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새해의 새 해가 동쪽 하늘로부터 떠오를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는 해는 아쉽습니다. 그리고 후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겐 저물어 가는 이 해가 참으로 소중하고 은혜로우며 아름다운 한 해로 기억이 될 것입니다.
1994년의 1차 발병에 이어 2002년에 제게 다시 찾아 온 건강의 위기는 절체절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여 이 한 해와 같은 나름의 아름다운 결실을 거둘 수 있었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제 아내와 주위의 많은 분들의 간절한 기도와 격려의 힘이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여러분 모두께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한 절명의 경험은 저를 ‘죽음’에 관한 공부의 길로 이끌었고, 이제 「죽음준비」에 관한 전도자로써의 사명을 감당케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군들 죽음문제를 완전히 초극하며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만 이는 우리 모두 함께 감당해야 하는 짐이요 과제이기에 먼저 체험하고 학습한 자로서 감히 조언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해는 그 길에 나선지 두 번째 해였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경향각지를 다니며 30회 이상의 죽음준비 강의를 직접 하였고, 또 일부 장기 강의 프로그램은 책임강사로써 도합 40회(20회x2)의 시리즈 강의계획을 수립하고 진행을 관리해야했습니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주요 강의 기관
가. 시 및 구 : 서울 구로구청
나. 시 및 구의 평생학습센타 등 : 삼척시 평생학습센타, 인천시 부평구 평생학습센타,
서울 양천구 건강가정지원센타
다. 대학부설 평생학습원 : 대구 영남대 부설 평생학습원
라. 종합사회복지관 및 노인종합복지관 : 서울, 인천, 안산, 청주, 성남 등 9개 기관
마. 교회와 기타 기관 및 모임 등
2. 강의 주제
가. 한국인의 죽음이해
나. 소중한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 (‘죽음준비의 필요성’ 일반)
다. 죽음은 마지막 성장; 사랑과 용서와 화해
라. 제3기 인생과 노년의 아름다운 삶
마. 사진으로 쓰는 자서전
바. 노인의 상실과 슬픔 치유
사. 유언장 쓰기
아. 자살예방교육; 천하보다 소중한 내 생명
3. 미디어 인터뷰 등
가. 2009. 5 자살예방 관련 KBS TV 인터뷰 및 방영
나. 2009. 10 독거노인돌봄 봉사 및 죽음준비교육 현장 실버 TV 취재 및 방영(25분)
다. 2009. 12 유언장 쓰기 관련 KBS 라디오 인터뷰 및 방송
라. 2009. 12 유언장 쓰기 관련 케이블 TV 취재 및 방영(3분)(*관련 동영상을 첨부합니다)
이 모든 강의는 제가 본업으로 하는 양평군 양동면에서의 독거노인돌보미 자원봉사의 일 틈틈이 해야만 했기에 여러 가지 여건 상 특히 강의를 준비하는데 시간적으로, 그리고 강의를 위해 경향각처를 원행하는 일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초여름 이래 허리 디스크 통증이 극심하여져서 보행하는 것 마저 힘들었던 시간도 약 5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2월 15일 구로구청 강의를 끝으로 한 동안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쉬어야만 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창밖에는 함박눈이 쉼 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지난 일 년을 돌이켜 보기에는 참 마땅한 날씨입니다. 그러나 창밖의 언덕길 위에 선 차들은 엉거주춤 기지도 못해 아예 멈춰 서 있습니다. 이대로 날이 저물면 내일 새벽에 이 길은 빙판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을 모르고 달리는 길이기에 눈길 이쪽저쪽에 생과 사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새 일과 새 출발
지난여름에 우리 가족은 새 일에 도전하였습니다. 저의 둘째 아들 재윤을 전면에 내세우고, 제 아내가 그 뒤를 받치는 모양새입니다만, 저는 이 가업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풀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맛을 즐기고 지친 몸과 맘이 편안한 쉼을 갖기를 원합니다. 맛을 준비하고 영접하는 손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일구는 귀한 기업(基業)의 터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루어 주소서’라고 말입니다.
아직도 많은 부분 암중모색을 하며 전전반측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갓 저를 오늘 이 자리까지 이끌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기에 저의 이 간절한 기도에도 또한 응답하여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저희 부부의 큰 아들 영재는 지난 12월에 제 적성에 맞는 일과 일터를 찾아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저희 가족과 주위의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 일궜던 가정이었기에 두 젊은 부부가 그 삶터를 지혜롭게 사랑으로 가꾸어 나갈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 믿음이 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께도 죄스럽고 송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실과 깨어짐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아픔이 크다 한들 한걸음 뒤가 되겠지요, 본인에 비하면.
저는 이런 영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늦게 시작할 뿐이라고. 그러니 근본에 충실하라고’말입니다. 하나님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를 사용하시겠지요. 이 글을 통해 영재에게 다시 한 번 더 분발할 것과, 겸손과 정직과 바른 삶을 촉구합니다.
풀꽃을 맡아 있는 저희 부부의 둘째 아들 재윤에게는 하는 일의 자원(自願)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한 마디 권면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매사에 좀 너그러워지라’고 말입니다. 삶의 울타리가 더 넓어지고 윤택해지겠기에, 나와 나를 에워 싼 이웃이 함께 행복해 지겠기에 진심을 실어서 간곡히 하는 말입니다.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그리고 제 아내에게
적선(積善)하기에도 부족한 삶이거늘 저의 마이너스의 삶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 쯤 저도 빚진 자의 굴레를 벗고 당당하게 베푸는 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까요? 받기만 하는 오랜 습성이 갑(甲)을 넘기다 보니 ‘걸신의 경지에 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소스라치기도 합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께 그러한 중에 특히 제 아내에게 더 더욱 그러합니다.
제 주위의 많은 분들이 익히 잘 아시듯 제 아내 이영애 자매는 가녀리나 심성이 참으로 곱습니다. 반면에 저는 앞뒤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단견과 협량에 다혈질입니다. 내지름이 항상 먼저요, 수습은 그 뒷전입니다. 그러니 33년을 살아오면서 당한 고통과 두 번의 죽을 고비를 통한 놀람은 그 얼마이겠습니까?
새해에는 부디 이러한 적악(積惡)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 동안 켜켜로 쌓인 악들을 하나하나 걷어 내고, 이제 선을 쌓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채무와 의무의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담보를 걸듯, 이 새 삶에 담보라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내걸 수 있는 담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눈발은 더 사나워 집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일군의 낙엽송이 그 눈을 내리 맞고 서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 그치고, 추위가 물러가는 봄이 되어야 만물이 봄을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지요. 이 한 해의 나이테를 마무리한 저 낙엽송들은 다시 올 내년 봄을 이미 준비하고 있겠지요. 그리하여 그 가지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적선의 여름을 꿈꾸고 있겠지요.
끝으로 어제 토요일에 겪었던 일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저는 대학친구가 여식을 여의는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참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가연이었습니다. 신랑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신부에게 바치는 사랑의 찬양도 그리하였고, 신부의 고등학교 제자 한 반 학생이 몽땅 나와서 부르는 노래와 율동이 또한 그리 하였습니다. 훈훈하게 덥혀진 마음이었기에 바깥의 추운 날씨도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귀로였는데, 종종걸음으로 함께 걷던 친구가 제 말에 대답했습니다.
“야, 오늘 결혼식 너무 아름답고, 아이들 참 예쁘더라!”
“정말 그래. 그럴 때이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비단 그런 꽃다운 나이뿐만 아니라 30대..., 40대... 심지어 50대 까지도 예뻐 보이는데... 그 만큼 늙었다는 게 아니겠어?”
“.......?!”
지하철 승차구 이쪽과 저쪽으로 헤어지면서 저 혼자 제게 말했습니다.
“예뻐 보인다는 말은 맞겠지만, 늙었다니? 그건 아니지!!!”
그렇습니다. 저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이나 모두 청춘의 시절에 있습니다. 그 젊은 정신으로 제3기 인생을 열정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꿈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 도정에서 저는 제 마음과 혀를 통하여 나오는 말로써 담보하며 새해에는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적선의 삶을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내년 이 맘 때는 더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새 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거듭 지켜보아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정과 하시는 일 위에 항상 하나님의 가호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 사랑합니다.
2009년 12월 27일 늦은 밤
풀꽃 서재에서 정 상기 드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관
죽음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이 먼저 느끼는 것이 두려움이다. 나는 가끔 죽음과 마주 서 있는 환자를 방문하게 된다. 대부분 말할 수 없는 큰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할 때 그것이 조만간 나의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른다. 거기에다 한 생을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지은 죄도 많은지라 하느님 심판대에 나서기란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되도록이면 고통이 적고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달에는 내게 가장 오래된 친구가 죽었다.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는데, 잠시 앓고 가기 전날까지도 정신이 맑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참으로 선하게 살다가 선종한 것이다.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 영전 앞에서 고인을 위해 기도드릴 때 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있으리라 믿고 나 역시 남은 생애를 선하게 살다가 선하게 죽을 수 있게 해 주십사 빌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마셔야 할 쓴 잔이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면하고 싶다고 하신 그 고뇌의 잔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이 죽음의 굴레를 씌우셨는가. 성경에 의하면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려 죄를 범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다.
핵심 문제는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끝인가, 아니면 저승 삶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과학적 실증을 통한 답을 줄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은 현세 삶의 끝일지언정 그것이 만사를 무(無)로 돌리는 종말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도신경 말미에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함과 그것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3)라고 천명한다. 이 믿음에 따르면 죽음은 우리를 죄와 이로 말미암은 온갖 고통과 불행, 인생의 질고로부터 해방시켜 복된 생명으로 옮겨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가르침의 근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파스카 신비에 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파스카 신비의 구현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죽음을 쳐 이기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셨다. 여기서 세상이란 예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 세상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의 관문'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어떤 이는 '죽음은 아직 펴보지 않은 책과 같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기쁨과 행복, 사랑과 평화, 빛과 생명을 가득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은 죽음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미화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죽음을 달리 볼 수 있다. 사랑은 파괴하지 않고 건설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을 다하여 당신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을 죽음으로 끝나게 버려두실 수는 없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 뒤에 우리가 누릴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참되고 아름답고 복된 새 생명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여전히 두렵고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이요 고뇌일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살고 싶은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국 당신 사랑과 그 사랑이 베푸는 죄의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한 이, 병든 이, 고통 속에 갇힌 이 등을 형제적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본인이 깨닫든 못 깨닫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죽은 다음 분명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를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를 사랑한 것이 당신을 사랑한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나라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이다.
웰에이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eing)`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합니다.
[웰에이징(Wellaging Manual)]의 저자 박상철 교수는
늙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변화라고 합니다.
그는 건강한 삶을 위한 5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움직이라. 적응하라. 정확하라. 느껴라. 생각하라”입니다.
의미있는 진단입니다.
사람의 연령에는
자연연령, 건강연령, 정신연령, 영적연령이 있습니다.
영국의 노인 심리학자 브롬리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라고 했듯이
늙어가는 시간은 길고 중요합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어 가는 일이다"
라고 앙드레 지드가 말했듯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웰에이징 하기 위해서는
첫째, 일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나이 들면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4대 고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질병입니다.
둘째는 고독감,
셋째는 경제적 빈곤,
넷째는 역할상실입니다.
점점 의욕과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노년을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등의 요소도 중요하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80세에도 민족을 위해 새 출발하였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저 산지를 달라고 열정을 가졌습니다.
노년기에도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통계에도 노년기의 뚜렷한 업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썬샤인 잡지에 의하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세부터 70세 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 졌고 23%는 70-80세 노인,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약 64%가
60세 이상의 사람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포클레스가「클로노스의 에디푸스」을 쓴 것은 여든 살 때였습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을 완성한 것도 여든이 넘어서였습니다.
다니엘 드 포우는 쉰 아흡 살이 되어서야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쉰일곱 살 때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했고,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일흔 살 때 완성했습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古稀)의 나이를 넘어 불후(不朽)의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렘브란트나 모네의 그림,
예이츠의 문학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들도
그들의 생애의 만년에 가서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나 쉬바이쩌 역시
노경에서도 창조적인 일을 많이 했습니다.
둘째는 인간관계에 있어 웰에이징을 하려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으로 가져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 가져야 합니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이유에 대한 조사를 했답니다.
조사 결과 인생에서 실패한 이유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했다고 답변한 사람은
15퍼센트에 불과했답니다.
나머지 85퍼센트는 잘못된 인간관계라고 꼽았답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이기주의(에고이즘)가 강해집니다.
노욕이 생깁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폭군노릇을 하고,
자기 몰입 나르시즘(narcissism)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페이탈리즘(fatalism)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대인관계는 초라할 뿐입니다.
결국 인간관계는 중심 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 들면 들수록 초라해집니다.
2> 일 중심,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그러나 타자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셋째, 나이 들면 신앙의 여부가 삶의 질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정신 연령, 영적 연령은 더욱 젊어져
왕성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결승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뛰는 것입니다.
후반전의 인생은 여생(餘生)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입니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 같지만
천국을 향해 새 인생을 시작할 때입니다.
웰빙 인생은 웰에이징하다, 웰다잉으로 마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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