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 시인-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愼達子) 詩人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故 심현성 마르티노, 前 숙명여대 교수)이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녀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은 반신불수가 됐고, 수발은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녀는 일찌감치 촉망 받는 시인이었지만, 시는 남편의 약값도, 셋이나 되는 아이들의 과자 값 벌이도 안됐다. 결국 양복 천을 팔기 위해 보따리장수에 나섰다. 정신을 차릴 즈음,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져 꼬박 9년을 ‘앉은뱅이’로 살다 아흔에 세상을 떠났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잔혹한 운명은 자신마저 내버려두지 않아 그녀 역시 유방암을 이겨내야 했다. 혹자가 겪었더라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가혹한 운명이다.
그런데 이런 지옥 같은 삶의 주인공이 신달자 시인 (엘리사벳. 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늘 세련되고 화사하며,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는 시인의 이야기라고 누군들 짐작이나 할까.
신달자 시인이 ‘대학 교수’, ‘한국문단의 대표 여류작가’라는 화려함 뒤에 꼭꼭 감추어놨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자에 따르면 에세이는 ‘대학 정년퇴임 마지막 해를 앞두고 펴낸 책’이다. 남편이 타계한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뒀으나, 치부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출판 결정을 수백 번은 번복했단다. 그러나 자신 같은 삶을 살았던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어 출간하게 됐다.
에세이는 그녀가 딸처럼 여기는 제자 ‘희수’에게 과거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소설 같은’ 삶의 편린들을 44개장과 13개의 시편에 담았다. 시인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인생사를 보면 우선은 작가에게 그러한 삶의 고난이 있었음에 놀라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온 가족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소리 없는 총’을 구하고 다녔으며,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해 여름 밤 벼락이 치면 벼락 맞을까 봐 나가지를 못했다’는 말을 해 댈까.
그녀는 당시의 수난을 한 마디로 함축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있었다.’ 시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것은 신앙이었다.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하염없이 거닐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언제나 성당이었다. 그녀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주여, 주여’ 울부짖곤 했고, 곧 바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남편은, 결국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스스로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다 잘 견뎌낸 일만 남더라고 했다.
시인은 이제 홀로 남아 시를 쓴다. 이제는 ‘다 흘러 옛 이야기’가 됐고, 더 이상 세상에 진 ‘빚’도 없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그 남자 때문에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다시금 아내이고 싶다.’고 고백한다.
신명나게 도마질을 하고 수다를 떨면서 ‘여보! 여보!’ 그렇게 자꾸 남편을 부르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그에게 맛보라고 권하고 싶단다. 시인에게 남은 삶은 더 이상 고통도 아픔도 아니다. 세상에는 절제절명으로 불행한 일이 없다는 진리도 깨쳤다.
그녀는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느님이 나의 게으른 습관을 잘 아셔서 나를 부지런하게 하기 위해 무거운 일거리를 주신 것인지 몰라. (중략)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정을 잃지 않았고,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믿었고, 내일을 믿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고, 딸들을 얻었으며, 무엇이 가족 사랑인지 알았고, 어머니는 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영원히 싸우고 사랑할 것은 삶이며 아름다운 일상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
곽승한 기자, 카톨릭신문
2008.4. 27 (제 2596호)
<대표 시>
저 거리의 암자/신달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댄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 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색동저고리와 무지개/신달자
물들어라 물들어라
색동저고리 입고 잠들며 잠꼬대 하시는 엄마
색동저고리 천벌은 씹어 먹었다
무지개 만 번은 후루룩 마시기도 했지
겨울 정원 끝 새 혀 만 한 붉은 새움을 보고
연하디 연한 분홍빛 모란 꽃 몽우리를 보고
진흙 진물 가슴 꽈ㅡ악 오므리며
생명 피움 나무 옆에 앉아
물들어라 물들어라 했지…
책을 듣다 / 신달자
손끝과 발가락 끝으로 형체 없음이 지나가요
지나가고 있어요 지나가는 걸 느껴요
처음엔 울림이 내 몸을 두드리고
그 두드림이 더 깊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지금은 울림마저 다 놓아 버리고 그냥 느껴요
느낌도 지워 버려요
다만 귀만 열어요 종이 언어 언어의 그림자 행간
두드림 소나기 의문 공감의 너울에 귀 기울여 봐요
태반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길이 확 뚫려요
들려요 그 리듬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상까지의 길이 보여요
생은 경청으로 더 더 넓어져요 귀는 더 소곳해지지요
들으면 보여요 보이면 살아나요
다 내리고 다 가지면
손끝 발끝의 착지에 힘이 가요
몸이 따뜻해져요.
푸른 잎 하나 / 신달자
완전히 벗은 몸으로
다만 푸른 잎 하나 들고
수술대 위에 누웠습니다
다 버렸지만
푸른 잎 하나는 손에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전신 마취에 나는 사라지고
내 몸에서 삼겹살 일 인분쯤 칼에 잘려
나갔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던 부위의 살이었습니다
반으로 절개된 살점은
얼마나 그리움에 진저리를 칠 것인가요
따뜻한 입술이 그리운 곳에
피로 범벅된 낭자한 칼들과 바늘이 놀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푸른 잎 하나를 그대로 들고
수술대 위에서 회복실로
다시 입원실 침대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몸에서 푸른 잎하나가
이미 자녀들처럼 온몸을 덮어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절개된 인생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낙엽송/신달자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신달자 시인의 약력>
신달자 愼達子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집 『간절함』 『열애』 『북촌』 등. 저서 『고백』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나는 마흔에 새의 걸음마를 배웠다』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 수상 :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2001년 시와시학상, 2004년 한국시인협회상, 2007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영랑시문학상, 2009년 공초 오상순문학상, 2011년에는 김준성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1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등
출생 1943년 12월 25일, 경남 거창군
나이 만 82세
소속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데뷔 1964년 시 '환상의 밤'
학력사항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력사항
2025.12.~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2016.~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2012.03.~ 2014.03.제38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2012.07.~ 제24회 거창국제연극제 홍보대사
2012.06.~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0.06.~ 제91회 전국체육대회 명예홍보대사
2008.09.~ 제2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1997.~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1993.~ 평택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회 위원
수상내역
2016.05.정지용 문학상
2012.은관문화훈장
2011.11.제19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2011.05.제18회 김준성문학상 시 부문
2009.05.제17회 공초문학상
2008.제6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2007.제12회 현대불교문학상
2004.제36회 한국시인협회상
2001.제6회 시와 시학상
1998.춘향문화대상