믿을 수가 없사옵기에

소첩의 예술에 대한 대감의 이해와 또한 소첩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꾸며낸 연극이었나이다. 

대감을 두고 소첩이 어찌 외간 남자를 내 집에 들여놓도록 하겠나이까.

소첩은 몇몇 아는 사람과 짜고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나서

간통을 한 것처럼 헛소문을 퍼뜨렸나이다. 

이렇게 헛 소문을 퍼뜨려놓고서는

 대감께서 어느 정도로 분노(忿怒)하시나 시험해보았나이다.

그랬더니 과연 대감께서는 극도로 분노하시어

소첩을 묶어다가 죽여버리라 명령을 하셨나이다.

그처럼 분노하심은 소첩에게 대한 애정이 그만큼 뜨겁고 열렬하기 때문인줄 알아

그 순간 소첩은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나이다.  

소첩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소첩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나이다.

 

다음은 소첩의 마지막 소원으로 시를 짓겠다 말씀 드렸을 때

대감께서는 서슴치 않고 그 청을 들어주셨으며

그 다음 소첩이 지은 시를 읽어보시자 마자

소녀를 죽여버리려던 그 마음 다시 돌이키시고

비끌어 매었던 노끈을 풀어주라 하셨나이다.

것을 보고 소녀는 대감이야 말로 실로 풍류를 이해하고

인생의 멋을 아는 지아비인줄 또 한 번 느꼈나이다 .

외람되지만 실은 대감께서 과연 소녀의 지아비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을

소녀가 시험해본 것이고 이제 대감께서는 그 시험에 합격한 셈이옵니다.'

 

부용이 말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시중은

그만 달려 내려와서 왈칵 부용을 껴안고 말았다.

'부용아! 너야 말로 정말 멋을 아는 계집이로다'

부용은 김시중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사르르 눈을 감았다.

곁에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 없이

그들은 오래 오래 서로 껴안은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지금 대동강 건너편에 아담하게 생긴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이 집이 바로 그 당시 김시중이 부용에게 사주어 같이 살던 집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끝>

 
춘향전 판소리 사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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